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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은 소소한 탐식을 통해 일상의 고단함과 노곤함을 이겨냅니다. 고독한 방구석 연주자인 임승수 작가는 피아노 연주를 통해 얻는 소소한 깨달음과 지적 유희를 유쾌한 필치로 전달합니다.[편집자말]
인류의 기원을 수억 년 거슬러 올라가면 멀고 먼 조상이라는 원시 물고기를 만나게 되는데, 눈이 두 개 달렸다는 정도를 제외하고는 우리와 외견상 공통점을 찾기 어렵다. 피아노 역시 마찬가지여서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지금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외관의 조상이 등장한다.

피아노의 기원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유래한 '산투르'라는 악기다. 이 악기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기원전 669년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석조 조각에서 발견되었다. 단단한 틀에 고정된 줄을 채로 두들겨 연주하는 타현(打弦) 악기인데, 연주자가 목에 걸고 연주했다고 한다. 이 악기가 문명의 교류를 타고 각지로 전파되어 다양한 후손을 남겼는데, 동유럽의 침벌롬, 영미권의 덜시머, 동아시아의 양금 등이 대표적이라 하겠다.
 
산투르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기원전 669년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석조 조각에서 발견되었다.
▲ 산투르를 연주하는 고대인 산투르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기원전 669년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의 석조 조각에서 발견되었다.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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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고대 동방에서 전해진 타현악기가 중세 서방의 파이프오르간에서 사용되던 건반이라는 기계장치와 만나 탄생한 아이가 바로 14세기 초에 발명된 클라비코드다. 인류의 조상에 비유하자면 오스트랄로피테쿠스쯤 될 것 같다.

건반을 누르면 작은 쇳조각이 현을 때려 소리가 생성되는데, 건반을 누르는 힘에 변화를 주어 소리의 강약을 표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음량이 작아 연습이나 교육 용도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당대에 연주용으로 선호되던 건반악기는 작은 돌기로 현을 뜯는 구조의 하프시코드, 그리고 교회의 파이프오르간이었다.

피아노의 호모 사피엔스쯤 되는 직계 조상은 이탈리의 악기공 바르톨로메오 크리스토포리(1655-1731)가 처음으로 만들었다. 그는 건반에 연결된 해머가 현을 때려 소리를 생성하는 방식의 건반악기를 발명했는데 이것이 현대 피아노의 원형이라고 일컬어진다.

해머가 현을 때린 후 계속 현에 닿아 있으면 울림을 방해하게 되는데, 크리스토포리는 해머가 현을 때린 후 빠르게 원위치로 돌아오도록 악기를 제작했다. 이 피아노가 수많은 악기 장인들에 의해서 개량되고 발전되어 악기의 제왕이라 불리는 현대의 피아노가 된 것이다.
 
1720년에 이탈리아 악기공 바르톨로메오 크리스토포리가 제작했다.
▲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피아노 1720년에 이탈리아 악기공 바르톨로메오 크리스토포리가 제작했다.
ⓒ 위키피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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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는 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성능이 향상되고 저변이 확대되었다. 건반의 개수가 늘어 표현할 수 있는 음의 영역이 넓어졌으며, 길이 3미터에 달하는 대형 콘서트 피아노는 오케스트라의 음량을 뚫고 자신의 소리를 청중들에게 전달한다. 제작비가 적고 크기도 아담한 업라이트 피아노도 등장해 서민과 중산층이 큰 부담 없이 구입해서 직접 연주하며 음악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새로운 진화

하지만 피아노의 발전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이제 최첨단 반도체 및 인터넷 기술과의 이종교배를 통해 새로운 진화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혹시 그 흔해빠진 전자 피아노 얘기 아니냐고? 전자 피아노는 정확히 분류하자면 전자악기이지 해머가 현을 때려서 소리를 생성하는 타현악기는 아니다. 아무튼 지난 2월 24일 나와 아내, 그리고 피아노에 몹시 진심인 지인 이렇게 셋이 피아노의 진화를 선도하는 두 업체의 쇼룸을 방문했다.

첫 장소는 서초동 예술의전당 인근에 위치한 스타인웨이 갤러리 서울이었다. 세계 최고의 피아노인 스타인웨이를 무료로 체험할 수 있는데, 그날 우리의 눈길을 강렬하게 사로잡은 것은 '스피리오 r'이라는 자동연주 피아노였다. 하이엔드 어쿠스틱 피아노에만 집중하던 스타인웨이가 2014년에 자동연주 기술 보유 회사인 라이브 퍼포먼스를 인수하며 야심차게 개발한 제품이다.

