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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상황 발생! 긴급상황 발생" 충주소방서와 해병전우회 인명구조대에 긴급타전을 날렸다. 충북 충주시 산척면 주택매몰 현장에 출동했던 소방관이 폭우에 휩쓸려 남한강에서 실종됐다는 정보였다. 김덕기(1946년생)는 장비를 갖추고 대원들과 충주 엄정면 목계로 출동했다. 

목계에서 출발한 보트는 하류인 앙성으로 내려갔다. 대원들이 교대로 강물 속으로 들어갔지만 소방관 그림자도 찾을 수 없었다. 휴식도 잊은 채 대원들은 남한강에 보트를 띄우고 목계에서 앙성을 다시 훑었다. 1차 수색에서도 한눈을 팔지 않았지만 2차 수색은 더욱 신경을 썼다.

목계에서 앙성까지 하루 2회를 수색하고 나면 몸은 녹초가 됐다. 하지만 실종자 가족을 생각하며 다음날 아침이면 다시 목계로 향했다. 결국 17일 만에 실종자 시신을 수습할 수 있었다. 2020년 8월 19일의 일이었다. 김덕기는 17일간 생업을 접고 구명보트에 몸을 실었다. 충주 의용소방대 구조팀과 해병전우회 인명구조대가 육군의 지원을 받아 벌인 수색작업이었다. 김덕기는 힘든 생활에도 봉사를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바로 그의 아픈 과거 때문이었다. 

보도연맹 사건으로 세상 떠난 아버지

1960년대 초반 충북 충주군 충주중학교 2학년을 마친 김덕기(1946년생)는 무작정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엄마와 더이상 떨어져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1년 후 동생도 따라와 세 모자가 서울 마포에 둥지를 틀었다. 전세 보증금이 10만원인 한 칸짜리 방이었지만 한 가족이 모여 사니 그저 좋았다. 

앞서 김덕기의 모친 김순분(1928년생)은 7세·3세짜리 아들을 시어머니에게 맡겨놓고 서울행을 택했다. 남편 김봉한이 국방경비대를 나와 국군 장교를 할 때만 해도 그녀는 세상 부러운 것이 없었다. 하지만 김봉한이 남로당에 가입한 전력이 드러나 불명예제대한 후 불행은 시작됐다. 얼마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보도연맹원이었던 남편은 충주 싸리재로 끌려가 저 세상 사람이 됐다. 
 
아버지가 학살된 충주 싸리재 앞에서 증언하는 김덕기
 아버지가 학살된 충주 싸리재 앞에서 증언하는 김덕기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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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죽자 김순분은 세상이 끝난 것 같았다. 군복을 입은 남편의 시신을 충주 살미면 설운동 점말 앞산에 가매장할 때는 몸이 붕 뜬 듯했다. 다섯 살짜리 큰아들도 그렇지만 아버지 얼굴도 못 본 둘째를 생각하면 잠도 오지 않았고 음식도 입에 댈 수 없었다.

남편이 죽은 지 2년이 지나자 김순분은 무작정 서울행 기차를 탔다. 이러다가는 앉아서 굶어죽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는 마포에서 소금을 떼어다가 성북동, 정릉동 골목길을 다니며 팔았다. 새벽에 나가서 해가 어두컴컴해질 때까지 "소금 왔어요!"를 외쳤다. 두 아이가 눈에 밟혔지만 먹기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이후 김덕기도 서울로 올라와 동국대 부속중학교 3학년에 편입학했다. 그는 엄마가 장사를 나가면 냄비를 들고 마포교도소 앞 해장국집으로 달려갔다. 엄마가 놓고간 50원을 내면 해장국집 할머니가 냄비 한가득 국을 담아주었다. 집에 와서 냄비 뚜껑을 열면 김이 모락모락 나던 그 모습을 60년이 지난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베트남 파병 그리고 아픈 기억

하지만 고등학교 졸업 후에도 김덕기는 취직이 되지 않았다. 작은 일자리라도 구할라치면 '신원조회'가 문제가 됐다. 결국 그는 탈출구로 군대를 택했다. 1968년 5월 해병대에 입대했다. 그해 10월말 이른바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이 일어났고 김덕기는 준전시지역으로 투입됐다.

