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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호씨(1941년 생)의 고향은 함경남도 북청군이다. 인민학교 3학년(10세)을 다니던 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남쪽으로 피난 내려왔다. 형편이 여의치 않아 2년여 간 학교를 다니지 못하다가 어렵게 속초국민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했다. 그렇게 속초국민학교를 졸업(3회)했고, 곧바로 속초중학교에 진학해 또 다시 어렵게 중학교 졸업장을 땄다.(9회)

중학교 3학년 2반이던 시절, 경제사정으로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했던 김씨는 다른 친구들이 고등학교에 진학한다는 말에 깊은 서글픔을 느꼈다고 했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중학교 재학 중에도 학교 월사금을 내기 위해 토요일, 일요일은 물론 방학 때마저도 오징어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며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고등학교 진학은 꿈도 꿀 수 없었다. 그나마 절박하게 돈이 필요한 어린 학생이 할 수 있는, 기술이 필요 없는 가장 쉬운 일은 배를 타는 것이었다.

비록 고등학교 진학은 포기해야 했지만 뱃일을 하면 용돈도 벌 수 있고, 먹고 싶은 호떡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정작 배를 탈 때는 뱃멀미가 심해 굶은 채로 일했다. 굶주린 배로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그제야 먹지 못한 저녁끼니까지 한꺼번에 먹곤 했다.

가정형편이 좋지 않은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자 계속 속초에서 살아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고 한다. 배 타는 것이 싫어 잠시 속초를 떠나도 봤지만 이내 다시 속초로 돌아왔다. 방황하던 그가 속초에 정착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그곳에서 아내를 만나 결혼을 하면서였다. 지금도 김상호씨는 경북 풍기에서 살던 아내를 속초로 데려왔던 그날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삼시세끼를 걱정하던 그와 달리 아내는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부족하지 않은 살림의 집안에서 귀히 자랐다. 그런 아내가 오직 남편 김상호씨만을 보고 풍기에서 강원도 속초로 왔던 것이다. 자신만을 믿고 평생을 같이 하자던 아내가 풍에 걸리고, 납북사건으로 인해 아내를 돌보지 못한 사이 아내의 중풍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는 아내가 중풍으로 세상을 떠나던 해인 1988년까지 배를 타며 아내를 돌봤다. 그러나 결국 아내는 세상을 먼저 등졌고, 김상호씨는 '아내도 없는데 험한 바다에 나가 돈을 벌어 무슨 소용이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 뱃일을 그만 두고 '아바이마을'로 향하는 '갯배' 선착장에서 일하며 지냈다.
   
청호동, 이른바 '아바이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진 표지판. 이곳에서 김상호 씨는 평생 이곳에서 바다를 보며 살았다.
 청호동, 이른바 "아바이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진 표지판. 이곳에서 김상호 씨는 평생 이곳에서 바다를 보며 살았다.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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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잡이배 가고쟁이가 된 중학생

김상호씨는 한국전쟁 시 속초로 피난 온 월남피난민으로, 어린 시절부터 배를 탔다. 선원이라고는 하나 1년에 몇 개월 정도만 배를 탔기 때문에 매우 경험 많은 정식 선원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정말 돈이 궁할 때만 배를 탔다고 했다.
 
"내가 승선했던 승해호의 선장 김종인씨는 같은 동네에 사람으로, 전쟁 전부터 같은 고향인 함경남도 북청 사람이었고, 나와 같이 납북되었던 김성학이의 부친이기도 해요.

한 1970년 경이었나. 내가 속초에 있기 싫어 외지로 왔다 갔다 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선장(김종인)이 나에게 '바람 들어 (외지에)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우리 배나 같이 타자'고 제안했어요. 그 말을 듣고 정신 차리자 싶어 그 해 오징어 철부터 승해호를 타기 시작했어요.

오징어는 여름 한 철에 나니까 그때만 배를 탈 수 있어요. 승해호는 배 구조 자체가 오징어잡이만 가능하도록 되어 있어 다른 조업은 할 수 없었어요. 그래서 나도 가고쟁이로 시작을 했죠."

당시 승해호는 다섯 명의 선원과 계약직과 같은 '가고쟁이'로 구성되었다. '가고'는 '광주리, 바구니'라는 뜻인데, 대나무 광주리에 낚싯대와 먹을 것 등을 담아 어깨에 메고 배를 타고 저녁에 나갔다가 이튿날 아침에 돌아오는 사람들을 빗대어 '가고쟁이'라고 불렀다. 배가 바다에 한 번 나갔다 들어오면 개인사정으로 그만 두는 사람이 생기고, 빠지는 선원만큼 새로운 선원을 다시 보충해야 했기 때문에 바다로 나갈 때마다 '가고쟁이'는 매번 바뀌었다.

