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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어수선하여 다시 책 한 권을 빼들었다. 신영복 선생의 <변방을 찾아서>다. 지리와 문화, 역사적으로 설정한 내 마음 속 변방을 찾아 다시 '부끄러운 탈주 여행'을 해 볼 참이다. 2014년의 옛담여행, 2017년 굴뚝여행에 이은 세 번째 테마여행이다.

이번에는 꽃담여행이다. 변방과 꽃담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중심부 궁궐에 집중된 꽃담은 아이러니하게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에 산재한다. 변방을 향한 내 꽃담여행은 탈신도주다. 희망, 희열이 거기에 있다.

비주류로 살면서 늘 꿈틀대는 민중과 변방이 배출한 인물을 더듬으며 그곳에 어렵게 피어난 꽃담을 하나둘 찾다보면 몇 년 후 중심부에 있는 궁궐의 꽃담이나 근현대 꽃담도 마음 편히 찾을 날이 올 것이다.

꽃담Ⅰ

우리말에 '치레', '치레하다'라는 말이 있다. 잘 손질하여 모양을 내거나 실속 이상으로 꾸며 드러낸다는 뜻이다. 꽃담만큼 치레와 잘 어울리는 말이 없다. 꽃담은 순 우리말로 '치레한 담'을 말한다. 여러 가지 무늬를 넣어 모양을 내거나 꾸미어 드러내고 대접하고 베푸는 담이다. 이름만 담일 뿐, 꽃담을 연출하는 곳은 담은 물론 벽, 합각, 고막이, 굴뚝을 가리지 않는다.
  
꽃담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꽃담이 아닌가 싶다. 당대 제일가는 엘리트 미장이, 벽돌공, 화원이 공동 참여하여 기교를 부리고 공들여 만든 궁궐의 꽃담이다.(2009년 9월 촬영)
▲ 낙선재 후원 꽃담 꽃담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화려한 꽃담이 아닌가 싶다. 당대 제일가는 엘리트 미장이, 벽돌공, 화원이 공동 참여하여 기교를 부리고 공들여 만든 궁궐의 꽃담이다.(2009년 9월 촬영)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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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둥사이를 가로지르는 하인방 아래쪽 터진 부분을 고막이라 한다. 색깔이 다른 큼직한 막돌과 흙으로 밑 부분을 다져쌓고 그 위는 와편으로 줄무늬를 내 예쁘게 치장하였다.(2022년 5월 촬영)
▲ 괴산 송병일고택 고막이 기둥사이를 가로지르는 하인방 아래쪽 터진 부분을 고막이라 한다. 색깔이 다른 큼직한 막돌과 흙으로 밑 부분을 다져쌓고 그 위는 와편으로 줄무늬를 내 예쁘게 치장하였다.(2022년 5월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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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가지 무늬는 문자, 그림, 식물, 동물, 기하학, 형상, 추상무늬로 이를 통해 장수와 길상, 벽사의 의미를 표현한다. 꽃담을 그림이나 무늬를 강조하여 그림담 혹은 무늬담이라 하거나 화담, 화초담, 화문담이라 부르는 것은 여기서 나온 것이다. 문헌에는 회면벽, 회벽화장, 화문장, 영롱장이라 기록되어 있다. 대개 궁궐의 꽃담이 여기에 해당된다.

이런 말은 우리 꽃담의 개념을 폭넓게 담아내지 못한다. 이는 꽃(花)을 강조한 나머지 꽃무늬로 치레한 담만을 연상시키고 표현기법을 한정하는 한계를 갖고 있다. 토담에 와편을 꾹 찔러 넣어 질박한 무늬를 낸 흙담, 수키와와 암키와를 적절히 혼합하여 무늬를 낸 와편담, 작은 돌만으로 무늬를 낸 돌담, 기와나 돌로 빗살무늬를 낸 흙돌담까지 모두 꽃담이라 한다.
  
