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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에 거주하는 김찬영씨를 만난 것은 거주지 울산이 아닌 부산시청 근처였다. 그는 울산에 찾아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며 열차 연결이 비교적 잘 되어 있는 부산에서 만나자고 했다. 기자를 배려하는 마음이 고마웠다.

인터뷰에 김찬영씨 아내가 동행했다. 어딘지 모르게 안절부절 못하는 김찬영씨 모습을 보니, 아내는 남편의 과거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눈치였다. 아니나 다를까. 김씨가 납북되었다 돌아온 사실, 가혹행위 당하며 조사받은 사실 등을 이야기하자 놀란 토끼 눈을 하던 아내는 이내 테이블 건너에서 연신 눈물을 훔쳐야 했다.

반평생을 함께 해온 아내였지만, 남편은 그렇게 과거를 철저히 숨기며 살아왔던 것이다. 아내는 그런 남편이 한편으로 속상하고, 또 한편으로 자신을 수십 년간 속여왔다는 배신감에 눈물이 났다고 했다.

울산 현대중공업 조선 노동자로 20년 넘게 일하는 동안 경찰의 지속적인 감시 조사가 있었지만, 김찬영씨는 자신의 처지를 숨기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고 했다. 납북귀환어부라는 사실이 가족이나 회사 동료들에게도 자칫 큰 불똥이 튈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마친 김찬영씨는 올 때와는 다르게 아내의 손을 꼭 잡으며 돌아갔다. 그리고 기자에게 연신 '들어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북한 장전항으로 끌려간 선원들
 
1971년 고성 아야진 앞바다에서 오징어잡이 조업을 하다 납북된 뒤 1년여 만에 돌아온 승운호.
 1971년 고성 아야진 앞바다에서 오징어잡이 조업을 하다 납북된 뒤 1년여 만에 돌아온 승운호.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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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영씨가 태어난 곳은 강원도 양양군 현남면 남애리였다. 어릴 적 그곳에서 살다 아야진 초등학교 근처로 이사 가게 된 건 열여섯 살 때였다. 화전민 생활을 해야 할 정도로 어려운 가정환경 때문에 초등학교 시절에도 일 년에 몇 달씩 학교에 가지 못했다.

20리 넘는 산골을 걸어야 하는 통학길에 건너야 하는 큰 도랑만 다섯 군데나 되었다. 어떤 도랑은 수심이 깊어 옷을 벗고 건너야 할 지경이었다. 지독한 가난에 결국 김씨는 중학교도 마치지 못하고 학업을 중단해야 했다.

김씨가 승운호를 타게 된 것은 열아홉 살 때인 1971년이었다. 그 전에 친구들 따라 오징어잡이 배를 탄 적이 있어서, 배를 탈 때는 친구들과 함께 타고 싶었다. 그러나 뱃일에 쓸 개인 장비를 구하지 못해 친구들과 함께 승선하지 못했고, 결국 친구의 장비를 빌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승운호에 오르게 되었다.
 
"내 기억에 아야진에서 승운호를 타고 출발을 했어요. 첫날에 오징어 잡으러 나가면서 멀미를 많이 했어요. 나는 멀미를 심하게 해서 선실에도 못 들어가고 선장이 운전하는 기관실 앞에 쓰러져 있었어요. 지금도 배를 못 탈 정도로 배 멀미를 심하게 하니 뱃일을 했겠어요? 오징어 잡을 때도 오징어 그물을 걷어 올리는 손잡이를 돌리면서 계속 토했어요."

오징어 그물을 걷어 올리면서도 멀미는 계속되었다고 한다. 울릉도 부근 '대화퇴'라는 곳에서 밤새 작업을 했지만 멀미 때문에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조업이 시작되자 점점 더 안 좋아지는 날씨 탓에 작업은 원활히 진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비바람과 안개로 인해 귀항 결정이 내려졌다.
 
"아야진 쪽으로 출발한 지 한 2시간 정도 됐나. 갑자기 뭔 소리가 나서 보니까 큰 배가 나왔어요. 처음에 우리 함대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가까이 와서 보니 배 연통에 별이 그려져 있고, '김일성' 어쩌구 하는 글씨도 써 있더라고요. 그 배에 두세 시간 끌려갔어요."

북한 장전항으로 끌려간 선원들은 북한에서 13개월을 체류해야 했다. 김씨는 체류 기간(13개월)이 길어지면서 '못 나가고 이렇게 북한에 살게 되는 건가?' 체념도 했었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승운호 선원들은 똘똘 뭉쳐, 낙오자 없이 언젠가 남한으로 가자고 서로를 다독였다고 회상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북한지도원이 찾아와 모두 버스를 타라고 했다. 버스에 올라타니 북한지도원이 선원들을 모두 남한으로 보내 줄 거라고 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지만 북한지도원들의 보복이 두려워 기쁜 감정을 내색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속초항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날이 바로 1972년 9월 7일이었다.

고문으로 형편없어진 선원들의 모습

선원들은 속초시청 2층 대강당에 수용되었다. 강당에서 창밖으로 내다보니 밖에서 선원들 얼굴이라도 보려고 서성이고 있는 가족들이 보였다. 창 너머 밖에 있는 가족들을 보고 선원들은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경찰의 통제로 대화조차 해보지 못했다.

김씨 어머니도 아들 얼굴 한 번 보겠다고 궂은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매일 같이 와 계셨다고 한다. 아들 때문에 마음고생 많으셨던 어머니는 김찬영씨가 풀려나고 난 뒤 일 년 만에 돌아가셨다. 그 생각만 하면 지금도 너무 가슴이 아프다고 했다.