속초에서 오징어가 많이 나고 돈벌이도 괜찮다는 소문이 나던 때라, 전라도, 경상도(특히 욕지도)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고 한다. 일손이 모자랐기 때문에 외지인뿐만 아니라 어린 학생들도 어른만큼 힘을 쓸 수 있다면 묻지도 않고 배에 태우던 시절이었다. 선원 생활은 북한이 고향이었던 그에게 출신을 묻지 않고 차별하지 않는 노동이었다.

김상호씨가 승선했던 승해호는 '퉁퉁퉁' 소리를 내며 시간당 7~8노트 정도의 속도를 낼 수 있는 야끼다마(소구기관 엔진) 엔진을 장착한 목선으로, 납북사건 당시 23명 정도가 승선했었다고 한다.
 
"그 때 나로서는 배의 구조나 성능은 말할 것도 없고 어로저지선이 북위 38도 30분이라는 것도 몰랐어요. 요즘처럼 배에 성능 좋은 무전기나 GPS, 레이더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단지 나침반(compass) 정도만 있던 시절이었어요.

당시 선장들은 해도나 해양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도 없었거니와 행여 해도가 있었다 하더라도 해도를 읽을 만한 사람도 별로 없었어요. 승해호 경우도 선장이 해도를 읽는 것을 본 적이 없었으니까. 대개는 직감적으로 '이 방향으로 나갔으니 들어올 때는 반대쪽으로 들어오면 된다'는 정도의 경험과 추측에 의해서 운항을 하는 거죠. 조금 아는 선장들이라고 해봐야 조류(간조와 만조)를 계산해 방향을 잡는 정도랄까."

통상 바다로 나가면 육지와 달리 아무것도 보이지 않기 때문에 배가 어느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당시 사무장이었던 김상호씨는 선장이 보는 나침반을 곁눈질로 보며 '지금 배가 약간 남쪽으로 가는구나, 약간 서쪽으로 가는구나' 정도를 알 수 있을 뿐이었다고 한다. 당시 선장들이 대체로 그랬던 것처럼, 승해호 선장도 운항을 계산해 자기 배의 위치와 방향을 인지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갑자기 북으로 끌려가고, 남에선 개 패듯 패고

북한에 납북되던 1971년 7월 27일 새벽 6시, 승해호는 조업을 마치고 속초로 귀항하고 있었다. 그날은 소위 '안개오줌'(안개비보다는 조금 굵고 이슬비보다는 가는 비라는 뜻의 방언)이 바다에 내리고 있었다. 궂은 날씨로 인해 조업하는 동안 희미하게 보이던 육지의 등대 불빛마저도 귀항할 때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밤에 주로 일을 하는 선원들은 늘 피곤한 상태였기 때문에 귀항하는 동안 대부분 잠들어 있었다.
 
"사실, 북한 경비정이 나타난 순간 일어난 일들은 지금 별로 기억이 없어요. 왜냐하면 누군가 이북배가 왔다고 소리치는 건 들었는데,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몸이 완전히 얼어버렸거든요. 눈앞이 캄캄하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더라고요.

나는 함경도 출신으로 이북에서 남한으로 내려왔잖아요. 북한 아이들이 보기에 나는 완전히 반동분자였기 때문에 북으로 끌려간다면 죽을게 뻔하다고 생각했어요. 게다가 남한에 있는 부친은 중병에 걸려 있지, 아내는 중풍으로 치료를 받고 있지, 그런 상황에 나까지 납북된다고 생각하니 미치겠는 거라. 배 타기는 싫었지만 돈을 벌기 위해 억지로 승선했던 것인데 북으로 끌려가게 되니 답답해지더라고요."

그는 1972년 9월 7일 귀환할 때까지 1년 여 동안 북에서 억류생활을 해야 했다. 김상호씨는 귀환 시기가 7·4 남북공동성명 직후였던 것으로 볼 때, 북한이 남한 선원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고의로 납치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실제 72년 5월과 9월 사이에 돌아온 동해안 선원들은 300여명 가량 된다.

1년여의 억류생활을 끝내고 남한으로 돌아온 선박은 김상호씨가 탔던 승해호를 포함해 모두 7척이었다. 귀환한 배들은 해경 배에 이끌려 속초 부두로 들어왔고, 선원들은 배에서 내려 양쪽으로 도열해 있는 경찰들을 통과해 바로 버스에 태워졌다. 그리고 경찰의 인솔에 따라 속초시청 별관 2층 회의실로 수용되었다.
 
"북에 있을 때는 남한으로 돌아가 가족 볼 생각에 정신이 없더니, 막상 돌아와 조사받게 되는 처지가 되니 혹시 형(刑)이 떨어져 영창을 살게 되면 어쩌나 걱정이 앞서더라고. 사람마음이 그리 간사하다니까.