흙 한 켜, 와편 한 켜 짓이겨 쌓아 줄무늬를 낸 꽃담이다. 줄무늬를 따라가면 자연에 닿는다. 이 담과 앞 담이 만들어 낸 공간은 인공공간에서 벗어나 자연을 만나기 직전 긴 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는 전이공간이다.(2019년 11월 좔영)
▲ 경주 독락당 와편담 흙 한 켜, 와편 한 켜 짓이겨 쌓아 줄무늬를 낸 꽃담이다. 줄무늬를 따라가면 자연에 닿는다. 이 담과 앞 담이 만들어 낸 공간은 인공공간에서 벗어나 자연을 만나기 직전 긴 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는 전이공간이다.(2019년 11월 좔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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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먹돌을 층마다 가지런히 쌓아 올린 후 면회하여 물방울무늬를 낸 돌담 꽃담이다. 물방울무늬는 동글동글한 물방울의 모양을 본떠서 늘어놓은 무늬를 말한다. (2006년 8월 촬영)
▲ 해남 대흥사 화방담  주먹돌을 층마다 가지런히 쌓아 올린 후 면회하여 물방울무늬를 낸 돌담 꽃담이다. 물방울무늬는 동글동글한 물방울의 모양을 본떠서 늘어놓은 무늬를 말한다. (2006년 8월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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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돌로 '+'자 무늬를 낸 영롱담과 자연과 교감하고 자연의 조각을 관조하려고 살창을 낸 경주 독락당의 담처럼 담을 쌓거나 채우지 않고 비움으로써 꽃담을 연출하기도 한다. 비움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얻는다. 상호관입, 공간의 침투다. 담의 실질적 기능이 방어, 분할, 경계라면 실속 기능에 더해 침투로 확장된 것이다.

이웃과 소통하려고 우물가 담에 구멍을 낸 보성 이진래고택의 구멍담, 이웃에게 음식을 내주던 고성 학동마을의 구멍담은 집주인의 착한 심성이 움직여 만든 아름다운 꽃담이다.

신혼부부가 첫날밤에 자는 잠을 아름다운 우리말로 꽃잠이라 한다. 꽃잠은 꽃과 잠이 합성되어 전혀 다른 아름다운 우리말이 된다. 마찬가지로 꽃담은 화담, 무늬담, 회면벽 같은 전통 꽃담 개념에서 주객이 꽃담에 대해 갖는 미의식에 따라 그 의미가 확장될 수 있다.

꽃담 Ⅱ- 꽃담의 미

담으로 생긴 공간을 소우주로 여기며 공간을 치레하려는 인간의 욕구는 심미적 본능에서 출발한다. 미적취향, 심미적 감수성, 미의식을 바탕으로 시작도 끝도 없는 무시무종의 세계, 사시사철 시들지 않고 병들어 죽지 않는 불멸의 공간을 꾸미려 한다. 꽃담은 한 수단이다.

꽃담은 집주인이 주체가 되어 자신의 내면을 그려낸 담이다. 집주인의 감정이 이입된 것이고 자신들의 의지나 바람을 담아 꾸민 것이다. 마을담은 바깥담으로 정제된 담이라면 꽃담은 안담으로 집주인의 개성이 드러난 담이다.

자연의 풍경을 그대로 인차(引借)한 것이 차경(借景)이라면 꽃담은 자경(自景)이다. 집주인 스스로 만들어낸 풍경요소요, 미의식의 세계다.
 