연주자 없이 혼자 연주하는 피아노가 뭐 그리 새로운 게 있느냐 싶겠지만, 이전의 자동연주 피아노와 질적으로 다른 부분이 있었다. 바로 녹음, 재생, 편집 기능이었다. 피아노가 무엇을 녹음하냐고? 바로 나의 연주 행위 그 자체다.

백문이 불여일견! 직접 스피리오의 녹음과 재생 기능을 이용해 슈만의 피아노 소품 하나를 연주해보았다. 영상 전반부는 내 연주를 녹음하는 과정이고, 후반부는 녹음한 내 연주를 재생하는 장면이다.
 
▲ 스타인웨이 스피리오 r
ⓒ 임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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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패드 앱으로 녹음 기능을 활성화하면, 피아노에 장착된 센서는 내가 건반을 누르는 과정과 페달 밟는 방식 일체를 디지털 데이터로 촘촘하게 기록한다. 단순히 어떤 건반을 눌렀고 언제 페달을 밟았다는 수준이 아니다.

타건 시 해머가 움직이는 속도를 초당 800회 빈도로 측정하면서 그 속도를 1,020개의 레벨로 세분화해 기록한다. 페달의 경우도 초당 100회 빈도로 측정하며 페달 위치를 256개의 높이로 나눠 저장한다. 그야말로 연주자의 미묘한 건반 터치와 페달링이 고스란히 디지털 정보화된다.

녹음된 파일을 재생하면 피아노는 저장된 디지털 정보를 토대로 건반과 페달의 디테일한 움직임을 정확하게 구현해, 연주자 고유의 음색과 연주 스타일을 그대로 재현한다. 그뿐만 아니라 이미 저장된 타건 방식과 페달링을 앱에서 원하는 대로 편집할 수 있다. 저장된 연주를 재연주 없이 임의로 수정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 놀라운 피아노의 활용도는 무궁무진하다. 이미 랑랑이나 유자 왕 같은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들이 스타인웨이와의 협력하에 스피리오 r 피아노를 이용해 자신의 연주를 녹음하고 있다. 스피리오 r 피아노 구매자는 해당 녹음 파일에 접속해 세계적인 음악가의 연주를 집에서 라이브로 들을 수 있다.

우리 일행도 쇼룸에서 랑랑이 연주하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과 김선욱의 브람스 인터메조 Op.118-2를 자동연주로 감상했다. 그야말로 랑랑이나 김선욱이 눈앞의 피아노로 쳐주는 셈 아닌가!

피아노 연탄곡도 이제는 혼자서 연주할 수 있다. 한 사람 몫을 미리 녹음해 놓고 그걸 재생하면서 나머지 부분을 연주하면 된다. 성악가나 솔리스트는 피아노 반주자와 일정이 맞지 않는다면, 사전에 따로 반주를 녹음하고 연주회 당일에 자동연주 피아노로 재생하며 공연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 외에도 활용도가 무궁무진할 것이다. 그렇다면 가격은? 내가 연주한 211cm 길이의 B-211 모델의 경우 3억 원대다. 내 지문 따위가 묻어도 되는 걸까 싶은, 살 떨리는 가격이다. 아쉽게도 인연은 여기까지구나. 다음 생에는 꼭 다시 만나자.

카네기홀 연주를 방구석에서 듣는 일도 가능

상대적 빈곤감에 젖어 다음 방문지인 뱅뱅사거리의 야마하 뮤직 커뮤니케이션 센터로 이동했다. 야마하는 1987년도부터 디스클라비어Disklavier라는 자동연주 피아노를 출시해 지금까지 발전시켜왔는데, 플로피 디스크Disk를 저장매체로 사용하던 시절 지은 이름이 그 오랜 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야마하 디스클라비어 피아노 역시 녹음과 재생 및 편집 작업이 가능하며 해머 속도 해상도 1,024레벨에 페달링 256레벨로 스타인웨이의 스피리오 r과 사양이 대동소이했다. 게다가 오랫동안 전자 피아노도 제작한 기업답게 하프시코드, 파이프 오르간, 현악기 등의 소리로도 연주가 가능한 전자 피아노 기능 및 층간소음 걱정 없이 헤드폰을 끼고 조용하게 연주할 수 있는 사일런트 기능도 탑재되어 있다.

