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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기씨의 거주지는 전남 보성이다. 전남 장흥군 강산면 고마리에서 태어나 자라다 여덟 살 무렵 가족과 함께 고모가 계시는 강원도 고성 아야진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바닷가 마을에서는 배를 타는 것 외에 별다른 일거리가 없었다. 배를 타고 나가는 아버지를 어렸을 때부터 쫓아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업이 되었다.

대부분 강원지역에 거주하는 납북귀환어부 피해자들을 인터뷰하다 보니 이정기씨와 같은 호남 억양의 인터뷰는 낯설었다. 이정기씨의 아내는 그가 납북 귀환될 때 승선한 선박 승운호 선주의 딸이었다. 청년 시절 승운호 선주의 딸과 결혼하게 되어 승운호를 타게 되었고 주변에서의 요청으로 사무장까지 맡게 되었다.

납북귀환어부피해자 모임이 열릴 때면 그는 늘 전남 보성에서 강원도까지 긴 여정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온다. 이정기씨의 납북귀환피해도 피해지만, 장인어른의 소유였던 승운호가 납북된 뒤 소위 '적성물자'로 취급되어 압수되었다. 결국 정박된 배는 망가졌고 그로 인해 승운호는 폐선되었다고 한다.
   
"배가 무슨 잘못이 있소. 배야 사람이 모는 대로 가는 것인데 그 배를 왜 잡아두냐고요. 사람이 빨갱이면 배도 빨갱이냐고요."
 
당국에서 승운호 선박을 압수 보관했다는 지시문서. 실제 이 선박은 수개월 동안 운항되지 않아 운항이 불가능한 상태로 폐선되었다고 한다.
 당국에서 승운호 선박을 압수 보관했다는 지시문서. 실제 이 선박은 수개월 동안 운항되지 않아 운항이 불가능한 상태로 폐선되었다고 한다.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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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운호가 납북되던 날

1971년 여름, 오징어가 근해에서 잘 잡히지 않아 먼 바다로 나가곤 했다. 먼 바다로 나가더라도 특별한 장비 없이 오직 나침반에 의지해 운항했고, 그 외의 특별한 장비는 갖추지 못했다. 이정기씨가 탔던 승운호뿐만 아니라 당시 대부분의 어선들의 사정이 그러했다. 승운호가 납북되던 날도 마찬가지였다.
 
"오징어 작업하는 날 비가 촉촉하니 왔어요. 이틀째 조업을 마치고 속초로 돌아오는데 선장이 심심할까 해서 내가 조타실에서 선장이랑 말동무하면서 있는데 저 멀리서 배 한 척이 엄청난 속도로 다가와서는 우리 배에 딱 붙더라고요. 그러더니 배를 정지시키라고 해요. 선장이 배를 정지시키고 배 시동 끄자, 북한군들 하는 말이 승운호를 버리고 자기들 배로 올라타라는 거예요. 딱 보니 북한 경비정인데 누가 그 배를 타겠어요.

아무도 경비정에 안 타고 서 있으니까 북한군들이 우리 배에 올라와서 줄을 걸고 한 30분 정도 우리 배를 끌고 갔어요. 그리고 갑자기 배를 세우더니 총을 3방을 쏘더라고요.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납치된 곳이 북한 해역이었다면 구태여 우리 배를 30분이나 끌고 가서 총을 쏘겠어요? 만약 우리 배 옆에 한국 경비정, 함대가 있었다면 우리가 구태여 납치될 필요도 없었을 것 아닙니까. 승운호는 군사분계선도 안 넘었을 뿐 아니라 어로한계선 근처에도 안 갔어요. 그런데 이북 경비정이 남한으로 와서 의도적으로 납치해 간 것이죠."

당시 이정기씨의 아내는 만삭의 몸으로, 이씨가 끌려간 그달이 산달이었다. 이씨는 몇 해 전 북에 납치되어 끌려간 복덕이란 친구가 돌아오지 못한 것이 생각났다. 만삭의 아내와 부모를 두고 북에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무섭고 답답했다. 끌려가는 내내 이씨는 브리지(조타실)에서 바다로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수도 없이 들었다고 했다.

북한에 도착한 선원들은 모두 군부대 같은 곳에 갇혔다. 식사가 제공되었지만 목으로 넘어가지 않았다. 함께 끌려간 누구도 쉽게 숟가락을 들지 못했다. 그렇게 하룻저녁을 자고 금강산으로 이동해 그곳에서 보름 정도 머물렀는데, 그곳 북한 사람들로부터 '여기는 지상낙원이다. 남반부 동포들은 헐벗고 굶주리지만 북반부는 지상낙원이다'라는 선전을 들었다고 한다.

견학이라며 여기저기 다녔지만, 조국이 그립고 가족이 그리워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고향 생각을 하거나 고향 노래를 부르기라도 하면 반성문과 자아비판이 뒤따랐지만, 그럴 때마다 마음은 늘 남한으로 돌아갈 생각밖에 나지 않았다.

북한에서 13개월 억류되어 있는 동안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 곳은 평양 근교였다. 이정기씨는 그곳에서 기억나는 일이 하나 있다고 했다. 하루는 선원을 관리하는 '안전원'이 잠시 자리를 비우자 선원을 태워주던 버스 운전기사가 '여기는 남조선하고 다르니 현혹되지 말고 한 사람도 빠짐없이 데리고 나가라'고 알려주었다고 한다. 이씨를 비롯해 선원들은 그 운전기사의 말이 너무도 고마웠다고 했다.

