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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알고 지냈던 시민 장애인 주간 복지센터 센터장님이 있다. 몇 년 전부터 센터장님은 '알기 쉬운 메뉴판'이란 흥미로운 사업을 진행했다. 글을 읽지 못하는 발달 장애인들을 위해 그림으로 만든 메뉴판을 제공해보자는 발상에서 시작된 것이다.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던 사업은 해를 거듭하면서 여러 가지 성공 사례를 수집한 것 같았다. 센터장님은 그동안의 이야기들을 모아 작은 카탈로그를 제작하려 하셨고, 나는 원고의 자문을 맡아 자세한 에피소드들을 쭉 읽어볼 수 있게 되었다.  

메뉴판 하나가 만들어낸 변화
 
생그림날그림 디자인
▲ 알기쉬운메뉴판 생그림날그림 디자인
ⓒ 시민장애인주간복지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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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나는 발달 장애인이 글을 읽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기 쉬운 메뉴판' 사업을 보고 처음 알았다. 내가 그동안 너무나 당연스레 읽고 지나쳤던 수많은 글자들이 발달 장애인들에게는 해독하기 어려운 암호였다.

카페에서 음료를 주문하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활동도 발달 장애인들에게는 고난이도 기술을 요하는 일이었다. 여러 카페 사장님들이 "알기 쉬운 메뉴판"의 필요성에 십분 동감하시며 기꺼이 동참하셨다는 이야기에서 마음이 뭉클해졌다. 어떤 카페에서는 본인 카페 주요 손님은 장애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지난 5월 28일에 방영된 tvn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 15화에서는 다운증후군 쌍둥이 언니 영희(정은혜 작가)와 영옥(한지민 배우)의 이야기가 나왔다. 영옥이 그동안 해녀 대장의 말을 듣지 않고 목숨을 건 위험한 물질을 했던 것에도 다 이유가 있었다.

어린 시절 사고로 부모님 모두를 여의고 홀로 아픈 언니의 뒷바라지를 감당하고 있던 영옥이의 심정을 그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실제로 언니를 버리려 했던 순간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고, 지금 이순간에도 언니를 돌보고 있다는 사실만이 본질 아닐까. 
 
영희와 영옥
▲ 우리들의 블루스 영희와 영옥
ⓒ tv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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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옥과 영옥의 남자친구 정준(김우빈 배우), 그리고 언니 영희가 함께 식사를 하러 간 레스토랑에서 영희는 자신의 외모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놀리는 한 남자아이를 만났다. 남자아이의 부모는 아이를 제재하고 혼을 냈지만 결국에는 영희와 영옥이 앉은 테이블을 향해 "밥맛 떨어져서 가겠다"는 말로 모욕을 주고 말았다. 착잡하고 억장이 무너지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선장 네가 본 건 아주 아주 다 작은 일이라고. 이 보다 더한 일이 얼마나 더 많았는데. 식당에서 길거리에서 머릴 뜯고 싸우고 테이블 뒤엎고 쫓겨나고. 나도 이해해. 사람들이 영희 같은 애를 잘 못 봤으니까. 이상하니까. 자기도 모르게 자꾸 눈이 가겠지. 근데 왜 사람들이 영희 같은 애를 길거리에서 흔하게 못 보는 줄 알아? 나처럼 다른 장애인 가족들도 영희 같은 애를 시설로 보냈으니까.

한 땐 나도 같이 살고 싶었어. 근데 같이 살 집 얻으려고 해도 안 되고, 일도 할 수 없고, 영희, 어쩌면 일반학교에서 공부했다면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었어. 근데 일반학교에선 쟬 거부하고 특수학교는 멀고. 시내 가까운데 특수학교 못 짓게 하고, 어쩌라고. 시설에 보내면 나를 모질다고 욕하고, 안 보내면 오늘 같은 일을 밥 먹듯이 당해야 해. 대체 날 더러 어쩌라고."


영옥은 슬픔이 가득 고인 눈빛으로 상처받은 마음을 절절하게 토로한다. 영옥의 저 길고 긴 대사를 들으며 눈물 짓지 않은 시청자가 있을까. 저 대사는 오늘 주어진 하루가 누군가에게는 버티고 견뎌내야 할 버거운 일상이라는 사실을 시사해준다. 발달 장애인들과 보호자 분들 또한 우리의 소중한 이웃이자 함께 살아갈 이 사회의 구성원일진대, 대체 누가 무슨 권리로 영옥을 모질다 욕할 수 있을까. 그리고 진짜 밥맛 떨어지게 했던 건 영희와 영옥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우리 사회는 어떤 공간입니까

시설 이용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위해 '알기 쉬운 메뉴판'을 설치한 카페는 배려하는 공간이 되었다. 함께하는 사회, 작은 배려를 실천하는 사회는 그리 멀리 있지 않다. 게다가 이 작은 변화는 발달 장애인 뿐만 아니라 노인들과 아이들에게도 편리함을 제공해 주었다. 약한 사람들을 배려하는 태도가 모두에게 이로운 결과를 만들게 된 것이다. 모두에게 이로운 결정, 그것을 일컬어 우리는 작은 배려라고 부른다. 

공간은 공간의 주인을 닮아간다. 어떤 공간이든 그 공간 속에 서면, 공간의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다. 아주 작고 사소한 모습 속에서 본질의 파편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어떤 공간일까. 우리가 거하고 있는 공간, 이 사회는 지금 이 순간, 어떤 모습을 비추고 있을까. 그리고 그 공간에서 우리는 누구와 함께할 수 있을까. 앞으로 더 많은 공간이 누구에게나 쉽고 편안한 곳이 되길 희망해 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시민기자의 개인 브런치(https://brunch.co.kr/@claire1209)에도 업로드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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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문화예술 교육 활동가/ 『오늘이라는 계절』 저자 - 5년차 엄마사람/ 10년차 영어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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