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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성군 보도연맹원들이 학살된 여시개.
 의성군 보도연맹원들이 학살된 여시개.
ⓒ 진실화해위원회
 

"행님요. 울 남편 면회 좀 갔다 와 주이소." 동서 손조이의 부탁을 받은 김신생은 "쯧쯧" 하며 혀를 찼다. 출산을 앞두고 쉬이 피곤해하는 동서인데다가 남편까지 지서에 끌려가는 일까지 생겼으니 맘이 짠했다. 김신생은 6.25 전쟁이 나기 전에도 경북 의성군 금성지서에 3~4번 시동생 면회를 갔었다. 이번에도 그녀는 경찰에게 줄 담배 한 보루를 들고 지서로 향했다.

"쩌그요. 구연리 사는 박진씨 면회 왔심더." "안 돼요!!" 지서 정문에서 보초를 서는 순경은 단호하게 말했다. "글카지 말고 면회 좀 한 번 시켜주씨요." "안 된다 카이!" 눈을 부릅 뜬 순경에게 기가 죽은 김신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발걸음을 돌렸다. '이상타! 지난 번에는 면회를 잘도 시켜주등만 이번에는 왜 안 된다카이'

앞서 박진(1928년생)은 금성지서에 몇 차례 연행되었다. 그때마다 담배 한 보루를 들고 지서에 가면 지서장은 담배를 받고, 일장훈계를 하고 박진을 풀어줬다. 그렇기에 한국전쟁이 일어나고 1950년 7월 중순 박진이 지서에 끌려갔을 때도 집에서는 별달리 걱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면회조차 안 시켜주니 김신생은 의아할 따름이었다.

얼마 후 박진은 금성지서에 같이 구금됐던 이들과 함께 GMC 트럭에 실려 야산으로 이송됐다. 잠시 후 총성이 들리고 이들을 태웠던 GMC 트럭은 빈 차로 의성경찰서로 되돌아왔다. 박진이 처형된 곳은 의성읍 중리 여시개나 함티재로 추정된다.

18세 소년이 6.25 발생 5일 만에 끌려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경북 의성군에서는 말도 안 되는 죽음이 비일비재했다. 의성군 다인면 평림리 정규명(18세)은 2.7사건에 연루되어 인천소년형무소에 6개월 수감된 적이 있다. '2.7사건'은 1948년 5월로 예정된 대한민국 제헌국회 선거를 앞두고 남조선노동당이 벌인 단독선거 반대 투쟁이다. 그는 1950년 6월 30일 의성경찰서에 예비검속되어 7월 1일 총살되었다.

의성군 다인면 삼분리 박승만(31세)은 6.25 전 마을 사람에게 동원돼 이웃 9명과 함께 전선을 자른 일로 안동지검에 연행, 재판을 받았지만 무혐의로 풀려났다. 하지만 박씨는 1950년 7월 23일 밤에 다인지서 경찰에게 연행되어, 다음날 다인면 신락리에서 총살당했다.

의성군 의성읍 도서리 김명규(31세)는 보도연맹에 가입한 친구에게 돈을 빌려준 것이 이유가 되어, 1950년 7월 10일에 의성경찰서에 연행됐다. 뒷집 살던 트럭 운전수 김태일은 "6.25 후 경찰에 동원되어 유치장에 있던 이들을 트럭에 싣고 의성경찰서에서 점곡면 가는 길의 도중에 내려 주고 왔는데, 거기에 김명규도 있었다"고 증언했다.(진실화해위원회, 『2009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한국전쟁 직후인 1950년 7월 말부터 8월 초까지 의성군 다인면 신락리 피밭재, 비안면 짝두골, 의성읍 중리3리 여시개, 함골 등에서 의성경찰서 경찰에게 총살당한 이들은 의성군 보도연맹원과 예비검속자였다.

애초에 '대한민국에 충성을 서약하면 (북한과 공산당으로부터)보호해준다'는 취지를 갖고 출범한 국민보도연맹은 경북과 의성군에도 그 깃발을 올렸다. 1949년 11월 1일 경북보도연맹이 결성된 후 1950년 2월 3일 의성 중부국민학교에서 수백 명이 참석, 국민보도연맹 의성군지부를 결성했다.

하지만 6.25가 발발하자 '대한국민 국민으로 보호해 주겠다'던 약속은 휴지조각이 되어 버렸다. 상부기관의 지시를 받은 의성경찰서는 유치장에 구금된 보도연맹원들을 후퇴 직전 한티재와 여시개 등지에서 총살했다. 학살 현장에는 유치장 간수와 경비병, 그리고 CIC 대원이 있었다.

