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은 소소한 탐식을 통해 일상의 고단함과 노곤함을 이겨냅니다. 고독한 방구석 연주자인 임승수 작가는 피아노 연주를 통해 얻는 소소한 깨달음과 지적 유희를 유쾌한 필치로 전달합니다.[편집자말]
한창 음악 감상에 빠져 살던 1980년대 중학생 시절의 일이다. 카세트테이프로 베를리오즈의 환상교향곡을 감상하다가 5악장에서 매우 신기한 음향을 들었다. 5악장은 '마녀의 밤축제 꿈(Songe d'une nuit du Sabbat)'이라는 부제답게 도입부부터 불안과 공포감을 조성하는 현악기의 트레몰로로 시작해 연주 내내 갖가지 기괴한 음향이 난무한다. 그렇지만 대부분 다른 관현악곡 연주에서도 들을 수 있는 소리의 범주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그런데 5악장 후반부에 처음 들어보는 신기한 음향이 들리는 것 아닌가. 뭔가 현악기의 줄을 손가락으로 튕기는 피치카토와 살짝 비슷한 느낌인데, 음색은 그와는 전혀 다른 결을 지녔다. 오락실에서 갤러그나 인베이더를 하면서 들었던 효과음 같기도 하고,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지? 무슨 악기로 연주하는 거지? 내가 모르는 악기를 사용했나?

곡을 듣고 나서도 내내 기억에 남아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에 관한 정보를 찾아보니 바이올린과 비올라의 현을 활대로 두드리는 소리였다. 일반적으로 현악기는 활털을 현에 마찰시켜 연주하는데, 여기서는 딱딱한 나무 활대로 현을 두드려 소리를 낸 것이다. 이 주법을 콜 레뇨(col legno)라고 부른다. 마녀 모임의 기괴한 분위기를 소리로 표현하기 위해 베를리오즈가 현악기의 특수주법을 채용한 것이다.

일반적인 악기 연주법과는 다른 방식으로 연주하는 '특수주법'을 접한 것은, 중학생 시절 환상교향곡을 듣던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후 현대음악을 접하게 되면서 이 세상에는 참으로 기묘한 연주주법이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피아노도 특수주법에서 예외일 수 없다.

기묘한 피아노 연주주법

소싯적 피아노를 배운 사람이라면 대부분 그런 장난을 쳤을 것이다. 손바닥이나 팔뚝을 이용해 인접해 있는 여러 건반을 한꺼번에 누르는 행위 말이다. 심지어 몸통이나 엉덩이를 이용해서 그 짓을 하기도 했는데, 미국의 작곡가 헨리 카웰(1897-1965)은 자신의 곡에서 우리가 장난스럽게 하던 그 행동을 진지한 연주 방법으로 채용했다.

그가 1912년에 작곡한 피아노 소품 <The Tides of Manaunaun>의 악보를 보면, 왼손이 연주하는 부분에 독특한 기호가 계속 나온다. 이게 바로 헨리 카웰이 고안한 클러스터(cluster) 기법이다. 악보에서 빨간색 동그라미로 표기한 부분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보다시피 옥타브 간격의 '라' 음 두 개가 표기되어 있는데, 두 음을 포함해 그 사이에 있는 모든 음 그러니까 흰 건반과 검은 건반 전부를 한꺼번에 누르라는 지시다.
 
작곡가 헨리 카웰은 아일랜드 전설의 신 매나우나운(Manaunaun)의 기상을 표현하기 위해 클러스터(cluster) 기법을 착안했다고 한다.
▲ 헨리 카웰  작곡가 헨리 카웰은 아일랜드 전설의 신 매나우나운(Manaunaun)의 기상을 표현하기 위해 클러스터(cluster) 기법을 착안했다고 한다.
ⓒ 헨리 카웰

