22.02.16 06:07최종 업데이트 22.02.16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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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공론장은 다이내믹합니다. 매체도 많고, 의제도 다양하며 논의가 이뤄지는 속도도 빠릅니다. 하지만 많은 논의가 대안 모색 없이 종결됩니다. 소셜 코리아는 이런 상황을 바꿔 '대안 담론'을 주류화하고자 합니다. 구체적으로는 ▲근거에 기반한 문제 지적과 분석 ▲문제를 다루는 현 정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거쳐 ▲실현 가능한 정의로운 대안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소셜 코리아는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이 상생과 연대의 담론을 확산하고자 학계, 시민사회, 노동계를 비롯해 각계각층의 시민들과 함께 만들어가는 열린 플랫폼입니다. 기고 제안은 social.corea@gmail.com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기자말]
젠더 담론에 관한 한 20대 대통령 선거 캠페인은 역대 선거와 확실히 구분된다. '남성'이 이렇게 빈번히 호명된 대선은 처음이다. '20대 남자'에 국한되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선거 캠페인에서 남성이 부분 집단으로 호명된 적은 없었다. 반대로 '여성'은 역대 선거에서 구체적인 집단으로 호명되었고 선거 공약집에는 늘 여성 공약이 별도 범주로 존재했다. 구직 준비 여성, 경력 단절 여성, 일하면서 아이를 키우는 여성...

왜였을까? 여성이 남성보다 정치적 영향력이 더 컸기 때문이 아니라 정반대였다. 이전까지 여성은 '부분'으로 인식되었지만 남성은 부분이 아닌 전체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시장과 정치의 구조를 디자인하고 공약집을 만드는 사람은 대부분 기성세대 남성이었다. 이들의 인식 세계에서 구직 준비 중인 사람과 여성은 있었지만 남성은 없었다. 일자리 정책 안에 여성 일자리 정책은 있었지만 남성 일자리 정책이 없었던 이유다. 그저 '일자리 정책'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2017년 대선 후보 공약집 중 여성 관련 공약 일부 ⓒ 각 후보

 
이대남은 부분으로 호명된 남성 

그런데 이번 20대 대선 캠페인 과정에서 남성이 한국 사회를 구성하는 전부가 아닌 부분으로 호명되기 시작했다. 최근 이른바 '이대남'으로 호명되는 정치 담론은 단기적으로 여러 문제가 있지만, 사회적 인식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부분으로서 남성을 사회적으로 인식한다면 여성과 남성이 아닌 다양한 성소수자들도 한국 사회를 구성하는 부분으로 인식될 가능성이 열린다. 나아가 남성 일반이 아니라 '20대 남자'로 호명되는 집단이 있다면 50대 남자, 30대 여자, 70대 성소수자도 공존의 권리를 누려야 할 '부분'으로 인식될 공간이 생긴다. 

20대 남자도 하나의 정체성 집단은 아니다. 10억 대출을 받아 아파트를 사고도 이자 걱정 없는 이대남도 있고, '지옥고'에 거주하면서 당장 월세 걱정을 하는 이대남도 있다. 최근 이대남 담론은 담론 주창자들의 의도와 무관하게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으로 보인다.

정치 담론은 시·공간적 제약 안에서 의미를 가지며, 시간이 흐르면서 의미가 변화하거나 사라지기도 한다. 2021년 남초 커뮤니티 중심으로 소비되고 있는 정치 담론으로서 '페미니즘'은 2018년 일명 '혜화역 시위' 당시 주목을 받았던 '한남' 담론과 맥락이 유사하다. 두 담론 모두 2018년 혹은 2021년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것은 아니며 각기 나름의 역사성이 있다. 그러나 정치 담론으로서 사회적 인식 영역으로 진입한 시점을 기준으로 보자.

2018년 한남 vs. 2021년 페미니즘
 

2021년 남초 커뮤니티 중심으로 제기된 ‘페미니즘’ 담론은 2018년 ‘혜화역 시위’ 당시 주목받았던 ‘한남’ 담론과 맥락이 유사하다. 사진은 2018년 6월 9일 서울 종로구 지하철 4호선 혜화역 인근에서 열린 '불법촬영 편파 수사 2차 규탄 시위' ⓒ 오마이뉴스

 
2018년 혜화역 시위를 접한 사람들은 시위 주체들이 사용하는 언어에 충격을 받았다. 그 대표적 언어가 '한남'이었다. 어느 시대나 개인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부조리한 현실에 저항하고자 할 때 늘 부딪히는 질문은, "대체 문제가 뭔가?"와 "그러는 당신들은 누구인가?"다. 혜화역 시위 주체들은 저항 대상을 한남으로, 저항 주체를 생물학적 여성으로 정의했다고 알려져 있다. 