조사는 시청에 도착하고 난 다음 날부터 시작되었다. 수사관이 호명하면 한 사람씩 따라가 조사를 받는 식이었다. 임시조사실이었던 해동여인숙은 가운데 마당 양옆으로 방이 있었다. 선원들은 각 방에 한 명씩 들어갔고, 몇 차례 조사받는 동안 방은 계속 바뀌었다. 방 크기는 3~4명이 겨우 누울 정도로 작았다.

조사 첫날에는 수사관이 한 명 들어왔다. 김씨를 의자에 앉혀놓고는 '어떻게 잡혀갔다 오게 됐는지' 경위를 물었다고 한다. 첫날 조사는 그런대로 힘들지 않았다. 그런데 이튿날부터 수사관들의 태도가 바뀌더니 조사가 혹독해지기 시작했다.

조서 작성하는 사람 말고도 수사관 두 명이 더 들어왔다. 처음에는 다짜고짜 주먹으로 때리기 시작해 나중엔 방망이로 때렸다. 등이며 다리며 온몸을 사정없이 때리면서 북한에서 받은 지령을 자백하라고 강요하는 것이었다. 김찬영씨는 '아야진 파출소, 면사무소, 군청 등에 대해 물어 대답해 주었을 뿐이다'라고 했지만, 수사관은 '거짓말하지 말라', '다른 선원들은 지령을 받았다고 하는 데 왜 너만 안 받았다고 하느냐?'며 고문을 했다.
 
"결국 내가 아무것도 말을 하지 않고 자기들 뜻대로 되지 않으니 큰 대야에 물을 받아 놓고 머리를 물에 넣었다 뺐다 하면서 물고문을 하고, 또 하루는 주전자에 고춧가루를 타서 코하고 입에 붓더라고요. 마지막에는 자백을 하지 않으면 죽인다면서 손가락에 전기선을 꼽고 지지더라고요. 한 번씩 전기가 쫙쫙 오는데 죽겠더라고요."

수사관들은 가혹행위를 숨기기 위해 조사가 끝난 선원들을 밤에만 시청으로 옮겼다. 고문으로 형편없어진 선원들의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서였다.

생계를 위해 바다에 나간 것뿐이었는데

김씨 일행은 속초 시청에서 열흘 넘게 조사받고는 고성경찰서로 넘어갔다가 다시 속초경찰서 유치장에 구속되었다. 이후에 있었던 검찰 조사와 재판 과정이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선고 날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이라는 말은 정확히 기억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유치장에 함께 있던 일반 사범들이 '징역을 때리면 구속이고, 집행유예를 받으면 집으로 갈 수 있다'고 알려줘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재판 후 18개월 방위(1973년 입대)를 마치고, 몇 년 뒤인 1977년 외갓집이 있는 울산으로 내려갔다.
 
"울산에 1977년도에 내려왔는데 만약 멀미만 안 했으면 또 배를 탔을지도 몰라요, 울산에 내려와 현대중공업에서 자리를 구해 오랫동안 근무했어요. 36년을 근무했죠. 그렇게 오랫동안 일을 하면서도 노조에 한 번도 가입할 생각을 못 했어요. 노조에 가입하면 곧바로 내가 빨갱이로 몰릴 것이고, 노조도 나 때문에 와해될 게 뻔하니까요."

현대중공업에서 일하는 동안 경찰에 수시로 불려가야 했다고 한다. 울산경찰서에서 오라고 하면 회사에는 집안에 일이 있다고 핑계를 대며 월차를 냈고, 그렇게 정보과에서 조사를 받곤 했다고 한다. 그렇게 감시받는 삶을 약 20년간 살아야 했다고 한다.
 
"한 번은 나를 담당하는 형사들이 찾아왔는데 빈손으로 오기 뭐하니까 가져온다는 것이 울산경찰서 마크가 찍힌 밥주발 세트를 가지고 왔더라고. 그거 주면서 '회사에서 잘 지내냐'고 묻는데, 아, 진짜 기분 참 더럽더라고요."

경찰에서는 일 년에 한 번 납북귀환어부 대여섯 명을 불러 통영, 부산, 마산 등지로 안보 교육에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김씨는 회사에서 북한에 다녀온 사실을 모를 것이라 생각하지만, 김씨가 진급에서 계속 누락되는 것으로 보아, 의도적으로 승진 대상에서 누락시키는 것 같았다고 한다.

형사들이 회사에 수시로 찾아와 김씨에 대해 이것저것 묻고 다님에도 불구하고, 직원들이 자신에 대해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순진한 것일지도 모른다. 김씨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나쁜 말을 할까 정말 열심히 일했다고 한다. 술을 좋아했지만 아무리 취해도 어디에서도 납북과 관련된 이야기는 절대 꺼내지 않았다.

인터뷰 말미에 김씨는 생계를 위해 바다에 나간 것뿐이었는데, 그게 무슨 죄라고 사람을 그토록 잔인하게 다루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언젠가 TV에서 고문받는 장면을 보고 펑펑 울었다고 한다. 자식들에게는 아직까지 납북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내 본 적이 없지만, 진실이 밝혀지고 국가로부터 사과받고 나면 당당하게 잘못된 역사에 대해 말해주고 싶은 것이 마지막 소망이라고 했다.

태그:#평화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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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가는 세상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서 활동합니다. 억울한 이들을 돕기 위해 활동하는 'Fighting chance'라고 하는 공익법률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문두드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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