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야간근무>라는 단편영화를 만났다. 영화에는 두 젊은 여성이 등장한다. 취업절벽에 부딪히고 무한경쟁에 지쳐 한국을 떠나고 싶은 여성, 그리고 개인적 꿈을 뒤로 한 채 한국에서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하는 캄보디아 여성 두 또래가 공장 야간근무 현장에서 만나서 부대끼게 된다. 서로 오해도 갈등도 빚지만 점차 공통분모를 찾아가며 상호 이해하게 되는 과정을 잔잔히 담은 버디무비다.
 
영화에는 흔히 '한국독립영화' 하면 떠올리게 되는 잔인한 세태나 극단적 설정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미 충분히 작품 속에서 설정된, 그리고 영화를 보는 스크린 바깥의 관객들이 체험하고 있는 극단적 상황이 공유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테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흘러가던 영화는 비록 해피엔딩과는 거리가 멀어도 두 주인공이 서로를 존중하고 이해하는 결말로 귀결된다. 하지만 영화가 주는 잔잔한 감성은 억지 '힐링'과는 다른 결을 형성해내는 단단한 작업이었다.
 
세상을 절대 장밋빛으로 응시하지 않으면서도 견뎌내기 위한 찰나의 휴식을 주는 미래지향적 결말을 담은 영화는 그해에 본 가장 인상적인 독립단편 중 하나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렇게 진한 인상을 남긴 1992년생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 2022년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인다기에 궁금한 나머지 영화제를 찾아 극장에서 작품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해당 영화제에서 상을 2개나 탄 뒤 한 달여 만에 이제 극장 개봉을 맞이한다. <경아의 딸>이란 제목을 가진 영화다.
 
1_사이버 성폭력 피해자의 지옥 같은 일상
 
 영화 <경아의 딸> 포스터.

영화 <경아의 딸> 포스터. ⓒ (주)인디스토리

 
경아는 요양보호사로 일하는 중년여성이다. 남편과는 사별했고 가족으로는 외동딸 연수가 있다. 한동안 모녀가 함께 살았지만 딸 연수는 교사가 된 후 독립해서 살고 있다. 경아는 그런 연수가 자랑스러우면서도 혼자 사는 다 큰 딸에게 이것저것 신경이 여간 쓰이는 게 아니다. 연수는 전 남친 상현과 헤어졌지만 상현은 연수에게 집착을 보인다. 연수에게 계속 매달리지만 그녀가 더 이상 연락하지 말 것을 요구하자 끝내 그는 과거의 성관계 동영상을 유포하고 만다.
 
설마 했던 연수는 충격을 받고 공황상태에 빠진다. 하지만 문제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심지어 동영상이 경아에게까지 전해지는 바람에 모녀 관계도 뒤틀린다. 믿었던 딸이 말로만 듣던 동영상 주인공이라니 경아로서는 하늘이 무너질 판이다. 그래서 모진 말을 했다가 딸과 관계는 완전히 파국으로 치닫고 만다. 이에 연수는 상현을 고소하지만 진행은 마음처럼 신속하지 않다. 그 후로 이런 사건의 피해자가 겪는 온갖 스트레스에 그녀는 차례로 시달리게 된다. 학교를 그만두고 이사한 방에서 칩거하는 나날이 이어진다. 한편, 경아는 딸과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해 괴롭다.
 
한국사회가 여전히 성 평등이 완성되고 여성들이 안심하고 살 수 있는 곳인지에 대해선 의문부호를 지울 수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이 때문에 역설적인 상황이 일어나는 바, 적어도 창작환경 관련해서는 부족하지 않게 많은 작품들이 다양한 경향으로 주제를 변주하며 선보여 왔다. 한국의 거의 모든 영화제에서 관련된 소재의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로 단편들에서 다채롭게 등장했던 해당 소재들이 이제는 본격 장편으로 탄생하는 중이다. 그 가운데 본 작품 <경아의 딸>은 특히 2020년 한국사회를 뒤집어놨던 n번방 사건의 직접적인 자장 아래 있는 작업이다.
 
n번방 사건과 여타 유사한 부류의 사이버 성폭력 문제는 우리 사회, 특히 남성들의 그릇된 성의식이 자정되지 않는 가운데 상대적으로 추적과 규제가 쉽지 않은 온라인 공간을 새로운 거점으로 삼은 상태다. 계속 진화해 가면서 근절 시도와 서로 창과 방패처럼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중이다. 그런 현실을 배경 삼아 영화는 연수가 겪게 된 사건처럼, 동영상 유포에 직면한 여성의 일상이 파괴되는 풍경을 마음먹고 꼼꼼히 형상화해낸다. 하지만 사실 이런 유형의 작업은 이제 만나기가 그리 어렵지 않은 상황이기도 하다. 단편이라면 해당 소재만으로도 짧은 러닝타임을 거뜬히 채우고 남겠지만 이 영화는 장편이다. 큰 줄기가 되는 소재 하나만으로 두 시간 가까운 분량을 끌고 나가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면 영화를 만든 이들은 과연 해당 소재 말고 무엇을 더 채워 넣었을까 궁금한 이들이 생길 법하다.
 
