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2.27 19:57최종 업데이트 22.02.27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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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징용 피해자 김한수 할아버지. 2010.7.5 ⓒ 오마이뉴스 장재완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작년 하반기부터 소멸시효 때문에 잇달아 패소하고 있다. 23일에는 104세 된 김한수 할아버지가 미쓰비시중공업을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패소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96단독 이규백 판사는 기각 사유를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피해자 대리인인 김성주 변호사가 "항소심에서 소멸시효 등 쟁점에 대해 다시 판단을 받아보고자 한다"라고 말한 사실을 보면, 이번에도 소멸시효가 재판 결과에 영향을 미친 주요 법리 중 하나인 것으로 보인다.


2018년 8월 9일 자 <오마이뉴스> 기사 '죽으면 끝인가...100세 강제징용 할아버지의 한탄'(http://omn.kr/s6r1)에 따르면, 김한수 할아버지는 그날 서울 프레스센터 기자회견에서 "항상 가슴에 피맺혀 있는 것은 일본과의 문제"라며 "인생 이렇게 살다 가면 끝인가 라는 생각에 한스럽고 슬플 때가 많습니다"라고 탄식했다.

황해도 연백 출신인 그는 "강제로 끌어다 일을 시켰으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하는데, 오늘까지 아무런 대가가 없다"라며 "지금까지 일본 대표라고 하는 사람들의 사과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너무도 괘씸하다"라고 말했다.

3·1운동 무렵에 태어나 20대 초중반에 강제징용 시기를 살았던 분이 100세가 넘도록 가슴에 피 맺힌 한을 품고 있다. '괘씸하다'는 분노가 아직도 남아 있다. 조금이나마 풀어보고자 하는 그의 한이 소멸시효라는 논리에 막혔다.

소멸시효라는 속 편한 논리

이처럼 딱하고 안쓰러운 원고들을 패소시킬 때, 소멸시효는 재판부에 부담을 덜 주는 법리라고 할 수 있다. 일본 국가를 대한민국 법정에 세울 수 없다는 이유로(주권면제·국가면제),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모든 게 끝났다는 이유로, 일본과의 국제조약을 지켜야 한다는 이유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리게 되면 비판을 받기 쉽다.

주권면제 이론은 모든 경우에 보편타당하게 적용되는 법리가 아니다. 청구권 협정에서 강제징용 문제가 다뤄지지는 않았다. 강제징용 피해에 관한 조약도 없었다. 이런 이유로 강제징용이나 위안부 소송을 기각한 재판부가 비판을 많이 받는 것은 그 논리에 허점이 많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소멸시효 논리는 '도와주고 싶지만, 피고 측 주장대로 시간이 지나서 어쩔 수 없다'는 뉘앙스를 수반하기 쉽다. 그래서 재판부의 부담을 덜 준다고 볼 수 있다.

원고나 피고가 주장하지도 않는 논리를 재판부가 채택하지는 않는다. 최근에 재판부들이 시효 논리를 잇달아 채택하는 것은 전범기업 변호인들이 '손해배상청구권이 1965년 협정으로 소멸하지 않았다는 2012년 대법원 판결을 시효 기산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전범기업들은 한국 민법 제766조 제1항에 따라 2012년 판결부터 3년이 경과하면 시효가 소멸한다고 주장한다.

전범기업들이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2012년 판결 이전까지는 피해자들이 권리를 갖고 있었음을 인정하는 격이 된다. 그런데 그들은 2012년 이전에도 '권리가 이미 소멸했다'고 주장했다. 돈을 주지 않기 위해 매번 논리를 바꿔가며 대응하고 있는 것이다.
  

서울중앙지방법원 ⓒ 소중한

 
사실, 시간이 흐르면 권리가 소멸한다는 법리는 자연법칙을 반영한 게 아니라 국가권력의 편의를 위한 것이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1992년 3월 31일 "시효제도의 존재 이유는 영속된 사실 상태를 존중하고 권리 위에 잠자는 자를 보호하지 않는 데 있고, 특히 소멸시효에 있어서는 후자의 의미가 강하다"고 판시했다(사건번호 91다32053). 권리를 행사하지 않고 방치해두다가 뒤늦게 법원 문을 두드리는 사람으로 인해 국가가 시간을 소비할 수 없다는 의미가 강한 것이 소멸시효 법리다.

소멸시효가 필요한 이유에 관해 민법학계의 통설은 법적 안정성 확보, 시일 경과로 인한 입증 곤란의 구제, 권리행사 태만에 대한 제재(권리 위에 잠자는 자는 보호하지 않는다)를 이유로 든다. 권리를 소멸시켜야 할 자연법칙적 사유가 있는 게 아님을 판례와 통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일본 언론 보도에서는 이 같은 법리를 근거로 징용 피해자들이 연달아 패소하는 최근 양상들을 '조심스럽지만 기대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분위기가 표출된다. 작년 하반기부터 두드러진 분위기다.

지난해 10월 29일 자 <니혼게이자이신문> '전 징용공 소송의 청구권이 시효(소멸), 판결 확정 3년, 해결 멀어(元徴用工訴訟の請求権が時効 判決確定3年、解決遠く)'는 "최근에는 한국 재판소가 시효를 이유로 소송을 기각하는 케이스가 잇따르고 있다"고 한 뒤 "시효에 의해 원고가 이길 가능성이 좁아져 소송이 끝없이 늘어날 사태에 대한 염려는 작아졌다"며 안도감을 표시했다.

이어 11월 3일 자 <산케이 비즈>에 실린 "10월 30일이면 대법 판결로부터 3년이나... 징용공 소송 때문에 움직일 수 없는 한국, 원고는 1000명 넘어(最高裁判決から10月30日で3年も…徴用工訴訟で動かぬ韓国、原告は1000人超え)"라는 기사는 "시효 성립을 이유로 배상 대상을 제한하는 새로운 판단도 나오고 있다"며 최근의 판결 경향을 '새로운 판단'으로 표현했다.