시청 회의실에 대기하고 있으면 수사관이 와서 선원을 호명해요. 그럼 조사를 받기 위해  다른 배 선원 몇 명과 섞여서 수사관 뒤를 따라가요. 속초 시청 건너편 현대극장 부근에는 여인숙이 많았는데, 그 중 'ㄷ'자형 여인숙으로 갔던 것 같아요.

방마다 한 명씩 들어가 조사를 받는데, 방마다 수사관이 두 명씩 있었어요. 그 방에 있으면 여기저기서 '으악'하는 비명소리, 쥐어터지는 소리, '이 새끼 처넣어, 잡아넣어'하는 고함소리가 막 들려요. 그러니 수사관이 묻는 말에 '아니오'라는 대답을 할 수가 없어요. 각목으로 사람을 개 잡듯 때리는데 어떻게 '아니오'라는 말이 나오겠어요."

어로저지선의 정확한 위치도 몰랐던 김상호씨가 '너 어로저지선 넘어갔지?'라는 수사관의 질문에 '네'라고 대답했던 것도 그때였다. 해도(海圖) 한 장, 전자장비 하나 없던 배에서 월선을 했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그러나 김상호씨는 억압적이고 폭력적인 조사를 자행하는 수사관들이 작성해 놓은 조서내용에 '네'라고 밖에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시청에서 대기하고 있는 동안, 구타로 부축 받으며 들어오는 사람들을 수없이 보았다고 한다.

그렇게 시청에서 조사받고 풀려난 김상호씨는 부친과 아내가 걱정되어 곧장 집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그러나 납북되던 해에 중풍에 걸렸던 아내는 그 사이 치료시기를 놓쳐 폐인이 되어 있었다. 돈이 없어 약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해 아내의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져 있었다. 김상호씨는 경상도 풍기에서 지명도 모르는 '속초'라는 곳으로 와서, 자신과 결혼하여 함께 지내며 고생했던 아내를 그렇게 '놓친'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아내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그 모든 것을 버텼으나 소용없는 일이 되었다. 

"난들 납북되고 싶어서 납북됐나"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고 난 뒤 김상호씨는 공사장을 전전하며 일하며 지냈다. 그러던 중 2004년경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 병원에 입원했던 날이 908일, 통근치료 받은 날이 211일, 모두 합해 총 1119일 동안 병원생활을 해야 했다.
 
"정말이지 병원침대에서 똥오줌을 받아내는 식물인간처럼 지낼 때는 살아서 뭐하나하며 나쁜 마음도 몇 번 먹었어요. 몸이 나아서 나가봐야 또 빨갱이 취급 받고, 연좌제로 자식들 미래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무슨 희망이 있겠어요. 그러나 그럴 때마다 자식들을 생각하며 독하게 마음먹게 되더라고요.

주위 노인들이 '새끼가 뭐 소용있겠음메? 젊었을 때 재혼합세. 내가 중신을 설 테니'라며 재혼 권유도 자주 했어요. 그런 말을 들었을 때 고민이 많이 되더군요. 과연 내가 새 장가를 간다면 내 새끼들이 제대로 클까? 삐딱하게 나가지는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고민할 때마다 내린 결론은 '이거는 아니다. 내가 공부를 하지 못해 이렇게 감시받는 생활을 하는데 내 새끼들만은 어떻게든 공부시켜야 한다'이거였어요."
 
김상호 씨는 납북귀환피해 이후 청학동으로 들어가는 소위 '갯배' 선착장에서 일을 하며 살았다.
 김상호 씨는 납북귀환피해 이후 청학동으로 들어가는 소위 "갯배" 선착장에서 일을 하며 살았다.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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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김씨의 '자식 세 놈'은 모두 무사히 대학을 졸업하고 자기자리에서 열심히 살고 있다고 했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그는 아바이마을로 들어가는 관광명물 중 하나인 '갯배' 안내원으로 일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여기저기 몸이 아파 더 이상 일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국가를 향해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배라면 지겨워요. 아바이마을에서 일할 때 갯배만 봐도 지긋지긋해. 누가 납북되고 싶어서 납북이 되었느냐 말이에요. 어로한계선을 지켜 국민을 보호하라고 국가의 녹을 먹고 있는 해군이나 해경은 우리 배가 이북에 끌려가는 동안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나 말이오. 자신들의 과오는 안중에도 없고 북에서 무슨 지령을 받지 않았냐며 죄 없는 사람을 고문하고 두들겨 패기나 하니 그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말이지."

우리주변에는 국가나 집단으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한 피해자들이 의외로 많다. 그들은 우리와 섞여 아무렇지도 않은 듯 살고 있지만 여전히 힘든 고통의 기억 속에서 지내고 있다. 혹시 속초에 들러 갯배를 탄다면 그 바다에 이어져 있을 분단의 선으로 인해 고통 받았던 누군가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기억해 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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