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3.22 20:33최종 업데이트 22.03.22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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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1월 8일 고 배춘희 할머니를 비롯한 12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진행된 위안부 손해배상소송에서 1인당 1억 원씩의 배상 판결을 받아냈다. 당황한 일본 외무성은 그날 바로 남관표 주일한국대사를 초치해 항의의 뜻을 표시했다.

이 판결은 일본 정부가 항소하지 않아 그대로 확정됐다. 무시하겠다는 의지를 표시한 것이다. 이로 인해 강제집행 단계로 넘어온 이 사건은 일본 정부의 국내 재산을 찾아내 현금화하는 단계를 밟고 있다.


이 단계에 해당하는 재산명시기일 절차가 월요일인 21일로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이날 절차는 무산됐다. 일본 정부가 우리 법원의 결정문을 수령하지 않은 결과다. 일본 정부가 빈 집도 아닌데 법원 결정문이 송달되지 않았던 것이다.

승소가 확정됐기 때문에, 원고들이 포기하지 않는 한 배상금 수령은 시간문제다. 일본 정부의 재산이 국내에 한둘이 아니다. 우리 사회가 이 재산을 찾아내는 일을 응원한다면 좀더 수월하게 끝날 수 있는 일이다.

그렇지만 국교를 맺은 이웃나라의 재산과 관련된 일이기 때문에, 가급적이면 외교적 충격을 최소화하는 방법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자면 양국 행정부의 접촉도 불가피하다. 삼권분립을 훼손하지 않는 선에서 그런 노력이 부득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사건과 관련해서는 5월 10일 출범할 윤석열 정부의 노력이 요구된다. 2027년에 출범할 차차기 정부에 떠넘길 일이 아니라면, 윤석열 정부가 책임 있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윤석열 정부가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통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갖고 있는지가 이를 통해 명확히 드러나게 된다. 할머니들의 한을 풀어줄 것인지, 일본 정부를 우선시할 것인지가 증명된다. 

웃음기 사라진, 오락부장 배춘희
 

경기도 광주시 일본군위안부역사관에서 찍은 고 배춘희 할머니. ⓒ 김종성

 
이번 사건의 원고인 배춘희 할머니는 3·1운동 4년 뒤인 1923년 경북 성주에서 태어났다. 19세 때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조선여자근로정신대를 모집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돈을 벌 생각에 친구와 함께 자원했다.

하지만 그가 가게 된 곳은 근로정신대가 가는 강제징용 현장이 아니었다. 위안부가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채로 중국 만주로 이끌려가서 일본군 성노예 피해를 당했다.

1993년에 일본 정부가 공식 발표한 고노담화에 "위안부의 모집에 관해서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이를 맡았으나 그런 경우에도 감언, 강압에 의하는 등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모집된 사례가 많았으며"라는 대목이 있다.

돈을 벌 목적으로 근로정신대에 들어가겠다고 하는 여성을 위안부로 전락시킨 것은 '본인의 의사에 반한 모집'에 해당한다.

그가 위안소가 아닌 근로정신대로 끌려갔어도 노예 생활을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정신대의 실체를 몰랐고 자신이 정신대에 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해서 그는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의 일본군 군영에서 성노예 생활을 하게 됐다.

그의 수난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해방 뒤에도 곧바로 귀국하지 못해 객지인 중국을 여기저기 전전했다. 그러다가 1951년, 드디어 중국을 떠나게 됐다. 그렇지만 그가 가게 된 곳은 고향이 아닌 일본이었다. 한국전쟁 중인 그해에 일본으로 건너가 1981년 무렵까지 묶여 있었다.

그는 밝고 명랑했다. 항상 남을 웃기고 즐겁게 해주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위안부로 끌려간 뒤에 약 40년 동안 중국과 일본을 전전하면서도 에너지를 잃지 않을 수 있었던 동력은 거기에 있다고 생각된다.

고국으로 돌아온 뒤인 1990년대에 그는 경기도 광주시 나눔의집 할머니들과 연대했다. 그들과 함께 위안부들의 한을 풀기 위한 싸움에 가담했다. 그러던 중에 생긴 일이 1995년 7월 18일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 국민기금' 발족이다.

아시아여성기금으로 약칭되는 이 단체는 민간 기금을 모아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위로금을 지급하는 임무를 띠었다. '일본 국가'가 아닌 '민간'이, '배상금'이 아닌 '위로금'을 주고 이 문제를 무마하려는 일본 정부의 의중이 담긴 단체였다.