이처럼 일본 매체들에서는 '새로운'이란 표현을 써가며 최근 상황에 기대감을 표하는 보도들이 나오고 있지만, 소멸시효를 이유로 징용 피해자들을 패소시키는 방식은 1990년대 일본 법원들이 자주 구사했던 방식이다.

당시의 일부 재판에서는 '시효는 1년이다'라는 어이없는 판결이 나오기도 했다. 1996년 7월 25일 자 <동아일보> 6면 좌상단 기사에 따르면, 일본 도야마 지방재판소는 피해자 이종숙·최복년·고덕환 등이 전범기업 후지코시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강제연행과 강제노동이 있었다'는 점과 '임금 미지급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시효가 경과했다는 이유로 청구를 기각했다. "재판부는 그러나 일본 민법상의 임금 채권의 시효가 1년임을 근거로 원고 측이 요구한 임금채권이 소멸됐다고 판결했다"는 게 보도 내용이다.

신고하라며 신고 못하게 한 한국 정부

시효를 무기화하는 방식은 한국 정부에서도 나왔다. 김대중-박정희 후보가 격돌한 4·27 대선과 그 직후의 5·25 총선을 목전에 둔 1971년 3월 21일 시행된 '대일 민간청구권 신고에 관한 법률'에도 그런 방식이 투영됐다.

이 법 제11조 제1항은 법률 시행 후 2개월부터 10개월 사이라는 짧은 기간 내에 청구권을 신고하도록 했다. 이 외에도 각종 기간 규정이 신고를 제약했다.

제2조 제1항에 따르면, 1947년 8월 14일 이전에 일본에서 귀국한 자가 증거를 갖고 와서 신고할 수 있다고 했다. 또 징용으로 끌려가 사망한 피해자의 유족이 청구권을 신고하려면, 피해자가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사망했음을 입증해야 했다. 징용 갔다가 죽었다거나 귀환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면 되는 게 아니라, 징용 가서 8·15 이전에 사망했음을 입증해야 했던 것이다.

벌칙 규정도 많았다. 15개 조항 중에서 3개가 신고자에 대한 벌칙 조항이다. 제13조는 청구권을 입증할 서류를 일본에서 국내로 갖고 들어올 때 반국가적 목적이 있었다면 사형·무기징역 또는 10년 이상 징역이나 3천만 원 이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했다. 청구권을 입증할 자료를 제출했다가는 자칫 반국가 사범, 빨갱이로 몰릴 수도 있었던 것이다.

그해 5월 21일 자 <매일경제> '민간청구권 신고 업무를 개시'는 이날부터 재무부에서 업무가 개시됐다면서 "어차피 형식과 구호에만 그치게시리 되어 있다"라며 "정치적인 이유에서 하지 않을 수 없어 흉내만 내고 있다는 눈치"라며 재무부 분위기를 전했다.

그러면서 "선거에 타이밍을 맞추고 있는 점"을 거론하면서 "애당초부터 이 문제는 선거 때가 아니면 곧잘 행방불명이 되곤 했다"라고 언급했다. 흉내만 내고 있는 것이니 기대감을 갖지 말라는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전했던 것이다. <산케이 비즈>는 "새로운 판단"이란 표현을 썼지만, 이처럼 한국 정부와 일본 법원들이 예전에 구사했던 방식이 작년 하반기부터 한국 법원에서 다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부산의 강제징용노동자상 ⓒ 정민규


이번에 김한수 할아버지의 소를 기각한 소멸시효 법리는 법적 안정성을 확보하고, 시일 경과로 인한 입증 곤란을 구제하고, '권리 위에 잠자는 자를 굳이 보호할 필요가 없다'는 논리에 입각해 있다. 하지만 징용 문제에 소멸시효를 적용하는 것이 도리어 법적 안정성을 해친다. 또 징용 문제의 경우에는 소멸시효가 입증 곤란 구제나 권리행사 태만 제재와도 무관하다.

위 <매일경제> 기사에서 나타나듯이, 박정희 정권이 대선·총선에 임박해 "흉내"라도 낸 것은 이를 해결하라는 국민의 요구가 높았기 때문이다. 이는 시효를 이유로 징용 문제를 덮기보다는 이를 하루빨리 해결하는 것이 사회적 안정성에 이로웠음을 의미한다.

또 피해 사실의 입증을 교묘히 막은 것은 한·일 두 나라 정부와 전범기업들이었다. 입증 곤란을 구제하고자 소멸시효 논리가 동원됐던 게 아니다. 그리고 피해자들은 단 한 번도 권리 위에서 수면을 취한 적이 없다. 1970년대 이전에도 피해자들의 요구가 드높았기 때문에 박 정권이 그들의 표를 의식해 흉내라도 냈던 것이다.

피해자들이 해방 80년이 다 되어 가는 시점까지도 법원 문을 두드리는 것은 이들이 소멸시효 경과를 방치했기 때문이 결코 아니다. 이들의 권리구제를 막기 위한 두 정부와 전범기업들의 노력이 번번이 승리했기 때문이다. 그런 점을 감안하지도 않고 '왜 이제 와서 청구하느냐?'라는 식으로 기각하는 것은 너무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김한수 할아버지는 '가슴이 항상 피 맺혀 있다', '괘씸하다'고 말했다. 그의 분노는 아직까지도 '항상' 끓고 있다. 그의 '가슴속 시효'는 아직도 진행 중이다. 1년 만에 끝났다느니 3년 만에 끝났다느니 10년 만에 끝났다느니 하며 돌려보내는 것은 그를 우롱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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