1968년 10월 30일부터 11월 2일까지 3차례에 걸쳐 무장 북한군 120명이 울진·삼척 지역에 침투해 12월 28일 대한민국 국군에 소탕되기까지 약 2개월간 게릴라전을 벌였다. 당시 북한군 7명이 생포되고 113명이 사살되었으며, 남한측 역시 민간인 포함 40명 이상이 사망하고, 30명 이상이 부상하는 등 피해를 입었다. 생사를 넘나드는 작전을 경험한 김덕기는 1년 후 베트남 다낭 행 선박에 몸을 실었다. 베트남 전에 참전한 것이다.
 
호이안에서의 김덕기(가운데)
 호이안에서의 김덕기(가운데)
ⓒ 김덕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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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낭을 거쳐 호이안의 정보부대에 배치된 그는 베트콩(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군사조직) 포로 취조와 정보수집을 맡았다. 정보부대의 취조는 포로가 잡혀 오면 우선 7권으로 된 두꺼운 책자를 뒤적이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 책은 베트남의 정치인, 베트남민족해방전선 활동가부터 주요 인물에 대한 인적사항(주소, 주요 이력 등)이 기록된 블랙리스트였다.

사실 김덕기의 아버지 김봉한 역시 한국전쟁 전 '남로당 블랙리스트'로 불명예 제대한 점을 감안하면 김덕기가 베트남전에서 민간인을 취조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다. 취조 과정에서 구타와 전기고문이 병행됐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게 김덕기는 1년 6개월간 명분 없는 전쟁에 동원됐다. 젊었을 때라 베트남 공산화를 저지한다는 명분에 의구심 없이 참여했지만, 이후 김덕기에게 남긴 전쟁의 상처는 크고 깊었다. 

고엽제 후유증에 평생 시달려

베트남에서 돌아온 김덕기는 일자리를 찾느라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여전히 신원조회가 걸림돌이 됐다. 그러던 어느 날 몸에 이상한 증세가 나타났다. 머리에 비듬같은 게 하얗게 일어났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나, 가려움 정도가 점점 심해졌다. 울긋불긋한 반점도 일어났다. 대전과 원주 병원에서 정밀검사를 받으니 고엽제 증상이라고 했다.

고엽제는 제초제의 일종으로, 미군이 베트남 전에서 베트콩을 찾아낸다는 명분 하에 밀림을 고사시키기 위해 대량으로 살포했다. 고엽제는 다이옥신과 같은 독성이 함유되어 생태계의 파괴, 교란뿐만 아니라 베트남 주민과 참전군인들에게 각종 질병과 장애를 일으켰다. 베트남 참전 군인들의 상당수가 고엽제의 피해에 시달리고 있다. 전립선암, 폐암, 간암, 림프종 등의 암, 폐질환과 같은 호흡기 장애, 피부 질환, 신경정신과적 장애를 유발하고 본인뿐만 아니라 자녀와 심지어 3세까지 유전됐다.

김덕기 역시 1970년대 초반부터 고엽제 후유증으로 고통받아 왔는데, 약을 먹으면 그 증세가 약해졌다. 그는 지난 50년 동안 고엽제로 인한 약과의 전쟁을 하고 있다. 하지만 병원에서는 고엽제 후유증 판정이 나오지 않았다. 

한국전쟁에 아버지를 잃고, 삶의 탈출구로 선택한 베트남전 참전의 결과는 고엽제라는 불청객과의 동거였다. 김덕기는 한국의 현대사에서 겪은 두 차례의 전쟁에서 아버지를 잃고, 자신의 건강을 잃었다. 그 속에서 생명과 공동체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위해 10년 전부터 유족회 활동을 하고 있는 그는 어떤 경우에라도 제2의 보도연맹사건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생명과 인권의 중요함을 깨달은 그는 해병전우회 인명구조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30년째 하고 있는 인명구조활동을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할 생각이다. 국가폭력에 의한 인권침해도 없어야겠지만 사고로 인한 인명희생도 없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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