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4.09 20:01최종 업데이트 22.04.09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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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친일 영화가 있었다. 일제강점기 최초의 친일 영화로 평가되는 서광제 연출의 <군용열차>가 그것이다. 1938년 6월 29일 경성 약초극장에서 개봉된 이 영화의 '스포일러'가 7월 2일 자 <조선일보> 기사 '7월 제1주 영화'에 등장했다. 기사 작성자는 영화감독 이규환이다.

"인제는 꼼작할 수 업시 더워지고 마럿다"로 시작하는 이 기사는 등에 땀이 나서 외출하기도 힘들다고 한 뒤, "그래도 조흔 영화가 어디 있다면 차저 가지 않고는 도회인의 생활, 아니 이 습관 때문에 가령 한 주일이 간 뒤거나 더 나아가 새달이 될 때마다 이달엔 좀더 조흔 영화 프로가 잇섯스면 하는 기대를 가지게 된다"라고 말한다.

'좋은 영화' <군용열차>
 

본문에 인용된 1938년 7월 2일 자 <조선일보> 기사 '7월 제1주 영화' ⓒ 조선일보

  
그런 뒤 '좋은 영화'로 성봉영화원과 일본 도호(東寶) 영화사가 합작한 <군용열차>를 추천한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로 일본의 대외침략이 활발하던 시점에 개봉된 이 영화에는 네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군용열차 기관사인 점용, 기관사 조수인 최철, 점용의 동생이자 기생인 영심, 금속노동자인 원진이 그 넷이다. 영심을 연기한 인물은 친일 배우인 문예봉(1917~1999)이었다.

원진은 영심을 사랑한다. 하지만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다. 원진은 자신이 돈이 없기 때문에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그를 파국으로 몰고 간다. 위 기사는 이렇게 설명한다.
 
기생으로 있는 영심이는 이천 원 때문에 마음에 업는 결혼을 강요당하고 잇다. 이 사정을 아른 원진이는 아무리 생각을 한댓자 이천 원을 변통할 길이 업다. 이러던 중 스파이로 다니는 사람에게 잘못 걸려 점용이게서 군용열차 출발의 시간을 몰래 알어내이여서 밀고해주면 이천 원을 당장 내준다는 것이다.
 
돈만 있으면 영심과 함께할 수 있다는 생각에 빠져 있는 원진에게 스파이가 접근했다. 군용열차 폭파를 목적으로 열차 출발 시각을 알아내려 했던 것이다. 원진과 점용이 친구인 것을 알고 다가갔던 것이다. 일본군국주의가 이 영화를 통해 의도했던 것이 위 인용문의 바로 뒷부분에 등장한다.
 
이천 원! 애인! 드디어 원진이는 양심을 소겨 이 무서운 계획에 참가하지만, 드디어 양심의 가책을 바더 군용열차를 운전해가는 점용의 차 바퀴에 뛰여드러 자살하고 마럿다.
 
전쟁 수행에 필요한 군용열차 파괴 공작에 가담했던 식민지 한국인이 스스로 깨닫고 열차 대신 자기 생명을 파괴하는 것으로 이 영화는 결말을 맺는다. 잠깐이나마 "양심을 소겨" 대일본제국을 배신했던 식민지 한국인이 "양심의 가책을 바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이 영화는, 일본이 수행하는 중일전쟁에 대해 한국인들이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지를 은연중에 시사했다.

도호영화사와 합작해 이런 친일 영화를 만든 제작자를 국회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그냥 놔둘 리 없었다. 친일파 이광수가 석방된 1949년 3월 4일, 반민특위는 이 영화 제작자를 붙잡기 위해 출동했다. 3월 5일 자 <경향신문> 4면 하단 기사는 "반민특위에서는 4일 오후 2시 반 세종로 태평로공업회사 전무실에서 홍찬을 체포하였다"라고 보도했다. 홍찬이 바로 그 제작자였다.
 

1964년 2월 3일 자 <경향신문> 홍찬의 부고 기사 ⓒ 경향신문

  
홍찬은 단지 <군용열차> 제작 때문에만 체포된 것은 아니었다. 그를 붙잡아 들일 사유는 비교적 충분했다. 그의 영화 인생이 그의 유죄를 증거한다.

일제의 영화 통제에 앞장서

국권 침탈 2년 전인 1908년 11월 1일 한성부에서 출생한 홍찬은 1920년대 후반부터 영화계에서 활동했다. 영화를 제작하거나 영화 작업을 진행했다. 월간지 주간도 했고 음반사 영업부장도 했다.


그러다가 동인(同人)제 형식으로 참여한 데가 성봉영화원이다. 위에 언급된 서광제·이규환, 친일 배우 문예봉, 점용이를 연기한 배우 왕평 등이 이 영화사에 동인으로 참여했다. <군용열차>를 제작한 이 영화사는 이듬해에 조선영화사에 매각됐다. 홍찬이 동인들 몰래 회사를 팔아버린 결과였다. 이 일로 인해 문예봉이 영화계 은퇴를 선언하는 소동까지 있었다.