영화는 사이버 성폭력 피해자가 겪게 되는 전형적인 상황과 그 대처방법을 마치 영상교재처럼 단계별로 풀어낸다. (영화가 끝난 뒤 올라오는 부가정보에는 만든 이들이 여러 방면으로 조사와 자문을 받았다는 게 고스란히 드러난다) 일단 경찰에 신고부터 해야 한다. 그리고 형사고발을 위해 변호사를 선임하고 소송을 진행한다. 사건발생 후 일정시점까지 유포된 동영상은 경찰을 통해 삭제 및 정지가 가능하지만 이후에는 당사자 본인이 '디지털 장의사'라 불리는 데이터 관련 서비스에 의뢰해 비용을 지불하며 익명의 유포세력과 끝나지 않는 전쟁을 치러야 한다. 엄벌에 처하기 위해 탄원서를 주변에 요청하고 소송 및 제반경비도 마련해야 한다.
 
이런 복잡한 과정을 사건 발생 이전 삶이 거의 송두리째 파괴된 상황에서 감당해야 한다. 피의자 측은 합의를 종용하며 때론 돈으로, 때론 인정(?!)에 호소하며 끊임없이 접촉한다. 주변 가족과 지인들이 내 편이 되어주면 좋으련만, 주위 따가운 시선도 감내해야 할 경우가 허다하다. 연수 역시 그런 전형적인 상황에 추락하고 만다. 그런 일련의 상황이 세세하게 잘 고증되어 있기 때문에 <경아의 딸>은 피해 당사자를 온전히 이해하고픈 이들이라면 필견 작품이 될 만하다.
 
2_한국사회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의 역사성
 
 영화 <경아의 딸> 스틸 이미지.

영화 <경아의 딸> 스틸 이미지. ⓒ (주)인디스토리

 
영화는 여기에 장편의 추진력을 확보하기 위한 서사를 시도한다. 영화 속 주요 인물 관계는 3명의 등장인물이 각자 한 축을 맡는 3축 구조다. 어머니와 딸, 그리고 딸에게는 좀 더 어릴 적의 자기를 떠올리게 하는 온라인 과외학생, 이 셋의 관계 설정을 통해 성폭력 피해자 개인의 분투를 넘어 현대 한국사회 여성사를 압축하는 서사로 이야기의 확장을 시도하는 것이다.
 
어머니인 경아는 우리 앞전 세대, 흔히 '부모 세대'라 불리는 이들 중 어머니들이 그랬던 것처럼 순종하고 인내하는 데 익숙해져버린 존재다. 드라마에서 곧잘 형상화되는 것처럼 자신의 희생으로 가정을 유지해온 침묵하는 여성을 상징하는 그런 존재다. 경아는 남편의 일상적인 가정폭력에 시달렸지만 어린 딸 연수 외엔 누구도 믿고 의지할 데가 없었다. 동네 사람들은 '맞을 만하니 맞았겠지' 운운하며 발 없는 말이 천리 가듯 근거 없는 소문을 지어내기까지 했다. 이웃들이 경아의 허물을 강 건너 불구경했으니 어느 순간 경아는 저항을 포기했을 테다.
 
그랬던지라 딸에 대해서는 자기처럼 살진 말았으면 하는 기대와 걱정이 뒤엉키다 보니 그만 집착이 생겼다. 불안하다 보니 자꾸 통제하려 하고 간섭이 일상화된다. 그렇게 서로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었던 관계가 점점 자석의 같은 극이 서로를 밀어내듯 어긋나기 시작했다.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좋으련만, 그 시절 어머니들은 참 묵묵하게 말을 아끼며 속으로만 삭였다. 과거의 잔인한 기억을 그저 인고하며 묵혀둔 숱한 어머니들의 대표와 같은 경아다.
 
