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N 다큐멘터리 <이어령의 내가 없는 세상>의 한 장면.

tvN 다큐멘터리 <이어령의 내가 없는 세상>의 한 장면. ⓒ tvN

 
초대 문화부 장관을 역임한 고(故) 이어령 교수가 우리 사회에 전하는 마지막 강의가 공개됐다. 3월 17일 방송된 tvN 다큐멘터리 <이어령의 내가 없는 세상>은 제작진이 2019년부터 약 2년여에 걸쳐 이어령 교수와의 인터뷰를 통하여 '그가 없는 세상'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영상으로 기록한 작품이다.
 
이어령 교수는 2019년 1월 자신이 암투병 중이라는 사실은 처음으로 밝혔다. 이 교수는 항암치료를 받는 것보다 "남은 시간 동안 유언같은 책을 집필하고 싶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제작진은 조심스럽게 이 교수에게 연락하여 <내가 없는 세상>의 기획 의도를 설명하고 촬영 허락을 받아냈다.
 
이 교수는 2019년 3월 제작진과의 인터뷰를 통하여 "사람이 가장 혐오스러운게 죽음마저도 상품화하는 거다. 그래서 나는 자서전을 안 쓴다. 자기 인생을 왜 팔아. 자서전에 자기 잘못한 걸 쓰겠나?"라는 소신을 밝혔다.
 
그러면 이 교수는 시한부의 삶을 앞두고 정작 자신은 보지도 못할 프로그램을 왜 죽는 순간까지 준비하려고 했던 걸까. 이 교수는 "내가 죽음을 앞두고 글을 못 쓰게 되니까 구전으로... 제목 잘 지었다. '내가 없는 세상', 나는 그때 세상에 없겠지만, 살아있다면 아마 이런 말을 할 거다"라고 설명했다.
 
사람이 영원히 살면 괜찮다. 그런데 누구나 죽게 되어있다. 그리고 죽음을 염두에 둘때 우리의 삶은 더 농밀해진다. 이어령에게도 지금껏 살아오며 삶이 가장 농밀한 시기는 바로 마지막이 보이기 시작한 '그 순간'이었다.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난다고 할 때 나는 뭘 남기는가. 말을 남기고 가자. 사실 그 사람의 진실한 목소리가 담긴 건 말이다. 내가 없는 세상에는 글보다도 생생한 내 육성의 유언과도 같은 말을 남기자." 

내가 없는 세상을 살아갈 다음 세대에게 미래의 마중물을 마련해주고픈 생각의 기록, 그것이 그가 촬영 제안을 수락한 이유였다. 이어령은 "한국인들의 재산, 말의 재산인 사상의 알, 생각의 씨를 남기고 싶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퍼스트 펭귄 되기 위해 평생 노력"
 
 tvN 다큐멘터리 <이어령의 내가 없는 세상>의 한 장면.

tvN 다큐멘터리 <이어령의 내가 없는 세상>의 한 장면. ⓒ tvN

 
8월 16일 평창동 자택에서 본격적인 첫 번째 대화가 시작됐다. 암투병 중에도 의연함을 잃지 않은 이 교수는 "문병 온 사람들과의 대화라고 생각하라"며 편안한 분위기를 유도하면서 차와 쿠션을 챙기는 등 손주를 아끼는 할아버지같은 모습으로 제작진을 배려했다.
 
이 교수는 '퍼스트 펭귄'의 일화로 강의를 시작했다. 무리지어 몰려다니는 펭귄들 중 가장 앞서서 용기내어 물속으로 뛰어드는 첫 번째 펭귄처럼 인류 역사에도 항상 시대를 앞서가는 사람들이 있다. 디지털 문명의 선구자로 꼽히는 스티브 잡스, 온라인 유통혁명을 선도한 제프 베이조스 등은 불확실하고 위험한 상황에서 과감하게 먼저 도전하며 우리 시대를 움직인 퍼스트 펭귄으로 꼽힌다.
 
하지만 그만큼 먼저 잡아먹힐 확률도 높고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은 퍼스트 펭귄의 숙명이기도 하다. 이 교수 역시 퍼스트 펭귄 역할이 되기 위하여 평생 노력했다며 "남이 해놓은 거 따라가면 편하다. 하지만 남보다 앞서서 한국만이 아닌 세계를 앞서는 퍼스트 펭귄이 되려고 했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한국인이 지금까지 세계 문명사에서 퍼스트 펭귄이라고 할 수 있나?"라는 질문을 던졌다. 남이 만들어놓은 역사의 뒤를 쫓는 게 아니라 더 많은 퍼스트 펭귄이 필요하다는 것.
 
