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5.15 17:51최종 업데이트 22.05.15 17:51
  • 본문듣기

아그로파리텍 졸업생들의 연설 4월 30일 열린 아그로파리텍(AgroParisTech) 학위 수여식에서 세간에 격렬한 반응을 일으킨 도발적 연설을 진행하고 있는 8인의 학생들. '탈주에의 호소 - 2022년 아그로파리텍 학위수여식 : 다른 길로 접어든 아그로인들(Les Agros qui bifurquent)'이라 스스로를 명명한 이들은 자신들의 졸업연설을 유튜브에 올렸다. ⓒ Des agros qui bifurquent

 
"아그로파리텍 과정을 마치고 우리는 여기 모였습니다. 우리 중 상당수는 사회적·생태적 황폐화에 광범위하게 기여하는 교육과정을 마치고 얻은 이 학위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척하고 싶지 않습니다 (…) 우리는 농공산업(Agro-industry)이 지구 모든 곳에서 살아있는 존재들과 농민들을 향한 전쟁을 벌이고 있음을 알고 있으며, 과학과 기술이 중립적이고 비정치적인 것이라 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술혁신이나 스타트업이 구하는 것은 자본주의뿐이라고 생각합니다."

4월 30일 진행된 프랑스 그랑제콜 아그로파리텍(AgroParisTech) 학위수여식에서 8명의 졸업생들이 함께 한 연설은 이런 말로 시작됐다. 이들은 학교가 인도해 준 길이 '파괴자'의 역할이었다고 폭로하며, 그 길을 거부하겠다고 밝히고, 참석한 다른 이들에게도 함께 길을 이탈하자고 호소했다. 졸업식장에서 흔히 볼 수 없는, 학교를 향한 잔인한 졸업연설임이 분명했다.
 

이들의 연설은 5월 10일 밤 유튜브에 올라온 지 이틀 만에 50만 뷰를 넘게 기록하며 SNS 상에서 급속히 퍼져나갔다. <르몽드> <리베라시옹> 등 다수의 주요언론도 이들의 발언을 기사화하며 비중 있게 다뤘다.

아그로파리텍은 2007년 정부가 기존의 그랑제콜 3개를 통합하여 파리 5구에 설립한 그랑제콜로, 농식품공학·농작물학·산림학·환경학·보건학·생태학·생물학 등의 영역에서 연구자와 엔지니어들을 배출해낸다. 졸업생들에겐 농공업분야 대기업이나 정부기구 내에서의 안정적 일자리가 보장된다.


4년간 고생하며 취득한 학위를 들고 준비된 자리에 입성하기 직전, 일부 학생들이 악마와의 계약이었다며 극적으로 판을 뒤집는 선택을 한 것이다.

판을 뒤집은 학생들
 
"아그로파리텍은 매년 수백 명의 학생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농공업계에서 일하도록 훈련시킵니다. 농부들을 점점 더 노예로 만들어가는 다국적 기업들을 위해 실험실에서 식물을 조작합니다. 인스턴트 식사를 고안해 내고, 그것이 초래한 질병을 치료하기 위한 화학 치료법을 설계합니다.

'양심기업' 라벨을 만들어, 다른 이들보다 더 배불리 먹는 기업간부들이 스스로를 지구를 구하는 영웅이라 느끼게 해주기도 합니다. 소위 '녹색' 에너지를 개발하여 사회의 디지털화를 가속화하는 동시에 지구 반대편을 오염시키고 착취하는 데 일조합니다.

기업을 위해 사회-환경 책임 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합니다. 그들이 저지르고 은폐하는 범죄들보다 훨씬 더 길고 기막힌 내용이죠. 한 지역이 완벽하게 콘크리트로 덮일 수 있도록, 남아있는 개구리나 나비의 수를 세기도 합니다. 우리 눈에 이 모든 일들은 '파괴'입니다. 이런 일을 택하는 것은 타인의 이익을 취하면서 그들에게 해를 끼치는 것입니다."

이들의 발언이 폭발력을 가지며 급속도로 확산된 것은, 굴절되지 않은 청년의 직설적 언어로 위선의 현실을 가감 없이 드러냈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이 말한 '자본의 도구가 되어 영혼 없이 작동하는 타락한 엘리트', 테크노크라트의 모습이 전 사회영역을 관통하는 오늘의 비극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비 엘리트로 길들여져 현장에 투입되어야 할 이들이 탈주를 선언했을 때, 청중은 이들을 탓하는 대신 환호와 뜨거운 박수로 화답했다. 현장의 청중은 물론, 유튜브 등 SNS에서도 열광케 만들었다.
 
"저희는 여전히 의심하는 이들에게 호소합니다. 이력서를 채울 경험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 길을 받아들인 분, 이 세상은 미쳤다고 자주 생각하는 분, 다른 길을 가고 싶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길을 택할지 모르는 분, 뭔가 바꾸고 싶지만 그게 사실상 가능할 거라고 믿지 않는 당신에게 말합니다. 뭔가 세상이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느끼는 건 당신만이 아니라는 걸 우린 말하고 싶습니다. 정말로 뭔가가 심각하게 잘못되어 가고 있으니까요."
"여기 저기서 우리는 다른 삶의 방식을 실험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지구를 오염시킬 뿐인 산업들의 독점적 지배에 더 이상 종속되지 않기 위해 지식과 노하우를 획득해가는 사람들, 더 이상 땅을 파괴하며 살지 않기 위해 땅을 잘 이해하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해로운 프로젝트에 적극적으로 맞서는 사람, 대중적이고 탈식민적이며 페미니즘적인 생태주의를 일상에서 실천하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이 모든 만남들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길을 상상할 수 있도록 영감을 주었습니다."

