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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러도 대답 없는 / 님의 모습 찾아서 / 외로이 가는 길엔
낙엽이 날립니다 / 들국화 송이송이 / 그리운 마음 /
바람은 말 없구나 / 어드메 계시온지(하략)


이분이(1928년생)는 자신의 신세를 표현한 것 같은 <여옥의 노래(1957)>를 불렀다. 한국전쟁 전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남편 채병기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이 없은 지 10년이 됐다. 이 노래를 수십 번 불러도 외로움은 가시지 않았다.

이분이는 '남편이 언젠가는 살아오겠지'라는 기대감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밤마다 대문을 활짝 열어 놓았고 바람에 낙엽 떨어지는 소리만 들려도 귀가 솔깃했다. 아침에는 남편 밥을 퍼 군용담요에 감싸 아랫목에 놓았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남편이 타지에서 굶을 것만 같았다.

아기를 품에 꼭 안은 엄마의 유골
 
경북유족회가 1960년 9월 유해발굴하는 모습
출처: 진실화해위원회
 경북유족회가 1960년 9월 유해발굴하는 모습 출처: 진실화해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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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19혁명 직후 경북유족회 조사부장이자 원호부장을 맡은 이복녕은 대구시와 경산군 곳곳의 산야를 헤매고 다녔다. 경산군 코발트광산과 대구 송현동, 상인동, 신동고개, 공산면 불로동, 가창골 등지였다. 10년 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던 재소자와 경북지역 국민보도연맹원들이 불법 학살된 흔적을 찾기 위해서였다. 이복녕의 아버지 이병옥(1912년생)도 국민보도연맹원으로 예비검속돼 경북 달성군 가창골에서 학살되었다.

그가 상인동 과수원 계곡에서 유해 발굴을 하고 있을 때였다. "아이고"하는 소리와 함께 "흑흑"하는 울음이 터졌다. 소리가 나는 곳으로 간 이복녕은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아기를 품에 안은 엄마의 유골이 있었기 때문이다.(사단법인 4·9인혁열사계승사업회, 「대구, 그 아픈 역사의 조각들」) 아기와 엄마의 살은 썩은 지 오래고, 뼈만 남아 있었지만 학살 당시 상황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복녕은 '엄마는 그렇더라도 아기가 무슨 죄가 있어서 죽임을 당했나!'라고 한탄했다. 

1960년 4.19혁명 직후 경상남북도 유족들을 중심으로 전국유족회가 결성됐다. 이들은 제4대 국회에 한국전쟁 전후 발생한 민간인 집단학살사건에 대해 진상규명, 유해 발굴, 책임자 처벌, 손해배상을 요구했다. 1960년 경북도청 사회과는 '희생자 접수'를 받았고, 이를 <매일신문>이 6월 7일 신문에 1402명의 명단을 보도했다. 이렇게 경북유족회와 제4대 국회의 조사는 유족들의 기대 속에 진행되었다. 반백 년 후인 2010년, 1기 진실화해위원회는 한국전쟁 직후 대구형무소 재소자 1438명이 두 차례에 걸쳐 군 헌병대에 인계돼 불법 처형됐다고 발표했다.

그렇다면 이분이의 남편 채병기는 어쩌다 대구형무소에 수감됐을까.
 
1949년 8월 15일, 이일재는 서부지구당에서 함께 활동해온 채병기의 안내를 받아 백기호라는 사람의 과수원을 통해 팔공산으로 들어가 경산군 조직책으로 부임했다. 몹시도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채병기는 이일재를 입산시키고 얼마 안 돼 체포, 수감 되었다가 가창골에서 학살된다
- 안재성, <이일재, 최후의 코뮤니스트>
 
1946년 10월 항쟁에 참가한 채병기(1925년생)가 이일재(1923년생)를 팔공산으로 안내하고 체포돼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상황을 언급한 대목이다. 달성군 공산초등학교 출신인 채병기는 해방 직후 아버지 채충식과 함께 경북 건국준비위원회에 참여했다. 그는 미군정의 쌀배급 정책에 반기를 든 1946년 10월 항쟁 때는 대신, 남산, 비산, 내당 등 대구의 6개 동에서 항쟁을 이끌었다.

이후 미군정의 체포령을 피해 활동을 하던 채병기는 1949년 8월 체포됐다. 아내 이분이가 1950년 여름 대구형무소에 수감된 그를 면회하러 갔는데, 형무소 측은 "진주형무소에 이감됐다"고 했다. 어렵사리 진주형무소로 갔지만, 형무소 관계자는 "부산형무소로 이감됐다"고 핑계(?)를 댔다. 그해 여름과 가을 그녀는 남편을 찾아 형무소 뺑뺑이를 도느라 진이 빠졌다. 이분이의 남편 채병기는 대체 어디에 있었을까? 대구형무소 재소자와 경북지역 보도연맹원들을 처형하는 데 동원된 한 특경대원의 진술을 살펴보자.
 