연수는 아마도 감독의 '오너캐(Owner Character)'에 가까운 존재일 테다. 영화 속에서 종종 연수가 경아에게 내뱉는 비수를 품은 독설은 어머니를 공격하기 위해서라기보단 자학이 겹쳐 보인다. 연수는 경아가 자신이 홀로 겪는 고통을 제발 이해해주길 간절히 기대했지만 그 여망을 무시하고 세상의 다른 보는 눈들처럼 자신을 몸단속 못하는 헤픈 존재 취급하는 데 격분해 겨우 간신히 쥐고 있던 정신줄을 놓아버린다. 내가 이렇게 힘든데! 이렇게 끔찍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제발 좀 넘어가 달라고!!! 간절히 말해도 소통되지 않는 경아에 대한 분노가 연수를 지배하기 시작한다.
 
이 가슴 아픈 순간은 어쩌면 감독과 그의 동 세대가 이전 세대의 여성들, 어머니 세대에게 서운했던 것들, 쌓여만 있던 감정을 혈루로 토해내는 장면이기도 할 테다. 부당한 세상, 나는 아무 잘못한 게 없는데, 피해자일 뿐인데도 오히려 고립되고 주변에서 부도덕하고 타락한 존재로 매도당하는 끔찍한 상황에서 정말 당장 내 편 하나가 절실한데 가장 믿던 존재인 어머니가 오히려 기성세대의 시선으로 자신을 단죄하는 게 더 속상하게 마련이다.
 
어머니 경아와 딸 연수의 애증 관계에 감독은 또 하나의 보조 축, 세발자전거의 작은 바퀴를 추가한다. 연수가 과거의 자신 혹은 가르치던 학생들을 대하는 시선으로 지켜보는 과외학생 하나가 그 세 번째 등장인물이다. 자신이 과거에 지나왔던 행로처럼 연애를 하고 남자친구를 만나며 (위험에 노출된,)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은 하나를 상대하며 연수는 과거의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를 겪는다. 이 3축 구조가 톱니바퀴처럼 작동하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교차하는 한 사람의 성장 이야기를 펼치는 게 아마도 김정은 감독이 목표한 기본설정일 테다.
 
여기에서 특이점이 발생한다. 사건의 당사자이자 주인공은 분명히 연수인데도, 영화의 제목이 상징하는 것처럼 그녀는 '누군가의 딸'로 표현된다. 이를 통해 감독은 2030 여성이 일상적으로 겪고 있는 현실의 공포를 영화 속에서 재현하는 것을 넘어서는 비전을 펼치려 한다. 크게는 현대 한국사회, 그리고 작게는 개별 가정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십 년에 걸친 가족 내 지형묘사와 그에 관련된 여성들의 미시적인 투쟁사를 구현해보자는 야심찬 도전인 셈이다.
 
사실 경아는 우리 주변에서 익숙하게 만날 수 있는 특정세대의 초상인 편이다. 우리 (조)부모님 혹은 친지 가운데 한둘은 있게 마련인, 본인의 희생으로 가족 공동체를 지탱해온 그런 존재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그렇게 헌신하고 희생하면서 간혹 '명예가부장'이 되어버린 그 세대는 이제 가족 내에서 영화 속 연수. 그리고 하나와 같은 젊은 세대가 극복하고 품어내야 할 대상이 되어간다. 그렇게 영화는 다층적인 구조와 세대 간 경계를 넘나드는 설정을 통해 2대 혹은 3대에 걸친 서사를 펼치려 도전한다.
 
3_온전히 완성되진 않은 서사 구축의 아쉬움
 
 영화 <경아의 딸> 스틸 이미지.

영화 <경아의 딸> 스틸 이미지. ⓒ (주)인디스토리

 
그 야심찬 시도의 결과물을 평가하기 위해 결국 감독이 자신과 동 세대의 목소리를 투영한 존재, 연수에게 비중이 기울어진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굳이 경아와 연수 두 모녀가 반드시 결말에서 화해와 치유로 달려가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런 유대관계는 극중 이야기 전개가 설득력을 갖춘다면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아의 딸>의 결말은 다소 도식적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척척 맞춤으로 필요한 장치들이 제때 맞춰 출현하는 느낌이다. 그리고 결국 주인공이 (제목에도 불구하고) 연수라는 점이 확정되는 마무리다. 혐의를 들자면, 경아와 하나에게 일어나는 후반의 변화들은 연수(와 또래세대) 시선에서 이상적인 방향으로 도출되는 방향에 가깝다. 어머니는 딸을 이해하고 제자는 스승의 조언을 신뢰하는 그런 그림이 펼쳐진다.
 
물론 적극적으로 어머니가 과거에 대한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주길 원하는 건 경아의 수난을 지금껏 전부 지켜봐온 연수로선 자연스러운 일일 테다. 하지만, 그 전개과정이 지나치게 딸의 시선에 최적화로 맞춰져 있다고 느껴지는 부분들이 툭툭 튀어나온다.
 