당시 '한남'이라는 용어는 남성 지배의 기성질서라는 의미를 담은 그릇으로 해석된다. 성 상품화와 성범죄에 관대한 법 규범, 이를 정당화해온 다양한 낡은 인식체계, 적극적으로 규제하지 않거나 방조한 것으로 보이는 입법자와 정책집행자들이 만들어낸 부조리한 현실을 담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저항 담론이 항상 현실을 정확히 설명하는 건 아니며 주체들의 인식 또한 그렇다. 한남 담론도 "당신 아버지도 한남인가?" 등의 반론에 부딪혔고, 주체들도 저항 대상으로서 눈에 보이지 않는 기성의 질서와 실존하는 한국 남성에 대한 혼란스러운 인식을 드러냈다. 

'생물학적 여성'이라는 정의는 "여성의 권리를 위협하는 성별 변경에 반대한다"(2020년 트랜스젠더 학생의 여대 입학 문제에 대한 한 성명서)에서 드러났듯이 실존하는 모든 생물학적 여성과 남성이 집단 정체성으로 구분될 수 있다는 인식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런 인식은 현실을 반영하지 않으며, 문제를 정의하는 데에도 유효하지 않다. 해결해야 할 문제는 기성의 질서나 규범이지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혜화역 시위 주체들의 문제 제기는 한국 사회 구성원들에게 젊은 여성들이 살아내야 할 현실의 장벽과 평등하게 공존할 권리에 대해 고민할 소중한 기회를 제공했다.

최근 일부 젊은 남성 시민들이 사용하는 페미니즘 담론도 이와 맥락이 유사하다. 담론을 주창하는 이들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부조리한 현실이 있다. 사용 주체들은 저항 대상을 '페미니즘'으로, 스스로를 '안티 페미니스트'라는 용어로 정의한다. 저항 대상이 되는 기성의 질서나 규범은 남성 개병제, 가부장적 질서가 부과하는 남성의 성 역할, 여성들만 우대하는 것으로 보이는 정부 정책 등으로 표현된다. 

그런데 그들이 사용하는 페미니즘이라는 용어의 구체적 함의나 주체의 인식이 혼란스러운 것은 한남과 비슷하다. 이들이 지칭하는 페미니즘의 내용이 무엇인지, 페미니즘 대 안티 페미니즘이라는 집단적 정체성이 현실의 문제를 설명하거나 해결하는 데 어떤 유효한 함의를 줄 수 있는지는 주체들 스스로가 혼란스럽다.
 

민주주의에서 평등하게 공존할 권리의 주체는 개인이지만 개인을 둘러싼 조건은 구조적이다. 남성 개병제로 운영되는 군대 역시 마찬가지다. ⓒ 셔터스톡

 
그러나 용어가 혼란스럽다고 해서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급격한 산업구조 변동과 일자리 변화 속에서 20대 초반 군 복무로 인한 공백이 가져다주는 인생 주기의 지연, 점점 더 커지는 기회비용은 현실이다. 고용 기회와 임금의 성별 격차가 여성 시민의 생계와 생활을 위협하는 것이 현실인 것처럼. 

가계 경제를 일방적으로 책임지고 부계 사회의 낡은 질서를 지탱하도록 요구받는 규범이 남성들의 평등한 공존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도 현실이다. 성 상품화와 성범죄에 관대한 사회가 여성들의 삶을 위협하는 실체인 것처럼.

한국 사회가 함께 대면해야 하는 문제적 현실은 이처럼 실존하지만, 이 현실을 대면하는 것을 가로막는 다양한 정치 담론들이 있다.

'여성가족부 폐지'의 진정한 의미

2022년 1월,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여성가족부 폐지'라는 7글자를 페이스북에 게시했고, 언론은 이 행위를 '7자 공약'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여성가족부 폐지는 공약이 아니며, 윤석열 후보의 대선 캠페인 메시지 전략이다.

정부를 새로 구성할 때 기존 정부 기능은 얼마든지 재배치할 수 있고 명칭도 바꾸거나 없앨 수 있다. 미래창조과학부, 교육과학기술부, 지식경제부, 동력자원부… 모두 역대 어느 정부에서는 있었다가 지금은 없어진 부처 명칭이다. 

당연히 여성가족부라는 이름도 없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 기능을 '폐지'할 수는 없다. 현재 여성가족부는 26개 법률이 지정하는 정책 업무를 담당한다. 26개 법률을 모두 폐지할 게 아니라면 해당 기능을 이관하거나 담당할 다른 부처를 밝혀야 하지만, 윤석열 후보는 여태 답을 내놓지 않는다. 윤 후보의 관심은 정부 기능 재배치가 아닌 것이다.

여성가족부 폐지 담론도 역사성을 갖는다. 2008년 1월 당시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은 "여성부는 여성 권력을 주장하는 사람들만의 부서"라고 했고, 집권 한나라당은 당론으로 여성가족부 업무를 보건복지부로 이관하면서 여성가족부를 없애는 정부조직법을 발의하기도 했다. 

