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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성회(앞줄 가운데가 강원규)
 칠성회(앞줄 가운데가 강원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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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경찰서 무덕관에서 출발한 쓰리쿼터는 미원 방향 도로를 덜컹거리며 달렸다. 출렁이는 트럭 적재함에 탄 이들의 마음은 긴장과 초조로 비포장도로의 불편함도 느끼지 못했다. 고은삼거리에서 미원 방향으로 좌회전한 트럭은 2km 가서 갑자기 정차했다. "전부 내렷! 중식이다"라는 소리에 뒷결박을 당한 이들은 적재함에서 뛰어내렸다. 일부는 발을 헛디뎌 땅으로 구르기도 했다. 흙바닥에 뒹구는 이들에게 군인들의 군홧발이 날아왔다.

길가에 내린 이들은 산골짜기로 갔고, 숨을 몰아쉬는 이들에게 주먹밥이 하나씩 주어졌다. 뒷결박을 당했기에 군인이 입에 넣어준 주먹밥을 볼이 미어터지게 우물거릴 뿐이었다. 보도연맹원들이 밥알을 우물거리는 사이 군인과 경찰들이 뒷걸음질을 했다.

청주 분터골에서 난 총소리

"발사"하는 소리와 함께 '탕탕탕' 소리가 골짜기에 울려 퍼졌다. 주먹밥을 입에 문 채 보도연맹원들은 쓰러졌다. 트럭 한 대에 실린 이들이 저세상으로 가는 데는 잠깐이었다. 청원군(현 청주시) 남일면 분터골에서는 이날뿐만 아니라 총 7차례의 총질이 이어졌다. 

그런데 총탄 세례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이가 있었다. 청주시 내덕동 밤고개 손천운(가명)은 총탄이 날아올 때 순간적으로 엎드렸다. 뭔가 '뜨끔'하는 고통이 밀려왔지만 이를 꽉 깨물었다. 이어 가슴에 총을 맞은 보도연맹원 몸이 자신의 몸을 덮쳤다.

손천운은 천운(天運)을 타고 살아 났지만 몸은 만신창이였다. 허벅지에서 피가 새어 나왔고, 무엇보다 자신의 목과 입으로 떨어지는 죽은 이의 피가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어느새 왕파리들이 핏물 위로 새까맣게 몰려들었다.

하지만 그는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움직일라치면 군인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고 총탄 세례가 이어졌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숨죽이던 그는 정신줄을 놓았다. 허벅지에 정통으로 맞은 총상의 고통 때문이었다. 그렇게 정신줄 놓기를 몇 차례나 했을까. 더이상 군인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몇 시간을 더 숨죽여 있다가 땅거미가 질 무렵이 돼서야 몸을 움직였다. '여기 있다가는 죽는다'는 생각에 그는 보은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손천운이 분터골에서 파리 밥(?)이 될 뻔했던 날은 1950년 7월 10일경이었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지 한달도 채 되지 않은 때였다. 대한민국 군경은 인민군에 협력할 가능성이 있다며 보도연맹원들을 예비검속했다. 

천운으로 살아난 아들의 친구

'1주년을 맞이하여'라고 쓰인 사진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강봉준(1898년생)은 한숨을 지었다. 사진 앞줄 중앙에 있는 강원규(1927년생)는 금쪽같은 장남이었다. 그 귀한 자식이 저세상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쏟아졌다.

사진 속 사람들은 한결같이 인물이 훤했다. 모두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외투를 입었다. '칠성회(七星會)'라는 모임 결성 1주년을 맞아 1949년 11월 7일 촬영한 사진이다. 청주상업학교 동창 모임으로 추측되는데,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보도연맹원 사건으로 학살당했다는 소문이 바람결에 들려왔다.

"형님 알고 있습니까?" 호떡집에 불난 듯 요란을 떠는 이는 옆집 사는 장복술(가명)이었다. "뭔 얘기여?" "손천운이가 살아서 돌아왔습디다." "뭣이여!" 자식 친구인 손천운이 보도연맹으로 끌려갔다가 살아왔다는 소리에 강봉준은 한달음에 그의 집으로 갔다.

한 달 만에 돌아와 몸져누운 손천운에게 그는 "우리 원규 못 봤는가?"라고 다그치듯이 물었다. "총소리에 정신줄을 놨다가 밤에만 걸어서 보은까지 갔다가 와서 못 봤습니다." 손천운은 마치 자기가 죄를 진 것인 양 어쩔 줄 몰라했다. 몇 번을 더 물었지만 손천운에게서 나올 수 있는 말은 그 이상 없었다. 청주경찰서 무덕관까지야 같이 갔지만, 이후부터 강원규를 포함한 칠성회 멤버 5명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

청주상업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 공무원이 되거나 은행에 취업한 칠성회 멤버 중 5명은 그렇게 한국전쟁 초기 분터골에서 역사의 희생양이 되었다. 애초에 보도연맹에 가입하지 않은 나상진과 분터골에서 죽었다 살아남은 손천문만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칠성회 희생자 중 강원규는 청주상업학교를 전교 1등으로 졸업, 조선신탁은행(한일은행의 전신) 충주지점에 취업했다. 이후 충북도청에 잠시 근무했고, 청주세무서에 다니다가 6.25를 맞아 보도연맹사건으로 죽임을 당했다. 그러니 아버지 강봉준의 상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청주고등학교와 청주대학교를 나온 강홍규(1941년생, 강원규의 동생)는 취업을 앞두고 눈앞이 캄캄했다. 10여 년 전에 보도연맹으로 학살된 형 강원규의 신원이 문제가 돼 취업문이 막힌 것이다. 다행히 충북 향토사단인 37사단(증평 소재) 사단장이 신원보증을 서 대전병참학교에 군속으로 취업할 수 있었다.