연수는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유일한 자기편이라 믿었던 경아에 대한 배신감이 컸던 게 사실이지만, 그녀가 경아에게 "늘 엄마 힘든 것만 생각했지? 나는 안 힘들었을 것 같아?"라고 외치는 장면은 지나치게 딸 세대의 입장에만 치우친 느낌이다. 하나와의 관계에서도 하나에게 독자적 인격과 개성이 느껴지기보다는 연수의 과거를 상기시키는 촉매 역할에 그치는 인상이 짙다.
 
좀 과하게 표현하자면 <경아의 딸> 속 이야기 구조는 연수가 처한 지옥 같은 상황을 스스로 헤쳐 나오는 과정에서 그 자신의 눈높이와 간격으로 편집되어 재구축된 세계에 가깝다. 이 영화 속 세계는 연수를 돕는 여성연대와, 연수의 입장에선 아쉬운 여성들로 나누어진다. 이 작품에서 개성이 부여된 캐릭터들 중 남성이 긍정적으로 묘사된 경우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연수가 극중 처한 상황에서 세상 어떤 남자를 온전히 신뢰할 수 있을까. 그래서 기계적으로 이 영화에서 긍정적 남성상이 없다는 걸 문제로 삼는 건 별 의미가 없어 보인다.
 
연수는 움츠러들고 방황하지만 결국 자신의 힘으로 생매장된 땅을 파헤치고 지하에서 탈출하는 데 성공하려는 존재다. 주변의 도움과 조언이 없진 않지만 연수는 그들 각자의 고민과 충고를 온전하게 수용하지는 않는다. 그저 시간이 필요할 따름이다. 연수가 아쉬워했던 부분들은 차례로 연수의 단호한 의지 앞에 하나씩 온전하진 않더라도 해소되어 간다. 엔딩 직전에 그녀가 횡단보도를 지나는 장면은 온전히 연수의 의지와 승리를 빛내는 이미지로 뇌리에 남는다. 아마 감독이 의도한 '결정적 찰나'가 있다면 바로 그 순간일 테다.
 
하지만 그런 극복의 장으로 나아가는데 주변에서 각기 다른 이들의 조력과 관심이 적잖게 더해졌다는 것을 그녀가 영화 끝날 때까지 온전히 소화했다고 보기엔 좀 더 여유가 필요해 보인다. 시간이 결국 해결해야 할 문제가 연수에겐 참 많은 셈이다. 어쩌면 영화 속 연수에게 고통과 부담의 서사가 집중되는 바람에 그렇게 비춰져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은근히 측‧후방에서 그녀를 염려해준 이들이 적지 않았는데 말이다.
 
4_배우들의 열연, 그리고 뜻밖의 효용 발견
 
 영화 <경아의 딸> 스틸 이미지.

영화 <경아의 딸> 스틸 이미지. ⓒ (주)인디스토리

 
영화는 지난 몇 년간 등장했던 사이버 성폭력 관련 현재 2030 여성들이 느끼는 불안과 피해의 총집합 편에 가까운 내용을 담아내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단편들의 한계, 짧은 분량 속에서 이야기를 정리하기 위해 사건의 충격과 그로 인한 피해자의 심리적 고통에 집중하는 연출방식은 소수에게 강렬한 체험을 선사하는 데엔 유효하지만 전통적 영화서사 문법에 익숙한 다수 대중에게 다가서기엔 한계가 존재했던 바, <경아의 딸>은 제대로 기승전결 서사를 구현해 보다 익숙하게 영화를 대할 수 있는 구조다.
 
하지만 감독이 여기에서 추가로 더 돌파하려던 부분은 100% 완성에 이르렀다고 보기엔 약간의 물음표가 남는다. 감독이 공들여 중층적 설정구조를 선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세대를 온전히 아우르기보다는 결국 감독 자신이 속한 세대가 바라보고 희구하는 시선으로 자꾸 돌아가려는 무의식이 자꾸 엿보이는 게 아쉬움을 더한다. 조금 더 세대를 아울러 각자의 입장을 온전히 영화 속에서 펼치는 여유가 담보되었더라면 보다 풍성한 감상이 가능했을 텐데 하는 그런 아쉬움이다. 하지만 이건 말 그대로 좀 더 나갈 수 있었는데 하는 그런 바람에 가깝다.
 