이들의 발언은 현실 비판과 이상적 선언에 그치지 않고, 이미 진행형인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면서 더 큰 지지를 얻었다.  

"저는 도피테(남부도시)에서 양봉 시설을 준비 중입니다."
"저는 노트르담 데랑드(낭트 주변 신공항 예상부지였다가 주민들과 환경운동가들의 저항으로 공항건설이 무산된 지역)에서 지내며 집단농업과 자급자족 농업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농지를 콘크리트화 하는 것에 반대하는 운동에 합류했습니다."
"저는 산에 정착해 계절노동자로 일하며 그림 그리는 일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4명의 채소재배 농부, 한명의 곡식 농부, 3명의 양조업자가 함께 운영하는 농장에 합류했습니다."
"저는 반핵운동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이런 방식의 삶이 우리를 훨씬 행복하고, 강하고, 우리의 삶을 만개하게 할 것이라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저희는 미래에 자신의 모습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길, 우리 아이들의 시선을 당당히 마주할 수 있길 바랍니다. 무엇보다 내면 어딘가에서 끓어오르는 에너지가 흘러가 버리지 않도록 하세요. 재정적 족쇄에 발목을 잡히기 전에 당신만의 새로운 길을 찾으세요. 다국적 기업들과 정부는 문제를 더 악화시킬 뿐입니다.

지금 나설 수 있습니다. 농부, 제빵사 훈련, 몇 달간 우핑(wwoofing, 유기농장에서 일하면서 배우고 생활하는 일)하기, 위협받는 생태지구 지키는 투쟁에 참여하기, 자전거 수리 워크숍에 참여하기 등으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각자의 다른 길들을 찾으세요."

이들은 유튜브에 자신들이 결성한 모임의 메일 주소는 물론 각자 속해 있는 공동체와 운동단체 사이트, 앞서 탈주자의 길을 간 엔지니어들의 모임들을 소개하며 구체적 해법을 제시하도 했다. 그들은 각자 전국의 농촌으로, 산으로, 버려진 땅, 위협에 처한 땅으로 흩어져, 농공산업계의 엔지니어이자 활동가로서 각자의 역할이 스며들 곳을 찾아 착지한 상태였다. 마치 80년대 공장가에 스며들어 노동자들과 함께 사회변혁을 꿈꿨던 한국의 운동권 학생들, 혹은 제정 러시아말 민중 속으로 들어가고자 했던 지식인들의 브나로드 운동처럼.
 

4월 30일 파리에서 진행된 아그로파리텍 학위수여식에서 8인이 등장, 파격적 연설을 시작하는 모습 ⓒ Des agros qui bifurquent

 
쏟아지는 응원

유튜브에는 1500여 개의 댓글이 달렸다. 뜨거운 응원과 공감 외에도 자신도 같은 선택을 했다는 증언도 이어졌다.

"... 나에겐 집약적 온실 농업으로 몰아간 뒤 대출을 갚지 못하자 토지를 박탈한 농협 때문에 심장마비로 죽은 농부 할아버지가 있습니다. 그와 이 망할 시스템 속에서 죽어가는 농부들을 위해 감사를 전합니다. 이런 청년들이 자랑스럽습니다..." - 마리옹 브로드벡(Marion Brodbeck)

"2019년부터 센트랄리엔 엔지니어였던 저는 2021년 초 직장을 떠났습니다. 당신들과 같은 논리에서 내린 결정이었죠. 지금은 사회적 협동조합에서 일하고 있어요. 코스닥, 고액연봉과는 이별이지만 정말 신선한 공기를 마시는 것 같아요. 내 기술적 연구 작업을 지속할 수 있어서 절 엔지니어로 계속 남아있게 해주기도 하죠. 계속 하세요. 거기서 공동체, 노조, 정당을 조직하세요. 다시 한 번 브라보!"- 플로리몽 망카(Florimond Manca)


언론들은 이런 제목들로 이 화제의 졸업연설을 소개했다.

"아그로파리텍 학생들, 파괴자의 세계에서 탈주하라 호소" - 르몽드
"아그로파리텍 졸업생들, 농산업계의 사회적·경제적 폐해 폭로" - 웨스트 프랑스
"아그로파리텍, '파괴자의 역할' 거부한다는 졸업생들의 연설" - 리베라시옹


 

아그로파리텍생들의 화제의 연설을 보도하는 5월12일자 르몽드 파괴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할 당신들의 일자리로부터 탈주하라 선동하는 학위수여자들 ⓒ Des agros qui bifurquent

 
이들의 연설이 유튜브에 올라온 날은 마크롱이 새 임기를 시작하는 취임식을 가진 날이기도 했다. 집권 2기를 시작하는 대통령에 대한 프랑스 사회의 분위기는 전날 치러진 프랑스컵 결승전 경기에 등장한 그를 향해 일제히 야유를 보내던 8만 관중을 통해 드러난 바 있다.

청년들은 코로나 기간 동안 삭제된 청춘을 감내해야 했다. 70대 이상 유권자들에게 몰표를 받아 당선된 대통령을 향한 젊은 층의 냉소와 분노가 거리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이유가 그들이 기성세대가 만들어낸 썩은 판 자체를 거부하며, 산으로, 들로 나가 새로운 판을 짜고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이미 10여년 전부터 주변에서 듣거나 보던, 엘리트 청년들의 자급자족 시스템으로의 회귀는 이 작은 사건을 통해 하나의 현상으로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 "새로운 프랑스 국민과 새로운 프랑스를 시작한다"는 마크롱 대통령은 그의 말대로 새로운 형태의 저항의 무기를 들고 나선 새로운 형태의 청년들과 새 씨름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51,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