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4.08 06:17최종 업데이트 22.04.08 06:17
  • 본문듣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고발을 당했다. 위증을 했다는 이유다. 서울 광화문광장 동편의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수요집회를 방해하는 위안부사기청산연대에 속한 우익 인물이 할머니를 고발했다.

이 연합단체에 속한 위안부법폐지국민행동의 김병헌 대표가 그 고발인이다. 위안부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이용수 할머니가 증인 선서 뒤에 했던 진술이 사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고발 사유다. 이런 이유로 지난 6일 수요집회 현장 인근의 종로경찰서에 고발장을 제출했다.


보도에 따르면, 김병헌 대표가 허위라고 주장한 부분은 "위안부 생활을 하다가 태평양전쟁 종전 후인 1946년 5월 귀국선에 올라 부산을 통해 귀국했는데 배 안에서 가요 '귀국선'을 들었다"라는 피해자 이용수의 진술이다. 

김병헌 대표는 "노래 '귀국선'은 그 초판 음반이 1947년에 나왔으나 흥행에 실패했고,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1949년 이후"라며 "1946년 시점에 존재하지 않았던 노래를 들었다는 이용수의 증언 내용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했다.
  

KBS '다큐1'에 출연한 이용수 할머니가 대만에서 귀국할 때 배에서 노래 '귀국선'을 들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2015.9.24 ⓒ KBS

 
1945년에 가수 손석봉이 부른 노래

이야기가 사람과 사람 간에 전달될 때는 도중에 왜곡되는 경우가 많다. 구두가 아닌 기록을 통해 전달될 때도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의 원형을 정확히 파악하려면, 전달 과정에서 착오나 오류가 발생하지 않았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김병헌 대표가 범한 오류는 바로 거기에 있다. 비교적 최근에 정리된 정보를 토대로 이용수 할머니의 위증 여부를 살펴봤을 뿐, '귀국선'에 관한 이야기가 지난 80년간 어떻게 전승돼 왔는지를 제대로 검토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23년 전인 1999년 5월 24일 <경향신문>에 한국 가요사를 정리하는 기사가 실렸다. '한국 대중음악의 흐름'이라는 제목 하에 음악학계의 평가와 더불어 평론가 임진모의 인터뷰 등을 기초로 한 기사다.

이 기사는 "현대적 의미의 소속사와 매니저를 갖춘 최초의 대중스타는 이난영으로 35년 '목포의 눈물'을 발표,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라고 한 직후에 "김정구의 '눈물젖은 두만강'(36년), 손석봉의 '귀국선'(45년), 현인의 '굳세어라' 등이 인기 트로트로 30~50년대를 풍미했다"라고 설명한다.

이 기사는 1945년에 가수 손석봉이 부른 '귀국선'이 유행했다고 설명한다. 지금 사람들에게 각인된 것은 가수 이인권이 부른 '귀국선'이다. 가수만 다를 뿐, 두 노래는 동일한 작품이다.

음악평론가 선성원의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대중가요>는 가수 이인권이 이재호 작곡, 손로원 작사의 '귀국선'을 1946년에 불렀다고 한 뒤 "이 노래를 무대에서 부른 것은 손석봉이 먼저이나, 레코드 녹음은 이인권이 서울레코드사에서 했다"라고 설명한다. 김병헌 대표는 이인권의 '귀국선'에만 주목하고 손석봉의 '귀국선'은 살펴보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노래를 부르는 가수가 손석봉에서 이인권으로 교체되는 데에는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이인권이 부르기 전에 손석봉이 불렀다는 사실은 이 노래가 1945년부터 불렸다는 위 기사 내용에 신빙성을 실어준다.

신빙성을 실어주는 또 다른 기사가 있다. 40여 년간의 가요사를 정리한 1964년 3월 29일 자 <조선일보> 기사 '변천 3·1 운동 이후'가 그것이다.

이 당시 기자들은 1945년 해방 당시 적어도 열 살은 넘었을 사람들이다. 1945년을 역사책이 아닌 두 눈과 두 귀로 목격한 세대이므로, 해방 당시의 유행가를 기억하고도 남았을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해방 직후의 유행가에 대한 이 기사의 설명은 믿을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기사는 "악극단과 레코드를 통해 대중 속으로 파고들었던 유행가는 남인수·이난영·백년설·박단마·김정구·이화자·백난아·장세정·이인권 등 톱스타들과 함께 1940년대를 넘어서 황금기를 벗어나 일제의 태평양전쟁 돌입으로 쇠퇴하기 시작하여 드디어 1945년의 8·15을 맞았다"라고 한 뒤 해방 직후 상황을 이렇게 서술했다.
 