여성부 체제로 출범한 이명박 정부는 2년 뒤 부서를 다시 '여성가족부'로 바꾸고, 보건복지부로 이관했던 업무 중 상당 부분을 여성가족부에 재배치했다. 기능 자체를 없앨 수는 없었고 보건복지부가 이관된 업무를 모두 감당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여성가족부 폐지는 한국 사회를 남성 대 여성의 프레임으로 보고 다양한 사회 문제의 원인을 그들이 여성 권력으로 특정하는 질서에서 찾는 정치적 견해의 슬로건으로 존재했다. 이 슬로건은 그동안 큰 힘을 발휘하지 못했는데, 운동을 추동할 주체를 특정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지금 윤석열 후보와 국민의힘 현 지도부는 특히 코로나19 이후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에 처한 청년 남성 시민들을 이대남으로 호명하면서 성별 갈등을 동원하는 캠페인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여성가족부 폐지'는 그 의지를 담은 정치 슬로건이다.

이대남의 정체성

나는 윤석열 후보의 이 기획이 성공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대남은 하나의 정체성 집단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더 이상 구조적인 성차별은 없다. 차별은 개인적 문제다."(2022. 2. 7. 윤석열 후보 <한국일보> 인터뷰 발언 중)

"우리는 여전히 남아있는 성차별을 개선하여 공존하고 싶다."(2022. 2. 9. '행동하는 보통 남자들' 기자회견문 중)
 
민주주의에서 평등하게 공존할 권리의 주체는 개인이다. 그러나 개인을 둘러싼 조건은 항상 구조적이다. 가부장적 질서와 성 차별적 노동시장 구조는 20대 남성과 여성을 가리지 않고 짓누르지만 분명 여성에게 더 가혹한 성 차별적 효과를 갖는다. 남성 개병제로 운영되는 군대는 20대 남성들을 점점 더 견디기 힘든 현실로 내몰고 있다. 

한국 사회와 정치가 진지하게 대면해야 하는 것은 혼란스러운 담론 이면에 실존하는 부조리한 현실과 이 현실을 구조화하고 있는 법제도와 규범이며 변화의 방향과 방법이다. 문제는 다층적이어서 어느 하나로만 진단하기 쉽지 않다. 해결의 과정은 공론화, 대안들 간의 경쟁, 결정과 집행, 오류의 정정과 다시 공론화의 무한 반복일 수밖에 없기에 지난하다. 그래도 더 나은 공존의 규칙을 합의해내기 위해서는 불가피하며, 그 과정에서 수반되는 적대와 혐오의 정치 동원은 시민적 연대를 통해 넘어야만 하는 또 다른 산이다.
 

더 다양한 젠더 주체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고 공존의 규범을 찾는 과정은 때로 고통스러울 것이며, 당연히 갈등이 수반될 것이다. ⓒ 셔터스톡

 
터널의 끝이 동등한 권리 주체들의 평등한 공존으로 반드시 귀결된다는 보장은 없다. 더 다양한 젠더 주체들이 자기 목소리를 내고 공존의 규범을 찾는 과정은 때로 고통스러울 것이며, 당연히 갈등이 수반될 것이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둘러싼 진통 역시 이 과정의 한 사례다. 그러나 한국 사회 전체 구성원들이 지금보다 더 평등한 공존의 규범을 찾아 나가기 위해 감당해야만 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남성 집단의 해체는 국민의힘 지도부나 윤석열 후보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평등한 젠더 주체들의 연대에 기여할 수 있다. 

한국 사회 전체의 지배적 남성 이미지가 부분으로 해체되고, 그 남성이 다시 20대, 30대… 세대 단위로 해체되며, 20대 남성 내에서도 자산이 있는 집단과 없는 집단, 정규직과 비정규직, 페미니즘에 동의하는 집단과 아닌 집단 등의 다양한 주체들이 구별될 것이다. 그래서 동질적인 이해관계나 세계관을 가진 하나의 집단으로 만들고자 하는 기획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허구임이 빠르게 확인되어갈 것이다.

지금 한국 사회의 젠더 정치담론은 이러한 변화의 단계 어딘가에 있다.
  

ⓒ 서복경

* 필자 소개: 이 글을 쓴 서복경 서강대학교 현대정치연구소 책임연구원은 더가능연구소 대표를 맡고 있으며, 관심 분야는 민주주의, 한국정치, 청년 정책 등입니다. 2008년부터 현재까지 참여연대 의정감시센터 활동을 진행하고 있으며, 2020∼2021년 한국선거학회 부회장, 2022년 한국정치학회 부회장으로 학회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 1세대 유권자의 형성: 제1-2공화국의 선거>, <한국 민주주의, 100년의 혁명 1919∼2019>(공저), <한국의 선거 8>(공저) 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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