"6.25사변이 발생한 지 근 열흘이 된 어느 날 아침 갑자기 비상소집이 내렸다. 나를 포함해서 약 20명쯤이었다. 우리는 방향조차 모르고 명령하는 대로 트럭에 올랐다. 물론 실탄을 가지고. 그래서 도착한 곳이 바로 삼덕동 1번지의 붉은 벽돌담 안이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형무소 광장에는 이미 한복을 입은 약 200명의 남녀노소들이 멋대로 수염이 자란 얼굴로 얼굴을 푹 숙이고 있었고(중략) 이윽고 집행장소의 입구인 가창골 광산에 도착하여 전원을 하차시키고 열을 세우자 갑자기 여자가 통곡을 했다."(앞의 4·9인혁열사계승사업회 글)

김구와 동행해 평양 갔다 온 것이 원죄(?)
 
대구 칠곡지역 항일운동 5명.맨  좌측이 채충식.
 대구 칠곡지역 항일운동 5명.맨 좌측이 채충식.
ⓒ 민족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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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채병기의 아버지 채충식(1892년생)은 일제 하에서도 자신의 신념을 지킨 애국자이자 혁명가였다. 그는 신간회 칠곡지회 지회장겸 총무간사를 역임하고, 이후 대구지회 서기장과 전국 중앙위원을 맡았다. 그는 1919년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해방될 때까지 민족해방운동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 조선일보 왜관지국 경영을 시작으로 한 언론운동, 동창학원 설립 등의 교육운동, 이외에 문화, 구호운동 등 다양한 범위의 사회운동과 민족해방운동을 전개했다. 

채충식은 해방 직전 몽양 여운형이 비밀리에 결성한 '건국동맹'에 참여, 건국동맹 경북지부 결성을 주도했다. 일제 경찰의 감시를 받던 그는 1945년 1월에 검거됐고, 해방을 대구형무소에서 맞았다. 이후 그는 자주적인 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경북 건국준비위원회 총무간사를 맡았고 아들 채병기와 사위(딸 채정숙의 남편)도 끌어들였다.

정국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게 급변했다. 미군정 실시를 앞두고 건국준비위원회는 인민위원회로 전환됐다. 경북인민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은 그는 이후 민족혁명당과 남로당 경북도당에 간부로 참여한다.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단독선거를 앞두고 그는 통일된 조국 건설을 위해 평양행을 택한다. 백범 김구와 함께 38선을 넘어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에 참석했다.

하지만 남북한은 각각 분단된 정부를 수립한다. 백범 김구는 1949년 6월 26일 특무대장 김창룡과 고위층의 지시를 받은 안두희의 총탄에 유명을 달리했다. 채충식은 1980년 88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빨갱이'로 낙인이 찍혀 국가와 사회로부터 배척받았다. 정상적인 사회생활이 불가능했다. 아들 채병기도 대구형무소에 수감됐다 전쟁통에 학살됐다.

"저 집 아버지, 간첩으로 내려오면 신고해라"
 
증언자 채영희(채병기의 딸)
 증언자 채영희(채병기의 딸)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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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집 아버지(채병기), 간첩으로 내려오면 신고해라." 대구경찰서 사복 형사는 경북 달성군 공산면 미대동 마을 주민들에게 헛소문을 퍼뜨렸다. 채병기의 죽음을 속이고, '(채병기가) 간첩으로 내려 올 수 있다'는 거짓말이었다. 경찰의 감시는 상상을 초월했다. 경찰은 손녀 채영희(1945년생)에게 눈깔사탕을 주며 "할아버지(채충식) 어디 갔냐?"고 묻기도 했다. 

이렇다 보니 채충식 집안에서는 '채병기' 이름 자체가 금기어가 됐다. 채영희가 아버지의 이름 석자를 알게 된 것은 20세가 되어서였다. 고모 채정숙이 "네 아버지는 훌륭한 사람이었다"며 아버지 이름을 알려줬다.

채영희가 24살이던 때 시련이 닥쳤다. "물어볼 게 있으니 잠시 경찰서에 갑시다"라며 불청객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채영희를 지프차에 태우고 경북 영천으로 갔는데 그녀가 저항을 하자 지프차는 지그재그로 가다가 논에 쳐박혔다. 이 사고 이후 그녀는 육체적 고통과 함께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1980년에 할아버지 채충식이 사망하자 채영희는 '역사 바로세우기'를 시작했다. 할아버지의 독립유공자 서훈운동과 아버지의 죽음 진상규명이 그것이었다. 채영희는 2009년 출범한 '10월항쟁유족회' 회장을 맡아 13년째 그 직을 수행하고 있다. 2010년에는 진실화해위원회로부터 아버지 채병기의 진실규명결정문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할아버지 채충식은 아직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했다. 남들은 일제강점기의 법원 판결문 쪼가리 하나만 있어도 받는 서훈을 판결문과 숱한 신문 기사, 증언에도 불구하고 채충식은 아직 유공자가 아니다. 팔순을 앞둔 채영희는 대한민국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태그:#대구형무소, #유해발굴, #신간회,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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