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수박이 벌써 이렇게 맛이 들다니 신기하네."

쩍, 반으로 갈라진 수박의 색이 보기 좋게 빨갛다. 시기가 일러 별 기대 없이 샀는데 아삭하고 달콤한 여름의 맛이다. 한 통, 두 통, 수박 몇 통을 부지런히 먹다 보면 올여름도 그렇게 지나갈 테다.

수박을 자르는 옆에서는 보글보글 국수를 삶는 냄비가 끓는다. 코끝을 스치는 수박  냄새와 국수 삶는 열기가 일렁이는 부엌, 나의 여름은 오늘부터 시작이다.

더위에 지쳐 밥 차리기도 싫고 입맛도 없을 때는 역시 국수다. 국수 하면 흔히 '후루룩'을 떠올리지만 나에게 국수는 '참방참방'이다. 김이 폴폴 나는 국수를 얼음장처럼 차가운 물에 넣고 헹구거나 메밀국수를 국물에 '참방' 담가 먹는 이미지, 그래서 더욱더 여름이 되면 국수 생각이 난다.

국수는 또 혼자 먹기에 참으로 적절한 음식이다. 아주 오래전 한 선배가 술집에서 나오는 뻥튀기를 먹으며 "이걸 먹고 있으면 세상에 나와 뻥튀기만 남아 있는 것 같아"라는 말을 했다. 하나, 둘, 뻥튀기를 씹으며 열심히 입 안으로 넣다 보면 온전히 그 행위와 맛에 집중하게 된다.

국수도 마찬가지다. 국수를 입 속으로 넘기다 보면 먹는다는 그 행위 자체에 빠져든다. 게다가 그 행위가 너무 무겁게 느껴지지 않아 좋다. '호로록' 국수를 삼키면서 동시에 엄청나게 진지하기란 불가능하다. 호로록, 호로록. 약간은 가볍고 경쾌한 그 행위를 하다 보면 엄청나게 슬플 일도, 불행할 일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저 별 일 없이 지나가는 오늘의 하루를 함께하는 음식.

혼자 시간 보낼 때 좋은 동무

음식에도 내향형, 외향형이 있다면 국수의 사촌 격인 만두는 여럿이 왁자지껄 함께 빚고 쪄서 즐기는 외향형 음식, 국수는 혼자만의 시간을 보낼 때 좋은 동무가 되는 내향형 음식이 아닐까.

물론 자취생들에게 냉동 만두는 고마운 구세주지만 조금 처진 상태에서 만두를 먹자면 목에서 울컥하고 막혀버린다. 영화 <올드보이>의 오대수가 십오 년간 매일 먹은 음식이 군만두가 아니라 국수였다면 그보다는 덜 악에 받쳤을 수도 있지 않을까.
  
영화 <올드보이> 주인공 오대수는 영문도 모른 채 갇혀 15년간 군만두만 먹는다.
 영화 <올드보이> 주인공 오대수는 영문도 모른 채 갇혀 15년간 군만두만 먹는다.
ⓒ CJ 엔터테인먼트

관련사진보기

 
아무튼 국수는 무거운 마음을 조금 가볍게 만들고 무더위에 지친 입맛도 경쾌하게 끌어올린다. 차갑게 헹군 국수에 곁들이는 부재료도 그때그때 냉장고에 있는 재료로 얼마든지 활용이 가능해서 어떤 재료가 없어 못 먹는 일도 없다. 요즘 인기인 들기름 비빔국수는 아주 적은 재료만으로도 '맛있다' 소리가 절로 나온다.

간단한 요리일수록 기본이 중요한 법, 잘 삶은 면을 찬물에 바락바락 빨듯이 헹궈 미끄러운 전분기를 없애고 체에 잘 털어 물기를 최대한 제거해야 양념이 착 달라붙는다. 들기름에 간장이나 피시소스 혹은 액상 조미료를 살짝 섞는 것만으로도 맛있는 양념이 만들어지는데 국수에 양념을 넣어 치대듯 조물조물 손으로 무치면 들기름이 뽀얗게 유화되며 먹음직스러운 향이 올라온다.

고명은 각자 취향에 따라 준비하면 되는데 나는 주로 집에 있는 채소, 고수나 루꼴라 상추 등을 샐러드드레싱으로 가볍게 따로 무쳐 올린다. 새콤한 맛이 악센트가 된다. 매콤한 맛을 더하고 싶다면 샐러드드레싱에 고춧가루를 살짝 더하는 것도 방법이다.

첫 수박을 산 김에 수박 껍질을 손질해 수박 껍질 절임도 만들었다. 무슨 유난인가 싶지만 아주 가끔 이 별미가 먹고 싶어진다. 들기름과 다진 파, 약간의 간장만으로 맛을 낸 깨끗한 맛으로 비빔국수의 고명으로도 훌륭하다. 여름을 사랑하는 나는 올해의 첫 '여름 국수'를 개시한 날이 꽤나 즐겁다.
  
들기름 비빔국수
 들기름 비빔국수
ⓒ 강윤희

관련사진보기

 
- 재료

소면 1인분, 들기름 2큰술, 액상 조미료나 피시소스 1작은술 (간장의 경우 1/2큰술~1큰술), 들깨 고명 약간, 잎채소 적당량

* 고명 샐러드용 오리엔탈 드레싱 : 올리브유 1큰술, 간장 1작은술, 식초 1작은술, 고춧가루 1작은술, 홀그레인 머스터드 1작은술(생략 가능), 후춧가루 약간

- 만들기

1. 냄비에 물을 넉넉하게 붓고 소면을 삶아 차가운 물에 바락바락 빨 듯 잘 헹구고 물기를 제거한다.

2. 그릇에 들기름과 액상 조미료나 간장을 넣고 잘 섞은 뒤 국수를 넣고 손으로 조물조물 뽀얀 색이 올라오도록 무친다.

3. 오리엔탈 드레싱 재료를 잘 섞고 잎채소를 넣어 조물조물 무친 뒤 2에 보기 좋게 올린다. 통들깨나 삶은 달걀 등 원하는 재료를 더해도 좋다.

태그:#들기름국수, #비빔국수, #여름음식, #수박껍질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