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3.24 19:28최종 업데이트 22.03.24 19:28
  • 본문듣기
사회문화비평연재 <좋은데, 싫었습니다>(좋싫)는 주류의 담론에 대항하는 저항의 언어조차 어쩌면 '당위'라는 함정에 빠진 것은 아닌지 질문합니다. 그저 이것'만'이 옳고, 이것은 '반드시' 좋아해야 하고, 그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대해야 한다는 절대적이고 당위적인 언어들이 정말로 대안과 저항의 언어가 될 수 있는지 묻습니다.[편집자말]
"왜 내 인생은 늘 이 모양일까?"

모처럼 만나 술을 마신 친구는 자기의 삶이 언제나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했다. 이십 대 무렵이었다면, '또 어디 가서 차였군'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결혼해서 아이까지 있는 친구가(결혼했다고 새로운 사랑이 찾아오지 않는 것은 아니겠다만) 연애 문제로 인생을 운운할 것 같지는 않았다.


친구는 작년 가을께 경기 하남에 아파트를 샀다. 그동안 모아놓은 돈에 양가 어른들께도 손을 조금 벌리고, "대출도 풀로 땡겨서" 9억 원이 조금 넘는 집을 샀다고 했다. 그야말로 영혼을 끌어모아 산 집이다.

작년 여름, 두 명 이상만 모이면 모두 집값을 얘기했다. 어느 지역이 앞으로 얼마나 더 오를 것인지, 몇 년 전에 누가 산 아파트는 지금 가격이 얼마나 뛰었는지, 지금 자기는 어느 동네를 보고 있는데 대출이 어려울 것 같다든지 하는.

천정부지로 오르는 집 값. 내 집 마련이 평생의 꿈인 한국의 월급쟁이들에게 영원히 오르기만 하고 내려올 것 같지 않은 집값은 분노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선망의 대상이었다. 집값이 올라 서민들의 거주가 불안해지고 내가 가진 금융자산의 가치가 상대적으로 저하되는 것은 사회적으로 문제이겠지만, '내 집값'이 올라가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무슨, 내 집을 가진 사람들에게 집값의 상승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고 행복한 일이다. '내 집'을 만들면 오르기만 할 뿐 떨어지지 않는 집 값이 재산을 불려줄 것이라는 믿음은 결국 영혼을 끌어모으게 만들었다.

친구가 영혼을 끌어모아 산 하남의 아파트는 올해 연초부터 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직까지 큰 폭의 하락은 아니지만, 껑충껑충 뛰는 집값을 기대했던 그에게는 소폭의 하락도 청천벽력 같았을 테다. '그러게 감당도 못할 아파트를 사서 어쩌려고 했냐, 지금이라도 얼른 팔아라'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참았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나 격려였겠지. 하지만 도무지 무슨 말로 위로해 줄 수 있을지 몰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친구는 금세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남은 좀 멀어" 라면서.

포섭된 욕망

집을 갖고 싶다는 욕망이 한국 사회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자명하다. 임금소득만으로 충분히 쾌적한 삶의 수준을 영위하기는 도무지 어렵기 때문이다. '집을 갖고 싶다'는 욕망은 재산을 증식하여 안락한 삶을 영위하고 싶다는 욕망의 한국적 표상인 셈이다. 그렇다면 재산을 증식하여 안락한 삶을 영위하고 싶다는 욕망은 무엇일까. 그것은 공적 기능을 상실한 채 모든 것들이 자본과 상품에 의해 통제되는 사회에서 개인이 자기를 지킬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인 '재산'에 대한 욕망이다.

누군가 무엇에 대한 욕망은 결국 '결핍'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런 식이면 (다소 거칠게 이야기해서) 집이 없기 때문에 집을 욕망하고, 재산이 없기 때문에 재산을 욕망한다는 식으로만 개인의 욕망을 해석할 수밖에 없다. 결핍을 초래한 혹은 추동한 사회·문화적 맥락은 거세된다.

재산 증식이 상속 아니면 부동산을 통한 일확천금뿐인 사회에서 집을 갖고 싶다는 것이 욕망의 주체로서의 '나'의 욕망일까? 부가 아니면 사회의 그 무엇도 개인을 지켜주지 않는, 지켜주긴커녕 위해를 가하는 사회에서 부를 쌓고 싶다는 욕망은 나의 욕망일까?