아버지 죽은 지 100일만에 태어난 딸

전쟁통에 숨진 박진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그의 부모 박노봉·구운해는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일본으로 이주했다. 5남매의 막내였던 박진은 중학교에 진급했을 때 일본 학급 반에서 1등을 했다. 그의 부모는 입이 귀에 걸렸다.

해방된 지 1년 만인 1946년에 귀국한 박진은 부모와 함께 농사를 지었다. 하지만 '경성대학교(서울대학교)에 가겠다'는 포부가 있었던 그는 주경야독했다. 1948년에 결혼한 후에도 그는 공부와 농사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 사랑방에서 이장 신필우(가명)가 어떤 명부에 이름과 도장을 찍었는데, 제일 위에 박진의 이름이 있었다.

그 명부가 '남로당 가입서'인지 '국민보도연맹 가입서'인지는 불분명하지만 후일 살생부가 된 것은 분명하다. 명부를 작성한 신필우는 6.25가 나자마자 부산으로 줄행랑을 쳤다. 보도연맹원의 최후를 예감한 것이다. 

전쟁이 터지자 마을 사람들은 피난길에 나섰다. 하지만 박노봉 가족은 집을 지켰다. 막내 박진이 살아 돌아온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부인 손조이의 배가 불렀을 때 집에서 나갔기에, 아기가 태어난 것을 알고 있을 박진이 반드시 귀가하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고 박진이 죽은 지 100일 만에 그의 딸이 태어났다. 

박진이 살아있다는 희망 때문에 가족들은 1960년 4.19혁명 후 제4대 국회에서 '양민학살 피해자 신고'를 받을 때도 신청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꿈은 전쟁 발발한 지 72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진실을 알고 싶은 95세 할머니
 
증언자 박종경(박진의 딸)
 증언자 박종경(박진의 딸)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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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손조이(1928년생)는 대구로 이사했다. 그녀는 대구 대명동으로 이사하면서 "40세까지만 일할란다"고 결심했다. 그때까지 죽어라 일하고, 그때까지 번 돈으로 여생을 살겠다고 생각했다.

"신흥댁요. 일 좀 고마 살살 하이소." 친정이 경북 의성군 춘산면 신흥동이었던 손조이의 택호는 '신흥댁'이었다. 신흥댁 손조이는 아침부터 저녁 때까지 밭에서 돌을 골라내고 산에서 쑥과 나물을 캤다. 다음날 식전에 보따리를 이고 대구 남문시장으로 향했다. 30리(12km)를 걸어 배추, 파, 열무 등을 팔았다.

한편 박진의 딸 박종경(1950년생)은 어릴 때부터 병치레를 자주 했고 장티프스에 걸리는 등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박종경은 어릴 때부터 엄마를 도와 가사노동과 농사일을 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솥에 불을 때 밥을 했다. 종경은 모내기나 벼베기가 있는 날에는 20명의 일꾼 식사를 혼자서 준비했다. 오전 새참, 점심, 오후 새참 3끼를 준비해야 했다. 그녀가 겨우 중학교 다닐 때였다.

그런 와중에도 그녀는 신명여중, 상서여고를 나와 영남대 식품영양학과를 졸업했다. 박종경은 대학 입학 때까진 고생을 많이 했지만, 대학교 이후부터는 어머니 때문에 어렵지 않게 생활했다. 아버지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종경이를 잘 키우겠다'는 신념 하나로 몸이 부서져라 일한 엄마 덕분이었다.

손조이는 비록 시집와서 뒤늦게 조카들에게 구구단을 배웠지만, 생활 속 셈법 계산은 빨랐다. 계를 해 돈을 불리고, 불린 돈으로 땅을 샀다. 그녀의 결심대로 손조이는 40세까지만 일하고, 그때까지 번 돈으로 여생을 보내고 있다.

박종경은 2009년 '10월항쟁 유족회'에 첫발을 들인 이후부터 유족회 활동에 열심이다. 2022년 현재 유족회 총무 일을 보고 있다. 할머니가 6.25 직후에 아버지를 찾으러 거제도 포로수용소까지 다녀온 일을 그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박종경, 결혼한 지 2년 만에 남편과 생이별을 한 손조이(95세)가 박진의 억울한 죽음을 진실규명 받는 날은 언제일까? 90, 70대 두 여성의 삶을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태그:#국민보도연맹, #한국전쟁, #민간인학살, #의성군, #10월항쟁유족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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