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3.12 20:44최종 업데이트 22.03.12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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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 일본군 만리창으로 상륙한 일본군. 청일전쟁 수행기간 동안 용산은 일제의 조선강압 및 전쟁수행과 후방 물자수탈기지로 활용 되었음. ⓒ 서울역사아카이브

 
서울 용산은 주한미군기지로 각인돼 있지만, 예전에는 주한청군기지가 있었던 곳이다. 1882년에 고종 임금의 요청을 받고 임오군란을 진압하러 온 청나라 군대가 이곳 용산에 주둔했다.

청군은 임오군란의 주역인 한양 주민들과 군인들을 완전히 제압하고자 이들이 지지하는 흥선대원군 이하응을 청나라로 납치하는 기상천외한 정변을 저질렀다. 이 사건이 발생한 곳도 용산이다.


구한말 학자인 황현의 <매천야록>은 청나라 군대 수장인 마건충이 흥선대원군을 용산 주둔지에 초청한 뒤 납치했다고 말한다. 음력으로 고종 19년 7월 13일자(양력 1882년 8월 26일자) <고종실록>도 피랍 장소가 용산 둔지미(屯地尾)라고 말한다. 훗날 미군기지가 생길 곳에서 대원군이 변을 당했던 것이다.

주한청군기지에서 주한일군기지로

그렇게 주한청군기지가 된 곳이 뒤이어 주한일군기지가 됐다. 1904년 러일전쟁 발발 직후의 일이었다. 러시아와의 승부를 위한 군사기지 확보를 목적으로 용산이 선정됐던 것이다.

지난 2월 7일 발행된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의 <용산, 빼앗긴 이방인들의 땅> 제1권은 "일제가 이른바 한일의정서(1904년 2월 23일)에 근거하여 서울 지역에서 일본군 주둔을 위한 대상지로 정한 곳은 갈월리, 이태원, 둔지미, 서빙고 일대였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곳은 원래 둔지방(屯芝坊)에 속한 지역이었으나 편의상 용산 군영지로 명명했기 때문에 이로부터 일본 군영지는 곧 용산이라는 등식이 성립"됐다고 설명한다. 지금 우리에게는 용산 하면 미군기지가 떠오르지만, 1904년 이후로 반세기 동은 용산 하면 일군기지가 연상됐던 것이다.
 

<용산, 빼앗긴 이방읜들의 땅>. ⓒ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지난 100년간 용산 땅에서 벌어진 역사적 사건들과 변화를 문헌과 답사를 바탕으로 정리한 이순우 연구원의 책은 일본군의 용산 주둔이 대규모 토지 징발을 수반했다고 알려준다. "당초 이 지역을 대상으로 일본측이 징발을 요구한 면적은 무려 300만 평에 달할 정도로 대규모였다"고 말한다. 이렇게 형성된 주한일군기지가 주한미군기지의 토대가 됐던 것이다.

용산은 한강과 서울을 잇는 곳이다. 청군도 그렇고 일군도 그렇고 한강을 타고 들어온 외국 군대가 한양을 코앞에서 압박하기 좋은 위치가 도성 남쪽 용산이었다. 용산 외국군 기지는 도성을 지켜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위협하기 위해서 설치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 보면 주한일군기지 당시의 용산이 일본제국주의가 머무는 정적인 장소였을 뿐 아니라 일본제국주의의 에너지가 이합집산을 하는 동적인 장소이기도 했다는 느낌을 가질 수도 있다. 군국주의 에너지가 뻗어나가거나 들어오는 거점으로도 활용됐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자들의 사령부, 용산
 

용산기지(1945.09) 미군이 촬영한 해방 직후 용산기지. ⓒ 이영천(용산공원 전시물 촬영)

 
제국주의자들은 용산을 마치 자국 내의 사령부나 거점인 듯이 활용했다. 용산을 해외 침략의 거점 중 하나로 이용했던 것이다. 책은 "이른바 시베리아 출병을 비롯하여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에 이르기까지 침략전쟁이 벌어질 때마다 선봉 노릇을 자처하였다는 점은 새삼 강조할 필요도 없어 보인다"고 한 뒤 이렇게 서술한다.
 
제20사단(용산) 병력이 우선 뉴기니아 방면(1942.12)으로 이동하였고, 계속하여 이 무렵에 창설된 제30사단(1943년 8월에 평양에서 신규 편성) 병력이 필리핀 민다나오섬으로, 제49사단(1944년 2월에 용산에서 신규 편성) 병력이 버마 전선(1944.6)으로, 그리고 기존의 제19사단(나남) 병력 또한 필리핀 전선(1944.11)으로 추가로 재배치되는 과정이 이어졌다.
 
