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5.22 19:06최종 업데이트 22.05.22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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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중에 100년을 넘긴 곳은 찾기 힘들다. 대한제국 시대에 있었던 기업이 일제강점기와 미군정기를 거쳐 대한민국 시대까지 유지되는 사례는 드물다.

하지만, 드물 뿐이지 전혀 없지는 아니다. 동학혁명 및 청일전쟁 발발 2년 뒤인 1896년 지금의 서울 종로4가에서 문을 연 박승직상점이 그런 사례에 해당한다. 이 기업은 지금까지도 계승되고 있다. OB맥주로 유명했던 두산그룹이 박승직상점에 뿌리를 두고 있다.


2017년에 <경영사학> 제32집 제2호에 실린 신현한, 야나기마치 이사오, 곽주영 세 교수의 공동 논문 '두산 120년 - 적응과 변신의 역사'는 "세계적으로 백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장수 기업은 극히 드문 현실에서 두산의 120년 역사는 두산의 핵심 경쟁력이 존재한다는 증거"라고 말한다.

창업주 박승직의 경영 역량과 더불어, '핵심 경쟁력'으로 거론될 만한 요인이 있다. 위 논문 제목에도 나온 '적응과 변신'이 바로 그것이다. 대기업의 흥망성쇠를 좌우한 정치적 위기들을 때마다 비껴간 것을 핵심 경쟁력의 하나로 포함시킬 수 있다.

1897년에 조선왕조가 대한제국으로 변모하고 1910년에 일본제국주의가 국권을 강탈하고 1945년에 미군정이 들어설 때에 박승직은 적응과 변신의 면모들을 보여줬다. 이것이 이 기업의 경이적 생존을 가능케 한 원동력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매판자본

박승직은 흥선대원군 집권기인 1864년 지금의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한 그는 10대 후반인 1882년경부터 포목 행상을 시작했다. 급료 지체 및 부실 지급에 분노한 하급 군인들이 대일 시장개방에 불만을 품은 한성부 주민들과 연대해 1개월간 고종 정권을 마비시킨 임오군란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전후한 시기에 상업의 길로 들어섰던 것이다.

그로부터 약 14년 뒤에 박승직상점을 차린 그는 뒤이어 거상 반열에 올라섰다. 이를 기초로 대한제국 정부와 인연을 맺었다. 개항장 사무를 처리하는 감리서 관직도 얻고 황제 자문기관인 중추원 관직도 얻었다. 대한상공회의소의 효시인 한성상업회의소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정치와 근거리를 유지하면서 경영 활동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대한제국 정부와 관련을 맺으며 사세를 확장시키던 그는 대한제국이 망하기 전에 다음 시대를 위한 씨앗을 뿌려뒀다. 제국주의 국가권력을 앞세워 한국에 침투하는 일본 자본에 예속되어 활로를 모색하게 된 것이 그것이다. 매판자본의 길에 들어섰던 것이다.

박승직의 매판자본 전환은 1907년에 설립한 또 다른 기업인 공익사의 성장 과정에서 잘 나타난다. 박승직상점과 협력관계를 갖는 공익사를 출범시키는 과정에서부터 니시하라 가메조(西原龜三) 경성상업회의소 상담역의 도움을 받은 그는 니시하라의 힘을 빌려 일본인 중간상인들을 배제하고 일본 종합상사인 이토추상사와 거래관계를 가졌다. 공익사는 이토추상사에 예속하는 기업이 되었다.

1993년에 발행된 <친일파 99인> 제2권에 수록된 역사학자 윤해동의 '박승직: 매판 상인자본의 전형'은 "1910년에는 이토추 상사와 합작하여 자본금을 4만 6000원으로 증자하였다"며 "단 3년 사이에 자본금을 5배 가까이 늘릴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다음 "다른 포목상들이 모두 파산하고 있을 때 공익사의 이런 빠른 성장은 매우 인상적인 것이었는데, 여기에 매판자본의 본질이 있다"라고 한 뒤 "이때부터 맺은 박승직과 이토추상사와의 관계는 일제하의 전 기간에 걸쳐 유지"된다고 설명한다.

박승직은 그 관계의 하부에 있었다. 외국자본에 종속된 매판자본이 외국자본보다 더 많은 이익을 챙기는 것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했다. 윤해동 기고문은 공익사가 만주로 사업을 확장한 일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1919년에 만주공익사를 창립하고 만주 내의 모든 사업을 거기(이토추)에 양도하고 말았다"라며 "이로써 조선에서의 공익사의 활동은 이토추상사의 만주 진출을 위한 징검다리 역할을 한 데 지나지 않았음을 여실히 알 수 있다"라고 평가한다.

친일 행적

단순히 일본 기업의 대륙 진출을 도와주고 '떡고물'을 챙기는 데 그쳤다면, 박승직을 친일파로 분류하는 데 어려움이 생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려움을 직접 제거해주었다. 그를 친일파로 규정하는 일이 어렵지 않도록 그 스스로가 인상적인 행보를 남겼다. <친일인명사전> 제2권에 이런 설명이 있다.
 