여기서 이 교수는 천리마를 알아볼 줄 아는 백락의 고사를 통하여, 퍼스트 펭귄 그 자체보다 퍼스트 펭귄을 만들어낼 수 있는 환경의 중요성을 언급했다. 백락은 천리마는 아니지만 명마를 알아보는 안목을 지닌 인물이다. 그렇다면 더 중요한 것은 백락인가, 천리마인가. 이를 지도자의 덕목에 비유하면 지도자는 본인이 명마(인재)는 아닐지라도 명마를 고를 줄 아는 사람, 즉 유능한 인재를 볼 줄 아는 안목이 인재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tvN 다큐멘터리 <이어령의 내가 없는 세상>의 한 장면.

tvN 다큐멘터리 <이어령의 내가 없는 세상>의 한 장면. ⓒ tvN

 
이 교수는 "우리 나라에 얼마나 많은 천리마, 아인슈타인, 세익스피어들이 백락같은 안목을 지닌 지도자가 없어서 빛을 발하지 못하고 사라졌겠냐"며 안타까워했다. 더많은 퍼스트 펭귄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인재를 알아보는 백락의 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퍼스트 펭귄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이 교수는 농반진반으로 "자신은 등떠밀려 들어간 퍼스트 펭귄"이라고 밝히며 "사람들이 '한국을 대표하는 지성'이라고 하니까 나도 모르게 퍼스트 펭귄처럼 행동하게 된다"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시한부 판정을 받으며 이 교수는 오히려 마음의 변화가 생겼음을 밝혔다. 절망하기보다는 남은 시간이 보이면서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목숨을 걸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되었다고. "남에게 떠밀렸건 우쭐해서 뛰어내렸건, 무엇이 있을지 모르는 생사의 경계선에서 앞장서서 뛰어내리는 퍼스트 펭귄의 모습은, 추락이 아니라 참 아름답다"고 밝히며 "이게 생이다. 이게 나다"라는 희열을 느꼈다고 밝혔다.
 
'막문화' 버리고 추종했던 서구식 문화, 우린 행복했나
 
 tvN 다큐멘터리 <이어령의 내가 없는 세상>의 한 장면.

tvN 다큐멘터리 <이어령의 내가 없는 세상>의 한 장면. ⓒ tvN

 
이 교수는 이른바 한국식 '막문화'에 대한 색다른 인문학적 해석을 내놓았다. '막춤', '막 산다'라는 표현처럼 언제부터인가 '막' 자가 붙으면 부정적인 의미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이 교수는 인간 본연의 자연스러움이 사회화와 문화적 프레임 속에서 자기를 상실하며 억압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한국의 관광버스 막춤, 한류스타 BTS의 어깨춤, 동서양의 줄타기 문화 차이를 언급하며, 이성적 합리주의를 강조하는 서구적 사고와 달리, 흔들리고 불안정한 인간과 인생마저도 그 자체의 자연스러움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동양적 사고관의 차이로 해석했다.
 
이 교수는 "서양의 줄타기 곡예는 필사적으로 그저 건너가는 게 목적이다. 우리의 줄타기는 그저 즐기는 게 목적이다. 우리의 막문화가 그렇다. '긴장해'가 아니라 '풀어버려' 하는 것이다"라면서 "6·25 등 험난한 근현대사를 거치면서 우리의 막문화가 여유가 없는 서양식 텐션문화, 24시간 악착같이 일하는 한국인이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회는 발전했지만 높아진 빈부격차와 자살률, 무한 경쟁속에 한국인들은 과연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지난 100여 년간 우리가 막문화를 버리고 추종했던 서구식 문화가 과연 한국인들을 행복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는지 이 교수는 의문을 제기했다.
 
이 교수는 BTS의 성공비결에 대하여 "그들이 하는 랩과 춤은 서양 것이다. 하지만 그 바탕에는 자기도 모르게 한국인들만이 가지고 있는 막문화가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 특유의 생명력과 독창성으로 재해석된 음악과 몸짓이 다시 세계로 역수출되어 선풍적인 신드롬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또한 이는 BTS만이 아니라 <기생충> <오징어게임> 등 수많은 K-콘텐츠가 메시지를 다루는 새로운 방법론으로 세계 수준에 도달한 비결이기도 하다.
 
이 교수는 "우리가 천시해오고 업신여겼던 막문화가 외국문화와 결합되어서, 오히려 외국 문화를 뛰어넘을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우리의 먼 미래에는 우리가 그동안 버려두었던 '버려둬'의 세계와 '막문화'의 세계가 우리나라에서 어떻게 새로운 미래를 만들 수 있는가"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에서 느끼는 한국인의 힘
 
 tvN 다큐멘터리 <이어령의 내가 없는 세상>의 한 장면.

tvN 다큐멘터리 <이어령의 내가 없는 세상>의 한 장면. ⓒ tvN

 
문화부 장관, 문화 기획자, 학자, 작가 등 수많은 역할을 경험한 이어령이 못해본,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역할은 패관(민간풍속을 기록하는 미관말직)같은 '이야기꾼'이었다. 그가 강조한 '막문화'처럼 남들이 가치없다고 외면한 이야기들에서 훗날 공식적인 정사보다 더 가치있고 기막힌 이야기가 나오듯, 시대의 기록을 남기고 싶다는 책임감이었다.