손석봉 노래의 '귀국선'이 고국을 되찾은 동포들의 기쁨을 아로새겼고, 장세정의 '해방의 역마차'가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된 서울 거리를 그린 것도 얼마 못가, 이 나라는 다시금 국토 양단이라는 비극 속에 뛰어든 것이었다.
 
해방 뒤에 귀국하는 동포들이 '귀국선'을 불렀으며, 그 뒤 38도선 왕래가 금지되는 국토 양단이라는 사태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해방으로부터 얼마 되지 않은 시점부터 '귀국선'이 유행했음을 보여주는 기사다. 1946년 5월에 이 노래를 들었다는 이용수의 진술이 거짓이라고 볼 근거는 없는 것이다.

전투기 부대에 딸린 위안소... 가미카제라 기억할 수 있어

보도에 따르면, 김병헌 대표가 허위라고 주장한 또 다른 부분은 가미카제 특공대에 관한 것이다. 가미카제 특공대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다는 이용수의 증언은 거짓이라고 김 대표는 주장한다. 가미카제 특공대가 첫 출격을 한 것은 1944년이고 이용수는 그전에 위안부가 됐으므로 '가미카제 특공대에 끌려갔다'는 진술이 사실일 수 없다는 것이다.

가미카제 특공대의 섬뜩한 이미지로 인해 한국인들은 동영상 화면에 나타나는 태평양전쟁 당시의 일본군 전투기를 보면서 가미카제 특공대를 떠올릴 때가 있다. 전투기 부대에 딸린 위안소에서 일본군 성노예 생활을 했던 위안부 피해자 역시 '나도 저런 부대에 있었다'는 말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

이용수 할머니가 있었던 타이완의 전투기 부대가 가미카제 특공대 역할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 그 부대가 실제로 그런 역할을 했을 수도 있다. 그런 역할을 하지 않았더라도 이용수 할머니가 거짓 증언을 했다고는 볼 수 없다.
  

1945년 4월 12일 일본 치란 특공기지에서 출격하는 가미카제 특공대의 하야부사 전투기 조종사에게 벚꽃가지를 흔드는 일본 여고생들. ⓒ 위키미디어

 
그가 끌려가기 전에도 타이완(대만) 상공에서는 일본군 전투기나 비행기를 자주 볼 수 있었다. 이곳은 공중전에 대비한 일본군 방공시설도 잘 갖춰진 곳이었다.

중일전쟁 발발 이듬해인 1938년 2월 26일 타이완 주둔 일본군인 대만군이 발표한 성명 속에 "아(我) 방공시설이 완비함"이라는 대목이 있다. 일본군이 성명을 통해 자신들의 방공시설 완비를 과시한 이유가 있다. 그달 23일 있은 중국 전투기들의 타이완 공습에도 일본군이 피해를 입지 않았음을 언급하기 위해서였다.

이 성명을 전문 그대로 소개한 2월 27일 자 <조선일보> 1면 하단에 따르면, 중국군 전투기들은 일본군 방공시설을 의식해 일본 공군기지에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고 멀리서 폭격을 하다가 돌아갔다. 이 때문에 오폭이 많았다. 농경지나 일반 민가가 주된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타이완의 다른 지역에서는 일본군 전투기들이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이 보도에 따르면 타이베이에서는 일본군 비행기 40대가 중국군의 공습으로 폭파됐다.

분위기가 이런 곳으로 이용수는 끌려갔다. 일본군 전투기를 많이 목격한 그가 자신이 본 것들을 가미카제 특공대 비행기로 기억하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가 있었던 부대가 실제로 그런 부대였을 수도 있지만,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문제 될 것은 없다. 가미카제 특공대의 인상이 강렬하게 각인된 한국인들에게서는 그 정도 착오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주옥순 엄마부대 대표와 국민혁명당 관계자들이 1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옛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위안부도 소녀상도 모두 거짓말’, ‘30년간 속았다, 위안부 사기 이제 그만’이라고 적힌 피켓을 들어보이고 있다. 2022.3.16 ⓒ 유성호


김병헌 대표는 해방 직후부터 '귀국선' 노래가 유행했다는 사실을 제대로 살펴보지 않았다. 이용수가 일본군 전투기들을 쉽게 볼 수 있었던 타이완으로 끌려갔으며, 위안부 피해자가 자신이 목격한 전투기를 가미카제 특공대로 인식하는 일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는 점도 감안하지 않았다.

덧붙여 분명히 해둘 말은, 고소든 고발이든 위안부 피해자가 가장 많은 한국 땅에서 위안부 피해자를 법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피해자의 한이 서려 있는 한국 땅에서 이런 고발이 나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