관련사진보기

 
작곡가 헨리 카웰은 아일랜드 전설의 신 매나우나운(Manaunaun)의 기상을 표현하기 위해 고심하다가 이 클러스터(cluster) 기법을 착안했다고 한다. 유트브에서 이 곡의 연주를 찾아 들어보면 피아니스트가 왼손을 활짝 펴서 건반을 한꺼번에 누르는데, 울려 나오는 음향이 뭔가 신비로운 느낌을 자아내어 독특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헨리 카웰은 음향에 대한 실험 정신이 남달랐던 모양이다. 인접한 건반을 한꺼번에 누르는 클러스터 기법만으로는 성에 안 찼는지, 피아노 내부의 현을 직접 손으로 연주하는 주법을 도입하기에 이른다. 마치 바이올린이나 첼로의 현을 다루듯 피치카토, 글리산도 주법을 자신의 피아노곡에 적용한 것이다. 1925년에 작곡한 <The Banshee>에서 이러한 현악기적 주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새로운 음향을 실험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기행을 일삼았던 것으로 유명한 미국의 작곡가 존 케이지(1912-1992)는 그랜드 피아노의 현과 현 사이에 너트, 볼트, 스크류, 나무, 컵, 플라스틱 등의 이물질을 끼워 넣어 피아노의 음색에 변화를 주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이러한 기법을 '프리페어드 피아노(Prepared piano)'라고 하는데 유튜브에서 이 기법을 이용한 곡을 들어보니 타악기 같은 묘한 음색이 인상적이었다.

재밌는 것은 이 프리페어드 피아노 기법 역시 헨리 카웰이 존 케이지보다 먼저 시도했다는 점이다. 헨리 카웰의 실험 정신 하나는 진정 역대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현대음악에 별의별 희한하고 기상천외한 시도들이 많다는 것은 대략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그런 음악들은 으레 인기도 없고 잘 연주되지도 않다 보니, 딱히 특수주법에 진지한 관심을 둔 적은 없었다. 그 영상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검은 건반에 내리꽂히는 우람한 팔뚝
 
헨리 카웰이나 존 케이지가 시도했을 법한 갖가지 특수주법들이 등장한다.
▲ 피아노가이즈의 연주 장면 헨리 카웰이나 존 케이지가 시도했을 법한 갖가지 특수주법들이 등장한다.
ⓒ 피아노 가이즈 유튜브 화면 캡처

관련사진보기

 
때는 2013년 3월 30일이었다. 아내가 트위터에서 재밌는 걸 봤다며 유튜브 영상 하나를 보내줬다. 한때 대단한 인기를 누렸던 원 디렉션의 <What Makes You Beautiful>을 피아노로 연주한 영상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헨리 카웰이나 존 케이지가 시도했을 법한 갖가지 특수주법들이 등장하는 것 아닌가.

피아노 현을 손가락으로 퉁기고, 피아노 몸체를 타악기처럼 두들기고, 건반 뚜껑을 쿵쿵 여닫으며 박자를 넣고, 첼로의 활털을 분리해 피아노 현에 비벼대는 등, 다섯 명의 남성이 피아노를 대상으로 준비된 계획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소리가 (물론 편집 과정에서 상당한 조정이 이뤄졌겠지만) 오케스트라처럼 다채로운 데다가 편곡도 워낙 잘 되어 있어서, 집에서 혼자 영상을 보다가 손뼉을 치고 환호성을 지를 정도였다.

대중성이 완벽하게 결여된 실험적 현대음악에서나 등장하던 특수주법을 인기 유행가의 피아노 편곡 연주에서 만나다니. 애인 몰래 나간 소개팅에서 파트너로 애인이 등장하는 것 같은, 그런 정도로 예상치 못한 그림이었다. 네가 여기서 왜 나와?

영상에 등장하는 연주자들은 피아노 가이즈(The Piano Guys)라는 음악 그룹을 결성해 활동하고 있었다. 급 관심이 생겨서 피아노 가이즈의 유튜브 채널을 촘촘하게 살펴보다가 조회수가 높은 피아노 독주곡을 발견했는데, 존 슈미트(피아노가이즈 멤버)가 작곡한 <All of Me>였다.

요즘엔 피아노 애호가들이 워낙에 즐겨 치는 곡이지만, 2013년에는 지금만큼 알려지지는 않았었다. 플레이 버튼을 누르고 선율과 리듬이 제법 맘에 들어 곡에 맞춰 고개를 흔들고 있는데, 후반부에서 놀라운 장면이 펼쳐졌다. 특수주법인 클러스터 기법이 시전되는 것 아닌가!
 