이 교수는 유명한 동요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에 집단지성의 힘이 숨겨져 있다고 분석했다. 동요 가사를 보면 원숭이에서 백두산까지 전혀 맥락없는 단어들로 연결되어 있다.

이는 한 사람의 머리에서 나온 것도, 어른들이나 지식인들이 만든 것도 아닌, 어린이들의 자유로운 상상력에서 비롯됐다. 누가 가르치지도, 교과서에도 나온 적이 없지만, 국민들은 '원숭이' 하면 바로 이 노래를 연상한다. 그리고 100년 후에는 또다른 집단지성이 어떤 새로운 노래를 만들어낼 수도 있다. 어쩌면 어떤 언론이나 역사책보다도 더 강한 영향력과 생존력을 지닌 한국인의 힘을 동요 하나에서 느낄 수 있다는 통찰은 신선한 접근이었다.

이 교수는 인류의 역사가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의 충돌'이라고 요약하며 그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 위한 반도 세력의 고난을 설명했다. 한반도만이 아니라 발칸반도, 크림 반도에 이르기까지 반도는 끊임없이 인류 역사의 화약고가 되어왔다.

이 교수는 "반도성을 살리는 것은 이항 대립이 아니라 삼항 순환"이라 설명하며 이를 한국 전통의 태극 문양과 아이들의 놀이인 '가위바위보'에 빗대어 각자의 약점을 물려서 좋은 쪽으로 몰아가는 '균형적 역할론'을 주장했다.
 
또한 이 교수는 이를 세대균형론에도 적용하며 젊은 세대의 역할과 중요성을 강조했다. "7080이나 4050이 2030을 이기는 날이면 대한민국은 끝난다. 2030이 대단히 잘나서가 아니다. 우리가 계속 이어가기 위해서다. 윗세대가 이기고 젊은 세대가 설 자리가 없다면 내일의 한국은 사망이 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평면의 종이를 3차원의 비행기로 만들어내는 종이비행기를 통하여 '날다'와 '뜨다'의 차이를 설명했다. 사람이 유명해졌을 때 흔히 "떴다"라는 표현을 쓴다. 하지만 뜨는 것에 그치면 바람부는 대로 흘러가야만 한다. 원하는대로 살려면 뜨는 것을 넘어서 내가 방향을 좌우할 수 있는 엔진과 날개를 갖춰야 내 의지대로 '날 수' 있다는 것.

이 교수는 종이비행기를 만들기 위하여 종이를 아홉 번 접는 것을 인생의 고비(결혼, 출산, 부모의 장례) 등에 비유하며 "삶이 내 인생의 목표 대로 날아갔다면, 태어날 땐 울었지만, 죽을 때는 미소를 남기고 가게 될 것"이라고 당부했다.
 
 tvN 다큐멘터리 <이어령의 내가 없는 세상>의 한 장면.

tvN 다큐멘터리 <이어령의 내가 없는 세상>의 한 장면. ⓒ tvN

 
2021년 마지막 촬영에서 이 교수는 코로나19로 인한 시대상이 인류에 미친 영향을 돌아봤다. "코로나19는 사람들이 일상이 주는 행복이 그립고 소중하다는 것을 느끼는 시간이 됐다. 동시에 디지털이 없었으면 배달 하나도 시켜 먹을 수 없는 절해고도에서 살 뻔 했다 하는 '접속'의 고마움도 느끼게 됐다"며 "위기를 기회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 저의 결론"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내가 만든 말 중에는 후세의 어린아이들도 부를 수 있는 중요한 키워드가 되는 낱말이 될 수 있는 유산을 남겨놓고 간다. 그 때문에 여러분이 '잘 가'라고 손을 흔들 때, 미소를 지으며 '잘 있어, 너희들은 틀림없이 잘 있을 거야'라고 떠날 수 있는 것"이라며 담담하고 밝게 세상을 향한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그리고 지난 2022년 2월 26일, 마지막 2500여 분의 유산과도 같은 기록을 남기고, '시대의 지성'은 조용히 우리 곁을 떠났다. 마지막 순간까지 '내가 없는 세상'을 통찰하고 격려하는 지성의 따뜻한 가르침은 시청자들에게 깊은 울림을 남겼다.
내가없는세상 이어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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