한참 피아노를 소개하던 관계자가 앱에 접속해 프로 음악가가 저장한 연주를 디스클라비어 피아노로 재생하는데, 이게 뭐지? 뜬금없이 바이올린과 첼로 소리가 흘러나오는 것 아닌가? 하이든의 피아노 삼중주 39번 1악장인데, 바이올린과 첼로 파트는 피아노에 장착된 스피커에서 흘러나오고 피아노 파트만 디스클라비어가 자동연주로 담당한다. 다음이 그 장면을 담은 동영상이다.
 
▲ 야마하 디스클라비어
ⓒ 임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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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하도 역시 세계적인 음악가들의 연주를 디스클라비어 자동연주로 구매자에게 제공하고 있으며, 원격 화상 레슨과 원격 오디션에 활용할 수 있는 시스템도 선도적으로 구축했다.

최대 4대의 디스클라비어 피아노를 인터넷으로 연결해 네트워크를 구성할 수 있는데, 한쪽 피아노의 연주가 다른 피아노들에서 실시간으로 재생되며 이것이 쌍방향으로 이루어져 비대면 상황에서도 높은 수준의 레슨을 받을 수 있다. 작년 1월에 서울대학교 음대와 미국 UCLA 음대가 야마하 디스클라비어를 이용해 원격으로 마스터클래스와 콘서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디스클라비어 피아노의 가격은 비슷한 사이즈의 스타인웨이 스피리오 r 제품과 비교해 5분의 1 수준으로 저렴하다. 예컨대 211cm 길이의 스타인웨이 모델은 3억 원대이지만 비슷한 사이즈의 야마하 디스클라비어 DC7X ENPRO 모델은 6천만 원대다. 가격을 통해 짐작할 수 있듯 두 회사는 지향점이 다르다. 스타인웨이가 극단적인 하이엔드 음향의 피아노에 집중한다면 야마하는 상대적으로 대중적인 피아노에 강점이 있다.

스타인웨이에서는 콘서트용 하이엔드 피아노 브랜드 장점을 살려 작년 말부터 스피리오캐스트 서비스를 출시했다. 이 서비스를 이용하면 간단한 앱 조작만으로 바다 건너 멀리 떨어진 곳(예를 들어 카네기홀)에서 이루어지는 연주를 내 집 스피리오 r 피아노를 통해 실시간으로 들을 수 있다.

예컨대 피아니스트 랑랑이 카네기홀에서 스피리오 r 피아노로 연주하면서 앱으로 방을 개설해 스피리오 r 피아노 소유자들을 초청하면, 한국에 있는 스피리오 r 피아노 소유자는 해당 방에 접속해 랑랑의 실황 연주를 자신의 스피리오 r 피아노를 통해 실시간으로 감상한다.

기술로 진화된 문화를 모두가 누릴 수 있다면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들이 압도적으로 선호하는 콘서트 피아노인 스타인웨이만의 장점이 돋보이는 서비스라고 생각된다. 물론 이런 호사는 '억억' 소리 나는 스피리오 r 피아노를 소유했을 때나 누릴 수 있지만 말이다. 야마하는 좀 싸지 않냐고? 내 형편에는 그조차 그림의 떡이다.

하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최초의 피아노 개발자인 바르톨로메오 크리스토포리는 유럽 최고의 정경유착 재벌가 메디치 가문에 고용되어 악기를 제작하고 납품했다. 초기의 피아노는 그 당시 최고 재벌이나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는 얘기다. 마찬가지 맥락에서 첨단 반도체, 전자, 인터넷 기술과 결합되며 등장한 새로운 형식의 피아노가 '억' 소리 날 수밖에 없는 것도 당연하겠다 싶다.

물론 기술의 발전으로 언젠가 중산층의 집에도 자동연주 피아노를 둘 날이 오겠지만 그때가 언제가 될지도 모르는데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다. 차라리 지방자치단체 같은 공공기관에서 자동연주 피아노를 구입해 주민 대상으로 유명 연주자의 녹음을 들려주는 정기 음악회를 개최하면 어떨까.

내가 사는 서울 금천구의 금나래아트홀에 랑랑이나 유자 왕을 초청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지만, 자동연주 피아노로 재생하는 것은 당장이라도 가능하다. 문화를 사랑하는 지역 주민들이 음악적 감동과 더불어 기술의 진보가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만드는지를 체감할 기회가 될 것 같은데, 이런 내 간절한 맘을 높으신 분들이 알아줄랑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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