마당을 지나 중문에서 바로 안채로 가기 전에 마주하는 완충 공간에 집주인은 화단을 조성하고 꽃담을 쌓아 사랑스런 공간으로 만들었다. 안채를 이용하는 여성을 대접하는 동시에 객은 여기서 안채로 들어가기 전에 미적체험을 하게 된다.(2022년 5월 촬영)
▲ 괴산 김항묵고택 꽃담 마당을 지나 중문에서 바로 안채로 가기 전에 마주하는 완충 공간에 집주인은 화단을 조성하고 꽃담을 쌓아 사랑스런 공간으로 만들었다. 안채를 이용하는 여성을 대접하는 동시에 객은 여기서 안채로 들어가기 전에 미적체험을 하게 된다.(2022년 5월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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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미적 본능은 정치, 경제, 문화적 이유로 억제되고 절제된다. 무엇보다 유교를 기본으로 하는 한옥의 조형원리에 따라 이웃과 호흡을 같이하며 꽃담은 절제된다. 이래서 조선의 꽃담은 치레한 담이지만 제약에서 오는 결핍미와 질박미가 있다. 번잡하지 않으며 질리거나 잡스럽지 않다. 한국미의 보편적 특징인 소박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사랑채 누마루의 기단부는 막돌허튼층쌓기로 쌓고 윗부분은 흙과 기와를 이용해 사람이 웃는 모양을 연출하였다. 서투르고 엉성하여 질박하다. 솜씨를 자제한 결과다. 유교 중심부 봉화에 있는 오래된 마을의 꽃담이나 이 정도는 용인된다.(2017년 11월 촬영)
▲ 봉화 계서당 꽃담 사랑채 누마루의 기단부는 막돌허튼층쌓기로 쌓고 윗부분은 흙과 기와를 이용해 사람이 웃는 모양을 연출하였다. 서투르고 엉성하여 질박하다. 솜씨를 자제한 결과다. 유교 중심부 봉화에 있는 오래된 마을의 꽃담이나 이 정도는 용인된다.(2017년 11월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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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놓고 드러내거나 과시하지 않는 우리의 겸손한 천성이 꽃담에 담겼다. 꽃담이라도 집주인의 선한 마음씨가 전제되지 않으면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다. 꽃담을 찾아 변방의 민가를 둘러보지만 집주인과 그 선조의 행적을 더듬어봐야 할 까닭이다. 행적이 더럽고 선하지 못하면 아무리 담 치레를 해본들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다. 꽃담의 이름값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변방의 꽃담Ⅰ- 민가 살림집 꽃담

안동과 안동을 축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있는 오래된 마을의 고건축에서 의미 있는 오래된 꽃담은 예상 외로 많이 발견되지 않는다. 이들 지역은 유교문화가 짙게 밴 고을로 마을공동체의 철학, 규범과 사상, 역사, 이웃 간 눈치에 의해 제한, 제어되어 꽃담보다는 수더분하고 소박한 전통 담이 많다. 이는 꽃담이 변방성을 띠는 이유이기도 하다.

안동과 안동 주변의 고을이 유교문화의 중심부로 볼 때 유교변방으로 인식되고 있는 충북 괴산과 전북 장수, 임실, 고창, 정읍, 익산에 꽃담이 많이 분포한다는 점은 눈여겨볼 만하다. 이밖에 경기 남양주, 충남 예산, 홍성, 보령, 논산, 전남 영광, 경북 봉화, 달성, 청도에서 산발적으로 발견된다. 이들 모두 마을이 짜임새 있게 들어서지 않은 곳이다.

변방의 꽃담 Ⅱ- 산사와 은거정원의 꽃담

절집의 경우 신라와 고려 때 변방에 불과한 산사(山寺)에 집중된다. 산사는 불교사적으로 비주류의 담론이 지배하는 변방이다. 산사에 집중된 것은 주류인 도시사찰이 사라지고 비주류의 산사만 남게 된 결과이므로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산사가 주류의 절집으로 돼버린 것이다.

조선시대 절집은 민가와 마찬가지로 꽃담을 쌓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어차피 선가(禪家)의 건축은 비움과 버림이라 하였으니 애시 당초 화려한 꽃담은 기대하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전남 해남의 대흥사, 순천 송광사, 강원 양양 낙산사, 경남 하동 쌍계사, 합천 해인사, 충남 개심사, 충북 보은 법주사, 강화도 전등사의 꽃담이 오래전부터 내려온 꽃담으로 볼 만하다.
  