사실 작금 우리가 호명하는 '욕망'이라는 것은 사회와 문화가 포획한 것들이나 다름없다. 맥락이 배제된 채 그저 결핍에 주의하여 착각하듯 지니게 되는 욕망. 이는 '나의 욕망'이라기보다는 제도화된, 사회화된 욕망이 나를 통해 구현되고 있는 것에 가깝다. 나는 욕망하는 주체로서가 아니라 그저 욕망을 실현하는 도구로 존재하게 되는 것.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 전망대 '서울스카이'에서 바라본 주변 아파트 단지. ⓒ 연합뉴스

 
온갖 미디어는 재테크와 투자를 통해 재산을 증식하는 것이 시대의 도덕인 것처럼 강변한다. 그것이 불확실성에 기반한 도박에 가깝든(주식처럼), 사회 전반의 규칙을 흔들고 누군가에겐 피해가 미치는 일이든(투기처럼), 돈을 많이 버는 것, 지금 이 사회는 안온하지 않으니 돈을 많이 버는 것이 선이라고, 그러려면 집을 사라고, 집을 사는 것만이 네가 지금 바라는 것이라고.

이것은 내가 바라는 것일까 아니면 이 사회가 (그러니까 철저하리만치 자본화 된 사회가) 바라는 것일까.

내 친구는 정말 '집'을 갖고 싶었을까(직장이 있는 상암동에서 지하철만 1시간 40분을 타야 하는 하남의 아파트를), 아니면 그는 '재산'이 늘어나길 바랐을까. 그럼 재산은 왜 늘리고 싶었을까. 그 욕망은 무엇에서 파생했을까. 이 모든 맥락과 개연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건 이런 질문이기도 하다.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그물 밖에 있는 욕망

친구와 술을 마시고 일어나는 길, 계산은 내가 했다. 9억 원짜리 아파트를 갖고 있으면서 술까지 얻어마시냐고 따져봤지만, 친구가 "난 하우스 푸어"라고 주장하는 통에 별 수 없이 계산했다. 그는 이제 술을 마셔도 택시를 타지 않고, 술값이나 밥값을 최대한 아끼고, 간간이 즐기던 취미 생활도(그의 취미 생활은 엘지 트윈스의 굿즈와 최애 선수의 마킹 유니폼을 사모으는 것이었다) 잘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덕분에 더 검소해졌으니 어떤 면에선 다행"이라고 말했다.

검소함이 미덕이라는 것, 어떤 종류의 욕망을 거세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선이고 덕이라는 가르침은 고래로부터 내려온 관념이다(가톨릭의 7가지 죄악에는 탐욕, 색욕, 식탐이 들어간다. 일곱 죄악 중 하나인 질투 역시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소유욕이니 이 또한 욕망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욕망을 제어하여 참는 것을 미덕이라고 가르친 것인데 이는 포섭된 욕망, 즉 권장하여 이룩하는 것이 덕(德)인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견디고 제거해야 하는 욕망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집을 사 재산을 증식하고 싶다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술을 마시고 싶다는 욕망을 참는 것. 그러니까 어떤 욕망(재산을 불리는 것)은 선한 것이어서 강변되고 어떤 욕망은 그 선한 욕망을 실현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에 죄악으로 치부되는 것이다. 결국 여기에 욕망을 갖고 실현하는 주체로서의 '나'는 없다.
  
그것은 아마 당신의 영혼이 아닐 것 같아요

들뢰즈는 욕망이란 인칭이나 사물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편력하는 환경 전체를 대상으로 한다고 말했다. 욕망이란 어떤 것을 갖고 싶다거나 어떤 것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 다시 말해 사회적 맥락이나 고유한 특질과 본성, 타자와 관계맺음으로 발생하는 것임을 인식해야 한다는 의미다.

집을 사고 싶다는 욕망, 재산을 증식하고 싶다는 욕망은 그 자체로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이 같은 정체 모를 바람은 결국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한다. 그저 욕망하는 것처럼 '착각'하는 이 상황이 계속해서 이어질 뿐이다.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얻어내지 못한 채 변화하지 않는 움직임과 에너지를 욕망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주체로서의 '나'는 사라지고 이 사회의 욕망을 실현시키는 도구로 활용될 뿐이다.

생산하지 못하는 욕망을 욕망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결국 보면, 하남의 아파트값은 떨어졌고, 출퇴근은 왕복 4시간이 걸리게 되었고, 엘지 트윈스는 굿즈를 사주는 팬을 잃었다. 남은 것은 부채와 그 부채를 먹이 삼아 증식하는 이 자본주의 사회의 영속성뿐이다.

친구는 아파트를 사면서 '영혼을 끌어모았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내 것이 아닌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끌어모은 영혼은 누구의 것일까. 아마 나의 것은 아니겠지. 우리는 서로의 영혼을 볼모 삼아 내 것 아닌 것의 욕망을 대리해주는 것으로 다른 무엇, 우리의 더 나은 삶을 구성하는 것과는 별반 상관없는 것을 위해 복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삶을 구성하고 기획하는 욕망을 찾아내는 일이다. 내가 지금 바라 마지않는 것이 과연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는지를 끊임없이 찾아가는 과정이다. 다시 질문, 영혼을 끌어모아서까지 갖고 싶은, 네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