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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시를 읽지 않는 시대'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불리는 까닭, 시를 읽지 않아서가 아니라 시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이나마 익숙함을 만들어 드리기 위하여 일주일에 한 편씩 시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오늘 소개하는 시와 산문은 네이버 블로그 '시를 읽는 아침'에 동시에 소개됩니다.[편집자말]
새 창을 달다
- 성은주

창을 닦는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안쪽 때문일까 바깥쪽 때문일까
나의 얇은 창에 먼지가 가득하다

물방울을 떨어트려 닦아도 닦이지 않는다

가끔 뒤척이는 구름의 살점이 보인다 비가 그치길 기다렸다 들판을 걷는 바람이 어쩌다가 흙내를 몰고 들어올 때가 있다 창을 닦는다 주기적으로 관리를 해 주지 않으면 유리는 더욱더 혼탁해진다 창을 닦는다 가끔 검은 점이 생겨 신경이 많이 쓰인다 창을 닦는다

뿌옇게 나무가 두 개로 겹쳐 보일 때가 있다
찬란하게 흔들리는 빛의 몸짓을
깜박거리는 춤을
오래 지켜보다가 서서히 어두워지거나
사라지는 발목이 창가에 쌓인다

창문 없는 방을 떠올려보다가 혼탁해진 창을 새 창으로 갈아 끼웠다

조용히 스르륵 움직이는 밝은 빛이 침착하게 새 창을 뚫고 들어온다 새 창도 주기적으로 물방울 뿌려 닦아 주고 정기적으로 관리를 해 줘야 검은 테두리가 생기는 걸 예방할 수 있다고, 예방해도 무너지는 것들이 있다 무너지는 것은 무게를 못 견딘 잘못인가 무게의 잘못인가

작은 창에 사랑하는 풍경이 모두 잠긴다
돌보고 돌보다 돌아보게 되는 일처럼

창을 닦는다
새잎이 돋는 나무를 본다

- <창>, 시인의일요일, 2022년, 46~47쪽


제가 2009년에 등단했으니 등단하고 14년이나 지났습니다. 14년 동안 읽었던 시가 모두 몇 편이나 될까요. 비슷하게라도 숫자를 셀 수 없습니다. 다만, 제 블로그에 해설과 함께 소개한 시의 숫자를 합하면 1700여 편이 넘습니다. 이 시의 숫자는 지금껏 제가 직접 필사하고 간략한 해설까지 쓴 시의 편수입니다. 이만큼 시를 읽어왔다면, 어려운 시도 척척 읽어낼 수 있어야 할 텐데요.

하지만 시 해설을 쓰면서 '내가 제대로 읽어내고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도 종종 하게 됩니다. 잘못된 안내로 독자의 시선을 흐리게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될 때가 많습니다. 본다는 것이 도리어 내 눈을 흐릴 때가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나는 정확히 봤다고 생각하는데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은 어떤 이유입니까. 내 문제입니까, 아니면 보이는 것의 문제입니까. 내 안쪽의 문제입니까. 아니면 내 바깥쪽의 문제입니까. 어쩌면 그 무엇인가가 내가 보고자 하는 해답을 숨기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작정하고 숨기고자 하는 마음을 읽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다만 나의 문제라면, 그 실마리는 쉽게 풀릴 수도 있습니다.

시가 읽히지 않을 때 나의 심정, 뿌연 창으로 세상을 보는 것 같다고 종종 느꼈습니다. 모든 것이 흐릿해진 풍경, 나는 풍경을 보고자 하지만 내 앞을 가로막는 유리창은 시선을 철저하게 방해합니다.

이때의 창은 나와 세상을 연결하는 매개체이지만, 동시에 나와 세상을 분리하고 내 시선을 왜곡하는 방해물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양면성'이라고 부르는데요, 유리창의 양가성은 정지용 시인의 시 '유리창1'이 어떤 시보다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시 '유리창1'에서 유리창은 투명하기 때문에 외부를 내다볼 수 있게 하지만, 창밖을 차단시키기도 합니다. 유리창으로 인해서 죽은 아들과 만날 수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유리창 때문에 아들의 영혼에 다가갈 수 없게 만들기도 합니다.

창이 뿌연 것은 안쪽과 바깥쪽, 어느 쪽의 문제입니까?
 
성은주 시인의 시집
 성은주 시인의 시집
ⓒ 시인의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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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은주 시인의 시에서 화자는 세상을 바라보기 위해 창을 닦습니다. 무엇을 보고자 하는지 묘사되어 있지는 않지만, 유리창을 닦는 행위에 화자가 집중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먼저 헝겊으로 닦았겠죠. 하지만 닦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헝겊이 소용이 없자 물방울을 떨어뜨려 닦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신통치 않습니다. 창을 닦으며 화자는 생각합니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안쪽 때문일까 바깥쪽 때문일까'라고.

여러분은 어느 쪽이 더 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상황에 따라 다를 수도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보통 안과 바깥, 양쪽의 문제에만 집중합니다. 우리가 어떤 문제를 해결할 때 보편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입니다. 선과 악, 삶과 죽음, 진보와 보수 등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내 성향과 가장 가까운 것을 정답이라고 선택합니다. 그런데요 이 둘 중, 내가 만족할 수 있는 정답은 얼마나 될까요.

화자는 얘기합니다. '창문 없는 방을 떠올려보다가 혼탁해진 새 창을 새 창으로 갈아 끼웠다'고요. 가장 투명한 창은 '창이 없는 것 같은 창'인 것처럼, 화자의 불만족은 안과 바깥 그 어느 쪽에서도 해결할 수 없었던 문제였습니다.

해답이 없는 문제도 있을 수 있습니다. 답이 없는 까닭은 문제가 어렵기 때문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질문 자체에 오류가 있거나 제시된 정답이 모두 오답일 때도 있습니다. 제가 시에 대해서 오래 고민했었지만 해결할 수 없었던 까닭도, 여러분들이 해결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봅니다.

정리하자면, 창이 뿌연 까닭은 창의 안과 밖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창 자체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또는 그 창을 바라보는 또 다른 창인 내 눈과 안경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창을 바꾸는 것이지만, 비용과 시간 등의 이유로 망설이게 됩니다. 그러다 저 뿌연 창에 익숙해지게 되면, 세상은 원래 뿌연 것이었다고 자신을 속이며 살아가게 됩니다.

시 쓰는 주영헌 드림

성은주 시인은...

한남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201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었고, 현재 한남대학교 강의전담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시집으로 <창>이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 덧붙이는 글 | 시와 산문은 오마이뉴스 연재 후, 네이버 블로그 <시를 읽는 아침>(blog.naver.com/yhjoo1)에 공개됩니다.


태그:#성은주시인, #창, #시인의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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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쓰기'보다 '시 읽기'와, '시 소개'를 더 좋아하는 시인. 2000년 9월 8일 오마이뉴스에 첫 기사를 송고했습니다. 그 힘으로 2009년 시인시각(시)과 2019년 불교문예(문학평론)으로 등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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