1909년 11월 안중근 의사에게 처단된 이토 히로부미를 추도하기 위해 조직된 국민대추도회의 발기인과 위원을 맡았다.
  

서울 종로4가에서 문을 연 '박승직상점' ⓒ 두산

 
이처럼 1910년 국권침탈 이전에 대한제국 정부와 협력하면서도 '차기 정부'와도 제휴함으로써 이윤 확대의 토대를 구축한 박승직은 일제강점기 때도 번영을 이어 나갔다. 동시에, 친일 행위도 정세 변화에 맞게 변모시켰다. 1938년부터 국민정신총동원연맹 및 국민총력조선연맹 같은 전쟁 협력 기구에 참여해 일제의 전쟁 수행을 도왔다. 국방헌금도 여러 차례 쾌척했다.

공개 발언을 통한 친일에도 가담했다. 위 사전에 따르면, 1938년 1월 1일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가 주최한 '조선인의 진로와 각오' 좌담회에서 '중일전쟁의 책임은 전적으로 중국에 있다'라는 거짓 발언을 했다. 일본의 도발로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데도 그런 말을 했던 것이다.

총독부는 정치를 잘하고 있으므로 총독부 정치는 개선할 필요가 없다고도 발언했다. 지원병 제도를 환영하면서 "조선인도 제국 신민으로서의 의무와 권리를 갖추게 되었다"라며 기쁨을 표시하기도 했다. 큰 기업의 총수가 이런 발언을 하지 않는다고 일제가 반드시 커다란 불이익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기업인으로서 굳이 하지도 않아도 될 친일 행적을 남겼던 것이다.

일본인을 겨냥한 맥주 사업

대한제국 말기에 매판자본이 됨으로써 다음 시대를 위한 씨앗을 뿌렸던 그는 결과적으로 볼 때 일제강점기 말기에도 비슷한 흔적을 남겼다. 훗날 OB맥주, 동양맥주의 번영을 가져올 단서를 만주사변 2년 뒤인 1933년에 만들어두게 된 것이다.

그해 12월 그는 소화기린맥주의 취체역(이사)이 됐다. 일본의 2대 맥주회사인 기린맥주가 대주주가 되어 조선에서 운영하는 회사에 이사로 참여했던 것이다. 이것은 해방 뒤 OB맥주의 번영으로 이어졌다.

기린맥주의 역사를 설명한 1977년 12월 16일 자 <경향신문> 5면 '비화(秘話) 한 세대' 코너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맥주가 만들어진 것은 43년 전인 1934년이었다"라고 한 뒤 "이때만 해도 맥주는 한국인의 식생활 습성에 맞지 않아 일반의 관심을 끌지 못했고 더구나 가격이 비싸 고급 요정이나 카페에서 주로 소비되고 있었다"라고 설명한다. 포목상으로 시작한 박승직이 맥주 사업에 가담한 것은 한국인들을 겨냥해서가 아니라 일본인들을 겨냥해서였던 것이다.

그런데 박승직이 보유한 소화기린맥주 주식은 많지 않았다. 윤해동 기고문은 2백 주에 불과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은 해방 직후에 산더미 같은 이익으로 불어났다.

일본인들이 버려두고 간 재산을 미군정은 적산(귀속재산)으로 규정했다. 그들은 적산과 연고가 있는 한국인들에게 헐값 불하를 단행했다. 해방 전에 갖고 있었던 소화기린맥주 주식이 해방 뒤의 박승직에게 행운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사실, 적산은 해방과 함께 한국 국민의 공공재산이 됐어야 했다. 그런 적산이 친일파 박승직과 그 집안에 헐값으로 들어간 것이다. 일본과의 연고가 해방 뒤에 재앙을 주지 않고 오히려 축복을 안겨준 것이다.

적응과 변신

박승직은 1950년에 86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인생 막판까지도 '적응과 변신'을 잊지 않았다. 대한제국 말기에는 일본제국주의를 영접했던 그였다. 그랬던 그가 해방 직후에는 독립 지사들을 영접하는 쪽으로 몸을 틀었다. <친일인명사전>은 "해방 후 1945년 10월 임시정부 요인들을 맞기 위한 '한국 지사(志士) 영접위원회'의 위원"으로 참여했다고 알려준다.

그는 일제 때 미키상사로 개칭했던 박승직상점의 상호도 원래대로 되돌려놓았다. 위 사전은 "1946년 10월 일본식 상호였던 미키상사를 박승직상점으로 환원했다가 다시 두산상사로 바꿨다"라고 설명한다. 미키상사는 그의 창씨명에 근거한 것이었다. 창씨명인 미키 쇼우쇼크(三木承稷)를 따서 그렇게 불렀다가 해방 뒤 원래대로 환원한 것이다.

1991년 12월 6일 자 <한겨레> 7면 전체에 실린 박승직 기사에 따르면, 살아생전의 박승직은 두산그룹을 이끌게 될 아들 박두병에게 "정치에는 관여하지 말고 오직 가업에 충실하라"라는 가훈을 남겼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이 가훈을 잘 지키지 않았다. 그는 정치적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기업을 불려 나갔다. 정치적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이 120년 기업의 핵심 경쟁력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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