일본 정부의 그 같은 처사는 배춘희 할머니를 격분시켰다. 그런 식으로 위안부들의 입을 틀어막고 투쟁을 약화시키려는 것에 그는 분개했다. 생활고에 찌들려 위로금에 손길이 가는 동료들을 보면서 일본 정부에 대한 그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그 분노가 1997년 9월 6일자 <한겨레> 기사인 '내 평생 흘린 피눈물이 얼만데'에 소개됐다. 이 기사는 "할머니들의 보금자리인 경기도 광주군 나눔의집은 요즘 분노와 시름이 교차한다"며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국가배상을 요구하며 일본대사관 앞에서 매주 수요집회를 가져온 게 벌써 6년째"라고 한 뒤, 1997년 초에 피해자 7명이 아시아여성기금 위로금을 수령한 일로 인한 배춘희 할머니의 허탈함을 이렇게 묘사했다.
 
"노래와 유머로 늘 주위를 웃기는 오락부장 배춘희(74) 할머니의 입가에도 한동안 웃음이 사라졌다."
 
1997년 8월 8일자 <경향신문> 18면에도 "오락부장으로 스타 의식이 강한 배춘희 할머니"라는 표현이 있다. 그렇게 밝고 명랑했던 그 역시 동료들이 위로금을 받는 모습을 보면서 허탈해 했다. 그는 보다 많은 동료들과 힘을 합쳐 계속 싸우고 싶었던 것이다. 
 

고 배춘희 할머니. 일본군위안부역사관에서 찍은 사진. ⓒ 김종성

  
위 <한겨레>는 배춘희 할머니와 함께했던 김복동 할머니의 분노도 전했다. "결국 사죄하기 싫으니까 돈 몇 푼 받고 떨어지란 얘기 아니여"라며 피해자 김복동의 목소리가 커졌다고 보도한다. 또 당시 84세인 이옥금 할머니는 "오래 살다 보니 꼬박 50년 만에 화대를 받게 생겼다"며 힘없이 손을 내저었다고 보도한다.

화대가 아니라 배상금을

아시아여성기금이 주는 돈이건 2015년 한·일 위안부합의에 따라 화해치유재단이 주는 돈이건, 그런 돈들은 가해자가 죄송하다면서 주는 배상금이 아니다. 당사자가 아닌 제3자가 힘내라며 주는 위로금이다.

위로금은 돈을 주는 사람의 시혜의 결과물이다. 줘도 되고 안 줘도 되는 돈이다. 이옥금 할머니가 아시아여성기금 위로금을 '화대'라고 폄하한 데는 그런 이유도 있다고 볼 수 있다.

할머니들의 요구 사항은 위안부 활동에 대한 대가를 달라는 게 아니다. 자신들을 노예로 부린 것에 대해 사과하고 배상하라는 것이다. 그런 할머니들에게 배상금이 아닌 위로금을 주겠다고 했으니 이옥금 할머니가 화대 운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한국 정치권에는 '일본 국가의 사과 및 배상' 대신 적당한 방식으로 문제를 봉합하려 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무엇이 진정한 한일관계의 복원인지도 생각하지 않고, 맹목적인 한일관계 회복만 외치면서 문제의 봉합을 시도한다. 일본 정부가 희망하는 해결 방식도 대동소이하다.

그런 시도들의 공통된 본질은 이옥금 할머니의 한마디에 담겨 있다. 그 같은 시도들은 죽기 전에 일본의 사과를 꼭 받겠다며 버텨온 위안부 피해자들을 욕되게 하는 일이다. 일본의 사과를 끝내 받지 못하고 2014년 6월 별세한 배춘희 할머니의 정신을 모욕하는 일이다.

배춘희 할머니를 포함한 피해자 12인의 소송이 승소로 확정됐기 때문에, 이 사건은 가해자가 사죄하고 배상하거나 아니면 가해자의 재산을 강제집행하는 선에 종결돼야 마땅하다.

이 절차가 외부적 개입 없이 무사히 마쳐지려면, 우리 국민들뿐 아니라 윤석열 정부 역시 외부의 부당한 간섭을 차단해주는 노력을 해야 한다. 배춘희 할머니를 비롯한 피해자들에게 화대가 아닌 배상금이 지급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윤석열 정부의 소임이라는 당연한 이치를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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