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무엇으로 충만해질까. 우리는 무엇을 위해서 살아갈까. 꿈, 희망, 목표, 이상. 이러한 가치들을 숭배하는 자는 행복할까. 나의 존재 가치를 특정한 역할 또는 직업에 두는 것은 존경받아 마땅한 것일까. 충분하지 않은 자신의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노력의 차이를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성공한 덕후, 실패한 프로. 덕후로서 만족하는 삶, 은퇴를 결심한 프로. 이들을 통해 우리가 건져 올려야 되는 의미는 무엇일까. 하고 싶은 대로 살아라. 원하는 삶을 찾아 떠나라. 이 무책임하고도 실존적인 슬로건은 우리를 어디로 이끄는 것일까.

20년 전 전성기를 누렸던 프로 레슬러 랜디는 심장이 부서지도록 끈질기게 링 위에 오른다. 그는 목숨을 내놓고 경기를 했지만 항상 가난과 외로움 속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의 딸은 아버지를 버렸고, 캠핑카 월세를 내지 못해 길바닥으로 쫓겨 나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온몸에 붕대를 감고 수많은 약을 복용하며 마을회관에 차려진 허름한 경기장에 오른다. 심장이 부서져 더 이상 경기를 할 수 없음에도 링 위에서 죽을힘을 다해 싸우는 그를 보며 느끼는 감정은 굉장히 복잡하고 미묘하다. 누군가 그를 두고 미련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한계를 극복하며 원하는 것을 찾아 나서는 용기에 박수 칠지도 모른다.

나의 이름을 찾아서
 
 영화 스틸컷

영화 스틸컷 ⓒ NEW

 
영화 전반적인 서사는 늙어버린 레전드 레슬러의 신파지만, 그 안에서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던 것은 랜디와 그가 사랑했던 스트립 우먼 캐시디가 자신의 이름을 찾는 과정이었다.

랜디는 자신의 본명 로빈으로 불리기를 싫어한다. 레슬러 랜디 '더 램'은 일과 직장, 이상과 현실과 같은 개념이 아니라 한 사람의 존재 목적, 그 자체였다, 그래서 그는 오로지 랜디로서만 존재했다.

심장이 부서져 큰 수술을 하고, 담당 의사가 더 이상 레슬링을 할 수 없다고 진단했을 때, 그는 자신의 본명을 따르려고 시도한다. 한 여자의 아버지로서, 반려자로서 살아가려고 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그 실패를 통해 그는 레슬러, 랜디를 제외하고는 살아갈 의미가 없다고 확신하게 된다.

랜디가 사랑한 스트립 우먼 캐시디의 본명은 팸이다. 그녀는 클럽에서 자신의 본명을 숨긴다. 부끄러운 스트립 우먼과 아이 엄마로서의 삶을 엄격히 분리한다. 마치 나는 이곳에 있을 사람이 아니야. 이것은 나의 찬란한 미래를 위해 잠시 스쳐 지나가는 곳일 뿐이야. 곧 이 지옥을 벗어날 것이니 조금만 참자와 같은 표독이 느껴진다.

랜디가 클럽에서 캐시디에게 고백을 했지만, 정작 그 대상은 팸인 것이다. 그래서 클럽 안의 캐시디는 밖에서 만나자는 랜디의 제안을 팸을 소환해 거절한다. 하지만, 결국 랜디의 끈질긴 구애로 캐시디와 팸의 경계는 허물어진다. 랜디의 진심이 캐시디를 통해 팸까지 전해졌고, 팸은 더 이상 캐시디로 숨어 사는 것을 거부하고 클럽을 그만둔다.

팸은 무대에서 춤을 추다가 문득, 이 사실을 인지하고 클럽을 떠난다. 떠나는 그녀를 향해 클럽 관리자가 "캐시디, 어디가?"라고 부르자 캐시디는 혼잣말로 되받는다.

"나는 팸이야."

그리고 팸은 랜디의 마지막 경기가 될지도 모르는 곳으로 찾아간다. 그녀는 죽을지도 모른다며 랜디를 말려보지만, 랜디는 그녀를 뒤로하고 링 위에 오른다. 이후 팸은 경기가 끝나기도 전에 경기장을 떠난다.

아마도 팸은 랜디처럼 비록 남루할지라도 스스로 부끄럽지 않고 자랑스러운 또 다른 이름을 찾아 나설 것이다. 자신을 뛰어넘은 존재가 되어 팸 뒤에 숨는 것이 아니라 팸보다 앞에 서서 그녀의 삶을 이끌어 갈 것이다.

어쩌면 삶은 스스로 자랑스러운 이름을 하나 가지게 되는 여정일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영화 이야기 | 감독은 <블랙 스완>의 대런 애러노프스키다. 2008년 개봉작으로 그 해 제65회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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