그런 뒤에 홍찬이 참여한 일이 일제의 영화통제 작업이다. 모든 영화사들을 조선총독부 하의 단일 기업으로 통합하는 작업이었다. 그 결과로 탄생한 회사가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였다. 홍찬은 이 회사 진행주임으로 활약했다. 반민특위가 그를 체포할 만한 사유는 충분했다.

반민특위에 끌려갔지만 그는 죗값을 치르지 않았다. 한 달 보름 만에 옥문을 열고 나왔다. 1949년 4월 20일 자 <조선일보> 우하단 기사는 "홍찬은 지난 18일 특검 전체회의의 결의에 의하여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라고 보도했다.

친일파에게 우선권 준 일본인 재산

일본제국주의의 몰락은 홍찬에게 타격을 주지 못했다. 반민특위에 잠시 붙들려 있었을 뿐, 지위나 재산에는 별 영향이 없었다. 친일파라는 사실이 오히려 해방 이후의 치부에 도움이 됐을 따름이다.

전 <한겨레> 회장인 송건호의 <한국 민족주의의 탐구>에도 언급됐듯이, 해방 당시 한국 총자산의 약 80%, 산업자본의 98%가 일본인 소유였다. 해방 뒤에 국민의 재산이 됐어야 할 이 재산들은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 의해 소수 사람들에게 불하됐다. 적산(敵産) 혹은 귀속재산으로 불린 이 재산들은 15년 할부로 시가의 10분의 1에 거래됐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해방 이전의 연고를 기준으로 귀속재산을 불하했다. 일본인 재산이나 기업과 연고가 있었던 사람들에게 우선권을 줬다. 그러다 보니 친일파들이 취득하는 일이 많았다. 이는 그들이 해방 뒤에도 막강한 힘을 갖게 되는 원동력 중 하나가 됐다. 한국 현대사를 뒤틀리게 만든 원인이기도 했다.

홍찬 역시 그런 방식으로 치부했다. 친일 재산을 사수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도리어 불려나갔다. 그는 연고권을 바탕으로 일본인 극장을 인수했다. 약초극장이 바로 그것이다. <군용열차>가 개봉됐던 바로 그 극장이다. 1948년 1월 29일 자 <경향신문> '적산 사업장, 시(市)에서 불하'에도 언급됐듯이 이 극장은 수도극장으로 개칭됐다.

수도극장은 훗날의 스카라극장이다. 1962년 8월 5일 자 <동아일보> 4면 좌중단 기사는 "수리 중에 있던 수도극장은 스카라로 이름을 갈고 오는 9월 초순 외국영화 개봉관으로 문을 열게 되었다"라고 보도했다.

적들이 갖고 있었던 재산이라 하여 적산으로 불렸던 약초극장을 인수한 것은 홍찬에게 경제적으로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힘이 됐다. 그는 적산 극장 인수인들을 모아 한성극장협회를 조직한 뒤 서울극장협회로 개편했다. 1946년 11월 28일 자 <동아일보> 2면 우중단 기사는 그가 이 단체의 이사장이 된 사실을 보도했다.

반민특위 공격 음모

적산 인수로 재산과 영향력을 키운 그의 또 다른 방식은 해방정국 하의 좌우 대결에 가세하는 것이었다. 그는 친일파 편에 선 이승만의 재정 후원자 역할을 했다. 1946년 11월 28일 자 <경향신문> 3면은 이승만의 미국 방문을 후원하는 민족외교사절후원회에서 홍찬이 간부급 역할을 했다고 알려준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집은 친일파들이 음모를 꾸미는 소굴이 됐다. 반민특위 파괴 공작을 위한 모임까지 그의 집에서 열렸다. 친일 경찰 노덕술 등이 그곳에서 반미특위 공격 음모를 꾸몄다. 1949년 4월 19일 자 <동아일보> '특위 암살 음모사건 공판' 기사에서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홍찬은 자신의 가담을 부인했다. 이 사건의 공판 실황을 보도한 1949년 5월 18일 자 <조선일보> 2면 상단에 따르면, 증인으로 출석한 그는 "노덕술이 찾어온 일은 있으나 음모 사건은 전혀 몰랏다"라고 답변했다. 집주인인 홍찬이 가담하지도 않았는데 노덕술이 그의 집에다가 사람들을 모아놓고 반민특위 공격을 모의한 셈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홍찬은 일본인 재산을 불하받아 재력과 영향력을 키우는 한편, 우파라는 명목으로 다른 친일파들과 함께 기득권을 위한 싸움에 가담했다. 이는 그가 일제강점기보다 더 강한 힘을 갖도록 만드는 원동력이 됐다. 일제 패망과 해방은 그에게 위기가 아니라 또 다른 기회가 됐을 뿐이다.

홍찬은 왕성한 활동을 이어갔다. 수도극장과 더불어 수도영화사·평화신문사도 경영했다. 이승만 정권 말기에는 안양제영소(안양촬영소)도 건립했다. <친일인명사전> 제3권은 "1957년 경기도 안양에 대지 3만 2000평, 건평 5400평 규모의 안양촬영소를 건설"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이 내리막길의 시작이었다.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거액의 채무를 지고 1959년에 파산했다"라고 위 사전은 말한다. 그 뒤 그는 재기하지 못했다. 1964년 11월 18일 56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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