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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추는 농약 없이 못 키운다든지, 집에서 키워도 고추 먹기는 힘들다든지 하는 이야기는 텃밭을 가꾸기 전부터 자주 들었다. 물론 나는 텃밭 농부라 고추를 팔아야 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적극적인 자세까지는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그런 말들이 농사 짓는 일을 조심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초보 농부답게 공부는 남 부럽지 않게 많이 하고 있다. 툭하면 식물을 죽이던 마이너스의 손이었기 때문에 더욱 신경을 많이 쓰게 된다. 내 손에 들어왔다가 죽게 될까 봐 아주 마음이 조마조마하다.

그래도 첫 화분 농사 때 고추를 좀 따 먹었고, 그게 재미가 있었던 나는 매년 고추모종을 들였다. 그러다 작년엔 꽤 많은 고추를 심었다. 고추는 추위에 약하고, 그래서 더욱 애지중지 하느라 땀을 뺐는데, 내 생각만큼 그렇게 까탈을 떨지 않고 잘 자라줬다. 특히나 꽈리고추는 얼마나 잘 열리던지, 손님을 초대할 때 따서 살짝 볶아 내놓으면, 웬만한 애피타이저 부럽지 않은 근사한 메뉴가 되었다.

텃밭 고추를 집안으로 들이다
 
꽃이 조롱조롱 달린 고추 화분
 꽃이 조롱조롱 달린 고추 화분
ⓒ 김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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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되어 모든 것을 거둬들이고 나서 잠시 갈등을 하였다. 갑자기 추워지는 날씨에 나는 뭔가 더 일을 하고 싶지 않을 만큼 움츠러들었지만, 그래도 얘네들을 그냥 떠나보내기는 아쉬웠다. 그리고 내가 공부한 바로는, 고추는 날씨만 협조하면 다년생 작물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고추를 다년생으로 키운다니 생각만 해도 신이 났다.

사실 고추가 병충해에도 약하거니와, 처음 씨를 심어 키울 때는 추위에도 정말 약해서 자칫하면 비실비실해지기 쉽다. 그래서 튼실한 고추나무를 갖게 된다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실천에 옮겼다.

수확을 끝내고, 잎까지 다 따서 고춧잎까지 말린 텅 빈 나무들을 적당히 가지치기를 한 후 화분에 옮겨 담았다. 고추는 처음 자랄 때 Y자 모양으로 갈라지는 부분이 중요하다. 방아다리라 불리는 그 부분의 아래는 꽃이 피어도 다 따줘야 한다. 거기가 일종의 시작점이라고 보면 된다. 그래서 가지치기를 할 때에도 싹둑 다 자르면 안 되고 이 Y 모양을 남겨둬야 한다.

여러 그루가 있었지만, 대부분은 대충 화분에 담아 온실에 넣어두고, 그중 꽈리고추 한 그루만 흙을 완전히 갈아서 통풍 잘 되는 종류의 코코피트를 넣어 집안으로 들여왔다. 사실 잎도 다 땄기 때문에 상당히 볼품이 없었지만, 어쩐지 하나는 집안에 두고 싶은 욕심이 들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얼마나 다행인지! 지난 겨울은 밴쿠버답지 않게 추웠고 눈이 엄청나게 많이 왔기 때문에, 추위를 많이 타는 나는 사실상 온실을 따로 챙기지 못했다. 원래 마음 같아서는 전구라도 하나 켜서 온도를 보존해주고 싶었으나 우리가 그런 준비를 하기도 전에 추위가 닥쳤다. 안타깝게도 온실에서 대기하던 고추들은 영하 15도의 날씨에 다 죽은 것 같았다.

새롭게 알게 된 화초의 의견
 
한겨울, 실내에 보관중이던 고추나무에 꽈리고추가 열렸다.
 한겨울, 실내에 보관중이던 고추나무에 꽈리고추가 열렸다.
ⓒ 김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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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집안에 들여놓은 이 녀석은 귀엽게 새싹이 돋아나며 활기를 슬슬 찾기 시작했다. 볕이 별로 들지 않는 이 지역 날씨에도 불구하고, 창가에서 일광욕을 즐기며, 그 짧은 일조량을 이용하여 조롱조롱 꽃을 피웠다.

하지만 나는 이 꽃들이 열매를 맺는 것은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겨울에 창가의 고추를 따먹겠다고 할 만큼 염치가 없지는 않았다. 다만 예쁘게 피어 겨울에도 기쁨을 주니 관상용으로만도 너무나 훌륭한 역할을 한다며 좋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영양분 있는 흙을 들인 것도 아니었고, 벌 나비가 있을 리도 만무하기 때문이다. 그저 죽지 말고 얌전하게 버티다가 날씨가 따뜻할 때 밖에 심어주고 싶다는 의지로 조심스럽게 돌보았는데, 며칠 전 무심히 쳐다보다가 깜짝 놀랐다. 고추가 달린 것이다!

도대체 수정은 어떻게 된 것인지 알 턱이 없지만, 그렇게 매달린 꽈리고추는 조금씩 자라서 점점 길어지고 있다. 내 마음은 아슬아슬하면서도, 역시나 자연이 가진 위대한 힘에 또다시 크게 탄복했다. 감히 따서 먹어볼 생각도 할 수 없는 소중한 이 열매는, 환경이 바뀌어도 여건만 되면 제 몫을 하겠다는 화초의 의견인 것 같았다.

이 고추가 밖으로 나가려면 아직도 최소한 두 달은 더 있어야 하는데, 남은 기간 잘 버텨서 다시금 풍부한 영양과 햇빛을 즐기며 전성기를 누려주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우리네 삶도 겨울을 잘 이겨내고 나서 새로운 활기를 찾아 제 2의 인생을 만나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덧붙이는 글 | 기자의 브런치에 같은 내용이 실립니다 (https://brunch.co.kr/@lachouette/)


태그:#겨울고추, #고추키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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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 거주하며, 많이 사랑하고, 때론 많이 무모한 황혼 청춘을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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