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2.24 13:58최종 업데이트 22.02.24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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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여자근로정신대로 끌려가 강제노역을 당한 안희수 할머니가 21일 경남 창원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93세다.

고 안희수 할머니는 초등학교 6학년 때인 1944년 강제징용을 당했다. 끌려간 곳은 전범기업인 후지코시의 도야마공장이다.

"후지코시에 가면 상급학교에도 진학할 수 있고 꽃꽂이도 배우고 돈도 벌 수 있다"라고 일본인 교사가 그에게 권했다. 그런 감언이설에 속아 바다를 건넜지만, 도쿄보다 위도가 약간 높은 일본 서해안에 위치한 도야마공장은 절대로 그런 데가 아니었다. 
 

도야마 위치 ⓒ 구글 지도

  
공기밥 4분의 1과 단무지가 월급

소녀 안희수 외에도 감언이설이나 강압에 의해 끌려간 한국인이 도야마공장에 한둘이 아니었다. 그때까지 경상도 말씨에만 익숙해 있었을 이 초등학교 6학년 소녀는, 전라도·충청도·경기도 말씨를 구사하는 각지 사람들이 자신과 비슷한 희망을 갖고 한 곳에 모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것이다.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가 2008년에 펴낸 <조선여자근로정신대 방식에 의한 노무동원에 관한 조사>에 따르면, 도야마공장에서 노예노동을 당했다고 신고한 116명은 전라도·경상도·충청도·경기도 출신이었고 이 중 10명이 안희수 할머니처럼 마산부(창원) 출신이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들의 출생 연도는 안희수 할머니와 비슷한 1929~1932년에 집중돼 있었다. 1929년생이 26명(22.4%), 1930년생이 29명(25.0%), 1931년생이 24명(20.1%), 1932년생이 20명(17.2%)이었다.

1944년을 기준으로, 만 12세에서 15세까지가 85.3%를 차지했다. 이처럼 어린 사람들을 상대로 강압과 기망을 사용해 강제노역을 시켰던 것이다. 일본 국가의 '국격'과 후지코시 기업의 '사격(社格)'을 의심케 하는 일이다.

일본인 교사는 그곳에 가면 꽃꽂이를 배울 수 있다고 희망을 주었다. 하지만 소녀 안희수를 맞이한 것은 군대식 훈련과 강제노동이었다. 꽃을 만지며 살 수 있다고 했지만, 막상 그가 만지게 된 것은 포탄 외피 같은 무기 부품이었다.

그는 여러 종류의 작업에 투입됐다. 자기 신체보다 두 배 이상인 대형 선반기계도 다루었다. 작동 중인 기계에 기름을 넣어주면 입에 깔때기를 대고 빨아올리는 작업도 했다고 한다.

10대 초반 소녀들에게 중노동을 시키면서도 전범기업은 식사조차 제대로 제공하지 않았다. 아침 식사로는 공기밥 4분의 1과 단무지와 된장국을 제공했고, 점심 식사로는 빵 하나만 지급했다. 그렇게 먹은 것이 그가 받을 '봉급'의 전부가 됐다. 단 한 번도 봉급을 돈으로 받은 적이 없다고 그는 생전에 진술했다.
  

담장 벽에 막힌 66년의 한 2011년 10월 31일 후지코시사가 정문을 봉쇄한 가운데 회사 담장을 사이에 두고 회사측 경비원과 후지코시 강제노역 피해자 김정주 할머니가 설전을 벌이고 있다. 김 할머니를 비롯한 피해자들은 이날 후지코시가 강제노역에 사과하고 손해배상을 할 것을 요구했다. ⓒ 이국언

 
평생 가도 잊힐 리 없는 혹독한 노예 생활이었다. 그 한을 조금이나마 풀고자 나이 70을 넘은 뒤에 소송 투쟁에 돌입했다. 그 이전에도 투쟁할 마음이 없지 않았겠지만, 친일 성향을 띤 1990년대 초반까지의 독재정권 하에서는 꿈도 꿀 수 없었다.

필리핀 피플파워와 한국 6월항쟁과 동유럽 민주화운동 등으로 세계 시민들의 정치적 지위가 급상승한 1990년대 이후의 시대 흐름이 안희수 할머니 같은 이들에게 용기를 줬고, 이 흐름은 그가 2003년에 일본 법원에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하도록 힘을 북돋아줬다.