무엇보다 <경아의 딸>은 극중 하나가 감탄하고만 연수의 노트처럼, 잘 정리된 문제집 사례연습 필기를 닮은 작품이다. 작품 속에서 결정적으로 모녀의 삶에 파문을 던졌던 문제의 주요사건에 대해 참 꼼꼼하게 전개과정을 요약한 결과물이다. 지금까지 숱하게 등장한 n번방 부류의 사건들, 온라인 동영상 유포로 이뤄진 성폭력 문제 케이스 소재작품의 집대성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결과물이다.
 
'경아' 역을 맡아 우리가 늘 안타깝게 지켜봐온 우리 주변의 침묵해온 어머니 세대를 표상한 김정영 배우는 독립영화를 유심히 봐온 이들이라면 등장만으로도 신뢰치를 획득할 법한 캐스팅이다. 기간 영화, 드라마, 연극 등에서 종횡무진 활동 폭을 넓혀 왔지만 주연으로는 보기 힘들었던 하윤경 배우는 연수 역을 맡아 <경아의 딸>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관객의 뇌리에 새겨질 만한 활약을 보인다. 두 모녀의 극중 관계는 해피엔딩 드라마의 전형성과는 기묘하게 결이 다른데, 사건 이전에는 둘은 서로 의지하며 견뎌왔지만 그 대신에 차이를 봉합해뒀던 것에 가까웠다. 사건을 벗어나기 위해 둘은 고된 시련을 거치며 일단 확고한 분리 독립 후 화해의 여지를 남겨놓는 방식으로 관계를 재정립한다. 그래서 두 주역은 의외로 충돌에 초점이 맞춰지는 바, 주연배우들의 선 굵은 캐릭터를 둘 다 힘 있게 받아내는 조합이다.
 
여기에 주인공을 돕는 조언자 역으로 늘 인상 깊은 연기를 보여 온 최희진 배우의 동료교사 캐릭터, 의외의 지원군으로 자리매김하는, 지난해 영화제에서 큰 화제가 되었던 단편 <조에아>의 연기가 잊을 수 없었던 이채경 배우의 변호사 캐릭터, 그리고 경아가 진정 듣고 싶었던 단 한 마디를 들려주는 속 깊은 동생 미자 역 이지하 배우의 캐릭터도 모녀의 고생길을 응원하는 혁혁한 공로자들이다.
 
앞서 밝혔지만 이 영화에서는 남성 캐릭터들이 낄 데는 없다. 하지만 남성들의 역할은 스크린 안이 아니라 밖에 가득히 열려 있다. 한국남자들이 오롯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로 구축된 영화 속 시공간은 (이 영화가 배제한 듯 보이는) 한국남성들에게 온전히 보여져야 할 세계의 풍경일 테다. 한국남자들의 말초적 욕망과 자기중심적 행태가 상대방에게 어떻게 지우기 힘든 상처를 남기는지 실감이 안 되는 (그리고 못 하는) 이들에게는 필관영상으로 손색이 없다. 본 작품의 최대효용이 발휘되려면 직장과 학교와 군대 등에서 단체관람이나 시청각교육이 행해지는 게 가장 바람직한 정석 활용법일 테다.
 
<작품정보>

경아의 딸 Gyeong-ah's Daughter
2022|한국|드라마
2022.06.16. 개봉|119분|15세 관람가
감독 김정은
주연 김정영(경아 역), 하윤경(연수 역)
출연 임형태(운규 역), 이채경(상순 역), 이지하(미자 역), 최희진(민희 역),
김우겸(상현 역), 이세랑(숙현 역), 양흥주(근호 역), 양석희(가은 역), 박혜진(하나 역),
구자은(국선변호사 역), 김예지(변호사 사무실 직원 역)
특별출연 장준휘(학년부장 역), 전소현(부동산업자 역)
우정출연 박송열(컴퓨터 수리기사 역)
목소리 출연 정승오(디지털 장의사 업체 직원 역), 고경수(장난 전화 역)
PD 정승오
각본 김정은
촬영 임준택
음악 김지혜
엔딩곡 눈 오는 밤 (Vocal 하윤경)
제작 주마등필름
배급 (주)인디스토리
 
2022 제23회 전주국제영화제 한국경쟁 CGV아트하우스 배급지원상,
한국경쟁 왓챠가 주목한 장편상
2022 제27회 아이치국제여성영화제 개막작
2022 제10회 무주산골영화제 '창' 섹션 초청
2022 제4회 서울여성독립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
2022 제18회 인천여성영화제 초청
경아의 딸 김정은 감독 김정영 배우 하윤경 배우 주마등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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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사회복지영화제 프로그래머. 돈은 안되지만 즐거울 것 같거나 어쩌면 해야할 것 같은 일들을 이것저것 궁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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