우람한 팔뚝으로 클러스터 기법을 시전하고 있다.
▲ 존 슈미트의 All of Me 연주 장면 우람한 팔뚝으로 클러스터 기법을 시전하고 있다.
ⓒ 피아노 가이즈 유튜브 화면 캡처

관련사진보기

 
곡이 클라이막스에 다다른 순간 존 슈미트가 우람한 팔뚝을 검은 건반에 수직으로 내리꽂는데,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에서 대한민국 선수가 고난이도의 점프를 돌고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착지하는 것 같은 짜릿함이 느껴졌다. 이건 못 참지! 바로 인터넷을 뒤져 악보를 내려받아 인쇄했다.

리듬도 복잡하고 템포도 빠른 데다가 검은 건반도 많이 눌러야 해 제법 까다로웠지만, 꾸준한 연습이라면 극복할 수 있겠다 싶어 과감히 도전했다. 클러스터 기법이 등장하는 부분을 연습하는데, 팔뚝으로 검은 건반을 한꺼번에 눌러도 소리가 지저분하지 않고 곡의 흐름과 잘 어울리는 것이 무척 신기했다.

존 슈미트는 이 상황을 예상했을까?

역시 과도한(?) 연습만큼 정직한 것은 없다고, 시나브로 실력이 향상되어 어느덧 처음부터 끝까지 칠 수 있게 되었다. 2013년 11월에 아내가 촬영해 준 연주 영상을 아래에 옮긴다(링크 안내 : https://youtu.be/IHYVE7qrBko).
 
 
영상을 보니 그 당시 살던 산꼭대기 빌라가 떠오른다. 극기 훈련장도 아닌데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엄청 추웠었지. 그때 거실에 놓고 사용하던 영창 업라이트 피아노구나. 지금은 어디로 팔려나가 누가 연주하는지 모르겠네. 입고 있는 후드티는 구멍이 송송 나서 진작 버렸고, 연주도 지금의 내가 보기에는 거칠고 다듬을 곳투성이다.  

하지만 이 영상이 진정 가치를 발휘하는 구간은 11~13초다. 혹시 해당 구간에서 특별한 뭔가를 감지한 사람 있는가? 나는 이 영상을 볼 때마다 그 구간을 꼭 여러 번 듣는다. 거기에는 채 돌이 안 된 둘째 딸이 피아노 연주하는 아빠가 너무 멋있다며 옹알이하는 소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아내가 정성 들여 촬영해주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이 옹알이로 응원하는데, 중년 남자의 연주에 한껏 기합이 들어가는 건 당지지사! 이얍! 영상 속에서 클러스터를 시전하는 팔뚝에 한껏 핏줄이 서고 근육이 잡힌 이유다.

유튜브에서 'All of Me'로 검색해 보니 국적과 인종을 초월해 수많은 방구석 피아니스트들이 팔뚝으로 건반을 찍어대고 있었다. 존 슈미트가 이 곡을 처음 유튜브에 올릴 때, 이렇게 많은 사람이 자신을 따라 팔뚝샷을 시도하리라 예상했을까? 예술이 자라 온 발자취를 돌이켜보면, 당대에 파격적이고 급진적이라고 여겨졌던 시도들이 차츰 대중의 지지를 얻으며 보편화되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헨리 카웰이 1912년에 실험적으로 도입한 클러스터 기법은 백여 년 만에 존 슈미트의 <All of Me>를 통해 드디어 영주권을 획득했다. 클러스터 기법이 넉살 좋게 피아노 기초 교본에 들어갈 날도 멀지 않았구나.

태그:#임승수, #피아노, #특수주법, #ALL OF ME, #존 슈미트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피아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 <나는 행복한 불량품입니다> <삶은 어떻게 책이 되는가> <원숭이도 이해하는 공산당 선언> <원숭이도 이해하는 마르크스 철학> 등 여러 권의 책을 쓴 작가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