궁궐의 꽃담요소 외의 민가의 꽃담 요소를 모두 볼 수 있다. 우락부락한 괴석위에 쌓은 나긋나긋한 토담이 인상적이다. 토담에는 와편으로 글자를 새기고 빗살무늬, 동그라미, 마름모꼴을 그려놓았다. (2021년 3월 촬영)
▲ 하동 쌍계사 꽃담  궁궐의 꽃담요소 외의 민가의 꽃담 요소를 모두 볼 수 있다. 우락부락한 괴석위에 쌓은 나긋나긋한 토담이 인상적이다. 토담에는 와편으로 글자를 새기고 빗살무늬, 동그라미, 마름모꼴을 그려놓았다. (2021년 3월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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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쇄원 동쪽 양지바른 담을 애양단이라 이름 붙여 돌에 새겨 놓았다. 이름을 붙이는 것은 애정을 듬뿍 쏟아 죽어 있는 대상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다. (2021년 9월 촬영)
▲ 담양 소쇄원 꽃담 소쇄원 동쪽 양지바른 담을 애양단이라 이름 붙여 돌에 새겨 놓았다. 이름을 붙이는 것은 애정을 듬뿍 쏟아 죽어 있는 대상에 생명을 불어넣는 것이다. (2021년 9월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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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거하기 위해 조영한 별서정원과 누정 또한 변방의 꽃담 중의 하나다. 전남 담양 소쇄원과 경북 경주 독락당은 당대의 주류에 반대하거나 주류정치에 환멸을 느껴 조성한 대표적 은거정원이고 경북 상주 대산루는 은거한 선조의 뜻을 받아 후손이 경영한 누정이다. 모두 주류담론이 지배하는 중심부에서 먼 곳 변방에 있다. 변방에서 희미한 꽃담 향을 피어내고 있다.

근대 이후 꽃담 - 변방성의 완화

일제강점기 이후 궁궐의 화려한 꽃담이 일반 살림집에서 나타난다. 신흥 부호가 나타나고 건축의 제약이 느슨해지면서 장인의 손을 빌린 엘리트 요소가 가미된 화려한 꽃담이 나타난다. 중심부나 변방을 가리지 않고 눈치, 제약에서 벗어나기 시작한다. 꽃담의 변방성이 사라지기 시작한 근대 이후의 꽃담을 변방의 꽃담과 별도로 살펴보려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시멘트 블록에 시멘트모르타르 표면을 만들고 그 위에 기하학적 무늬, 글자(충신), 동물(학), 모란 같은 화초문양을 표현하였다. 다양한 색상, 부조와 투조기법이 사용된 1929년 이후의 화려한 꽃담이다.(2014년 6월 촬영)
▲ 화가 이상범 가옥 꽃담  시멘트 블록에 시멘트모르타르 표면을 만들고 그 위에 기하학적 무늬, 글자(충신), 동물(학), 모란 같은 화초문양을 표현하였다. 다양한 색상, 부조와 투조기법이 사용된 1929년 이후의 화려한 꽃담이다.(2014년 6월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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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체부동 성결교회, 필운동 홍건익가옥, 누하동 이상범가옥(이하 서촌), 가회동 백인제가옥(북촌), 성북동 이종석별장, 강화 온수리성공회성당, 전주 최부자댁과 전동성당, 익산 김안균가옥과 조해영가옥, 곡성 영류재는 근대 이후에 나타난 꽃담들이다. 박꽃같이 순박한 변방의 꽃담 몽우리는 근대 이후 궁궐의 주변부를 에워싸며 화려한 색채의 꽃담으로 만개한다.

태그:#꽃담, #궁궐꽃담, #옛집꽃담, #은거정원꽃담, #절집꽃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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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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