일본에서의 법정 투쟁은 '당연히' 패배로 끝났다. 2011년에 패소가 확정됐다. 그래서 2013년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제소하며 새로운 투쟁을 이어갔다. 1심과 2심에서 그는 연승을 거뒀다. 최종 승리를 위해 대법원에도 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 전에 눈을 감고 말았다. 약간이라도 한을 풀고자 했지만 그마저도 풀지 못한 채 떠난 것이다.

안희수 할머니가 있었던 시절에 도야마공장에서 유행했던 노래가 있다. 한국인 피해자들 사이에서 퍼져 있었던 노래다. 청주 출신인 1930년생 권○순 피해자의 증언에 따르면, 그 노래 가사는 아래와 같다. 위 보고서에 나오는 내용이다.
 
삼사월 긴긴 해에 해를 못 보고
동지섣달 긴긴밤에 잠을 못 자고
지겨운 후지코시
언제나 면해
다프 깎는 기계 소리는
처량도 하다
 
고 안희수 할머니를 비롯한 한국인 피해자들은 "지겨운 후지코시 언제나 면해"라는 노래를 응얼거리며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이때의 한을 풀어보지 못한 채 한 분 두 분 세상을 떠나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스스로 '나치'라 불러 

후지코시 기업은 스스로 나치 후지코시로도 부른다. 상표로 사용하는 '나치'를 자랑스러워한다. 1929년에 히로히토 일왕(천황)이 후지코시 제품에 관심을 표한 일을 기념하고자 일왕이 타는 군함인 나치(那智)함의 이름을 따서 상표로 썼다고 한다.

히틀러나 무솔리니뿐 아니라 히로히토 역시 제2차 세계대전 전범이다. 미국이 일본을 동맹국으로 선택하는 바람에 지위와 명예를 지키게 됐을 뿐, 그 역시 히틀러나 무솔리니와 다를 바 없다. 그런 히로히토가 보여준 관심에 감격해 그가 타는 나치함의 이름으로 상표를 만들었다. 그 나치에 담긴 의미가 독일 나치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후지코시의 회사 로고 '나치'. 2011.11.3 ⓒ 이국언

 
그런 후지코시에 강제징용 된 것에 한을 품고 안희수 할머니를 비롯한 피해자들이 법정투쟁을 벌였지만, 일본 법원은 정당한 요구를 거절했다. 일본이 그렇게 하는 것은 제국주의 침략의 죄악을 뉘우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국주의 시절을 영광스러워하는 측면도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후지코시 앞에 나치를 붙이며 영광스러워하듯이, 일본인들은 후지코시로 징용되는 것을 영광스럽게 미화했다. 다른 전범기업에 징용되는 것도 그처럼 미화했지만, 후지코시로 끌려가는 것 역시 아름답게 포장했다.

한국인 카미카제 특공대원으로 1944년 11월 필리핀 레이테만에서 전사한 마쓰이 히데오(한국명 인재웅)의 동생 역시 1945년에 후지코시로 동원됐다. 위 보고서는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및 1945년 3월 15일자 <북일본신문>을 인용해 일본이 후지코시 강제징용을 어떻게 미화했는지를 설명한다.
 
이들은 후지코시로 동원되었는데, 마쓰이 여동생의 여자근로정신대 동원은 '오빠의 뒤를 따라 나도 증산장의 특공대가 되겠습니다'라는 미담으로 선전되었다. 일본신문에도 '레이테에서 산화한 오빠의 원수, 군수 증산으로 갚으리라, 반도에서 온 마쓰이 요시코(松井淑子)'라며 보도되었다. 당시 강조되었던 '전선에서 싸우는 군인, 후방에서 지키는 여성'이라는 논리 속에서 마쓰이 요시코는 항공기 증산으로 오빠의 뜻을 이어받는다는 미담으로 소개되었다.
 
일부 일본인들의 기억 속에는 식민지 한국에서 후지코시 등으로 징용된 한국 소녀들이 대일본제국의 승리를 위해 자발적으로 뛰어들었다는 당시 신문 보도들의 잔영이 남아 있다. 그런 기억도, 강제징용 소송에 대한 일본인들의 차가운 반응에 제한적이나마 영향을 미쳤으리라고 볼 수 있다.

안희수 할머니가 못다 끝낸 강제징용 소송을 마무리하는 것은 그런 일본인들의 기억을 정정해주는 효과도 낳을 수 있다. 피해자 본인과 유족들의 한을 조금이나마 푸는 차원은 물론이고 일본인들의 잘못된 역사인식을 바꾸는 데도 기여할 수 있다. 안희수 할머니의 법정투쟁을 계속 이어가야 하는 이유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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