용산은 일본군이 어디론가 뻗어나가는 거점이 됐을 뿐 아니라, 한국 청년들이 어디론가 끌려가는 거점이 되기도 했다. 지원병 제도라는 허울 아래 강제징병 절차 역시 이곳에서 진행됐다. 일본군 사교 클럽인 용산해행사가 그런 모집 장소로도 활용됐다. "용산해행사는 일제가 조선인들에 대한 전쟁 동원 수단으로 도입했던 이른바 지원병의 최종 선발 장소로 사용되었다는 점도 꼭 기억될 필요가 있다"고 책은 지적한다.
  
용산은 기차가 모였다 흩어지는 지점이라는 의미도 갖게 됐다. 식민지 한국 철도의 분기점 역할을 맡게 됐던 것이다. "러일전쟁의 원활한 수행을 위해 일제가 이곳을 군용철도인 경의선의 분기점으로 설정하면서 용산역 일대 지역의 위상은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 "용산역은 경의선과 더불어 경원선의 분기점으로 설정됨에 따라 그야말로 철도 운행의 요충지라는 위상을 차지하게 되었다"고 책은 말한다.

지금의 서울역인 남대문정거장을 놔두고 용산역이 그런 위상을 갖게 됨에 따라 생겨난 해프닝이 있다. 경의선 철로를 타려면 용산을 거쳐야 하기 때문에, 용산역보다 북쪽인 남대문정거장에서도 일단은 용산을 거쳤다가 북행해야 했던 것이다.
 
그러한 결과, 경부선 상행선로에서 곧장 경의선으로 접속할 수 있는 이점을 얻긴 했으나, 그 대신 서울 쪽에서 개성·평양·신의주 등지로 갈 경우 기차가 일단 용산역까지 남하하였다가 거기에서 번거롭게 기관차를 앞뒤로 바꿔달고 다시 경의선으로 빠져 북행하는 기형적인 철도 선로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용산이 식민지배 군사력의 거점으로 쓰이다 보니, 일본군국주의의 필요를 위해 그런 기형적 불편까지 감내하게 됐던 것이다. 식민지 한국이 제국주의의 필요에 따라 철저히 재편됐음을 보여주는 일례 중 하나다.
  

3일 오후 서울 남산 전망대를 찾은 시민이 용산구 이촌동과 반포 일대를 바라보고 있다. 2022.3.3 ⓒ 연합뉴스

  
용산이 가진 이합집산의 이미지는 미군과 영국군 포로들이 이곳에서 수용된 사실에서도 느낄 수 있다. 책 제2권에 따르면, 용산은 연합군포로수용소 부지로도 활용됐다. 1942년 2월 15일 일본군의 싱가폴 함락 뒤의 일이었다. 태평양전쟁 초반에 일본이 승승장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대규모 연합군 포로들이 식민지 한국에까지 오게 됐던 것이다.

"조선에도 포로수용소가 설치된 데에는 단순히 과다한 연합군 포로의 인력을 분산하려는 목적만이 아니라 여기에도 일본제국의 남다른 저의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고 책은 말한다. '남다른 저의'를 실증하는 자료를 책은 이렇게 제시한다.
 
1942년 2월 28일에 조선군참모장 다카하시 다이라(육군 소장)가 육군차관 기무라 헤이타로(육군 중장)에게 보낸 '포로수용'에 관한 전문(電文) 내용을 보면 '반도인의 영·미 숭경 관념을 일소하고 필승의 신념을 확립시키기 위해 매우 유효하므로 ······ 영·미 부로(俘虜) 각 1천 명을 조선에 수용하고 싶다'는 구절이 포함되어 있다.
 
고종 임금 때인 1880년대 이후로 조선에서는 미국에 대한 문화적 동경심이 확산됐다. 그 같은 미국 숭경 관념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서울 코앞에 미국인 포로수용소를 만들 필요가 있다는 발상이 나왔던 것이다.

조선군사령관이 도죠 히데키 육군대신에게 보낸 전문에서는 영·미 숭경 관념을 불식시키는 동시에 일본 숭경 관념을 심어주기 위해서라도 용산에 설치해야 할 필요성이 지적된다. 책에 따르면 그 전문에는 "미영인 부로를 조선 내에 수용하여 조선인에 대해 제국의 실력을 현실로 인식시키고자"한다는 의도가 언급돼 있다. 그 같은 '남다른 저의'가 반영된 것이 용산구 청파동 신광여고 자리에 세워진 조선부로수용소였다.

이처럼 용산은 식민지배 군대가 주둔한 주한일군기지였을 뿐 아니라 일본군국주의의 에너지가 이합집산을 하는 근거지였다. 제국주의의 에너지가 정적·동적으로 꿈틀대는 장소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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