강원규의 다른 남매들도 일자리를 구할 수 있었다. 삼남 인규는 청주공업학교를 나와 상업에 종사했고, 차녀 길성은 청주여고를 나와 청주세무서에 취업했다. 오빠 강원규의 청주세무서 동료였던 김홍배 과장이 그녀를 취업시켜줬다. 이렇게 강원규의 남매들은 신원조회 장애물을 뛰어넘어 사회생활에 연착륙할 수 있었다.

문제는 강원규의 유일한 딸 강문정(1949년생)이었다. 강문정은 아버지는 물론이고 엄마의 따듯한 가슴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가 5세에 어머니가 개가를 했기 때문이다. 덕성국민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그에게 상급학교 진학은 언감생심이었다. 이후에는 할아버지가 일제 때부터 해온 국수가게를 운영했다. 그가 초등학교를 졸업한 이듬해 할아버지 강봉준이 세상을 떴기 때문이다.

아버지 얼굴도 모르는 딸
 
1970년 청주경찰서 무덕관에서 열린 태권도 승단심사(세번째줄 오른쪽에서 3번째가 강문정)
 1970년 청주경찰서 무덕관에서 열린 태권도 승단심사(세번째줄 오른쪽에서 3번째가 강문정)
ⓒ 강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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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아, 국수 좀 빼다오." 마을 아줌마들이 방앗간에서 빻아 온 밀가루를 건넸다. 먹을 것이 귀했던 1960년대 초반, 국수는 부식이 아니라 주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밀농사를 지어 방앗간에서 밀가루를 빻아온 이들이 사시사철 밤고개 국수가게에 줄을 이었다. 개중에는 미원조물자인 밀가루를 가져온 이들도 있었다.

22kg 밀가루 자루에는 '미국 국민이 기증한 걸로 제분된 밀가루'라고 쓰여 있었다. 미국이 한국전쟁 후에 대한민국에 지원한 PL480호로 명명된 원조농산물의 일종이었다. 그런데 그 자루 하단에는 '팔거나 다른 물건과 바꾸지 말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하지만 밀가루로 수제비나 칼국수를 해 먹는 이들이 이도 질리면, 밀가루를 국수가게로 가져와 잔치국수를 뽑아 갔다. 미국원조 밀가루 자루에는 한국인과 미국인이 악수하는 모습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런 연유로 사람들은 미원조 밀가루를 '악수표 밀가루'라고 불렀다.

국수를 뽑으러 오는 사람들이야 아침 7~8시에 가게에 오지만, 강문정이 영업 준비를 위해서는 매일 새벽 3~4시에 일어나야 했다. 손님들이 밀가루를 가져오면 소금을 뿌린 후 우선 반죽을 하고, 롤러에 몇 차례 집어넣어 돌리면 가늘게 면이 나온다. 이어 2개의 방망이에 말린 면을 기계로 자르면 국수가닥(면)이 만들어진다. 이를 대나무 꼬챙이에 널어 말리면 잔치국수가 되고, 덜 말린 상태에서 팔면 칼국수(누른 국수)가 되는 것이다.

청주 밤고개 국수가게 하면 소녀 강문정이 할아버지의 가게를 이어받아 운영하는 것으로 이름이 나게 되었다. 몇 년 후엔 장사에 요령도 생겨 제법 돈도 벌게 되었다. 하루 순수입이 1,000~1,500원이나 되었다. 강문정은 이후에 청주연초제조창에 취직하기도 하고 예비군 소대장을 하기도 했지만 모두 그만두었다. 

다시 국수가게로 복귀한 그는 왕성하게 사업을 펼쳤다. 젊은 나이부터 국수가게, 신흥제분 대리점, 사료 대리점, 쌀가게 등을 동시에 운영했다. 1980년에는 청주 용암동에 제면공장과 사료대리점 충북총판, 영일포장공업사를 운영했다.

왕성하게 사업을 벌이다 2000년대 들어 위기가 찾아왔다. 뜻하지 않은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좌절하지 않았고 지금은 제2의 인생을 준비하려 학업에 열중하고 있다. 초등학교가 배움의 전부였던 그는 중·고등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취득했고, 집 나이 74세인 현재 학사 자격증, 사회복지사, 공인중개사 자격증 취득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한치 앞이 보이지 않던 미래를 묵묵히 개척해 온 그의 눈빛은 밝게 빛난다.
 

태그:#청주, #분터골, #한국전쟁, #보도연맹, #민간인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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