납북될 당시 승운호 선원들은 대부분 열여섯, 열일곱, 열여덟 살로 비교적 어렸다. 그날 이후 남한으로 보내준다고만 하면 이 아이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데리고 나가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선원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또 다른 고통
 
1971년 고성 아야진 앞바다에서 오징어잡이 조업을 하다 납북된 뒤 1년여 만에 돌아온 승운호.
 1971년 고성 아야진 앞바다에서 오징어잡이 조업을 하다 납북된 뒤 1년여 만에 돌아온 승운호.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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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자 납북 선원 모두를 남한으로 보내준다는 말이 들렸다. 너무 기뻐 안전원 모르게 모두 얼싸안고 울었다. 그리고 마침내 귀환 날이 정해지자 선장, 기관장, 이정기씨는 선원 아이들을 모아놓고 '여기서 한 사람도 낙오되면 안 된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여기에서 나가자. 여기는 지상낙원이 아니라 지옥이다. 꼭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국 승운호 선원 모두는 그렇게 그립고 그립던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선원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또 다른 고통이었다.

고향에 돌아왔으나 집으로 가는 건 고사하고 가족들조차 만날 수 없었다. 남한으로 돌아온 백여 명의 납북선원들은 바로 속초시청으로 끌려가 지내며 해동여인숙에서 조사받았다. 말만 '조사'였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과 고문이 자행된 '치욕'과 '고통'의 시간이었다. 고문의 주된 내용은 '특별지령'을 자백하라는 것이었다.

각목으로 하도 맞아 피가 줄줄 흐르고 맞은 자리가 너무 아파 누워 잘 수도 없었다. 어떤 날은 무릎을 꿇게 한 후 구둣발로 허벅지를 무자비하게 밟았다. 물고문을 받을 때는 네 사람이 들어와 양쪽 팔과 다리를 붙들고 수건을 얼굴에 씌운 후 큰 주전자의 물을 부었다. 물고문 한 번에 한 되짜리 보다 조금 더 큰 주전자 두 개 정도의 물을 썼다.

심지어 짬뽕을 시켜주면서 국물은 남기고 건더기만 먹으라 하고는, 나중에 물고문을 할 때 물 대신 짬뽕 국물을 사용했다. 전기고문을 할 때는 의자에 앉혀놓고 묶은 다음 손에 전깃줄을 걸고는 군용전화기를 돌렸다. 몇 번이나 까부라졌는지 모른다. 전기를 세게 넣었다가 약하게 넣어다가 하면서 최대치의 고통을 느끼게 했다. 이 방 저 방에서 고문받는 소리, 악쓰는 소리에 귀가 아플 정도였다.
 
"(경찰) 조사를 약 10일 정도 받았는데 그때까지 북한에서 올 때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어요. 피가 나가지고 팬티가 살하고 붙어서 떼지도 못할 정도예요. 속초 유치장에 갔을 때 맞아서 귀에서 계속 물이 나오고 농이 나오니까 간수가 솜을 주더라고요. 사회에 나와서 치료를 했는데도 결국 왼쪽 귀는 거의 안 들렸어요. 물고문 받을 때 고막이 터졌던 모양이에요.

검찰에서는 고문 같은 것은 없었지만, 억압적으로 '너 이 새끼, 경찰에서 한 것 사실이지'하고 물어봐요. 그래서 허위 진술을 하게 될 수 밖에 없었어요. 그래야만 고문도 안 당하고 경찰로 다시 안 끌려갈 것 같아서요. 사실 경찰에서 처음 조사할 때 북한에서 우리에게 했던 말이나 우리가 북한 사람들에게 했던 말을 전부 해줬었어요."

그렇게 이정기씨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먹고 살기 위해 오징어잡이를 나갔던 선원은 모진 고문에 범죄자가 되었고 '고문피해자'인 이정기씨에게 국가는 사과는커녕 명예회복을 위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있다. 너무도 억울하게 감옥에서 풀려났지만 치욕스런 마음에 아내에게조차 사실대로 말하지 못했다. 다행히 김대중 대통령 시절 '반공법, 국가보안법' 위반자들에게 사면복권이 이뤄지면서 비로소 가족들에게 말할 수 있었다.

진실이 규명되어야 제대로 된 사회
 
"내가 감시 대상이 되다 보니까 전라도 보성으로 이사 갔을 때도 이사 간 지 일주일도 못됐는데 보성경찰서 정보과에서 임 형사라는 사람이 찾아왔더라고요. 형사 둘이 찾아와서 다짜고짜 '갑시다' 해요. 그래서 그냥 끌려갔어요. 보성경찰서 가서도 일문일답식으로 조사를 받았어요. 납북귀환 과정에 대해 죽 물어보더라고요.

그런 식으로 2010년도까지 저를 감시하더라고요. 수시로 감시를 하고 제가 이동할 때마다 조사하고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고 경찰서로 오라하고도 그래요. 그러니 사회생활이 당연히 안 되지요. 정보과 사람들이 왔다 갔다 하니까 제가 납북되었던 사실도 몰랐던 친구들이나 지인들도 납북 사실을 알게 되더라고요, 그런 뒤로는 나하고 거리를 두고 생활하게 되는 거죠. 

우리 자식들은 시험을 봐도 면접에서 안 되고 탈락하니까 아이들도 취업을 포기하고 스스로 장사를 했어요. 딸 하나가 공무원 시험을 치르러 가서 필기에 합격했는데 면접에서 탈락했다는 거예요. 나중에 왜 탈락했냐고 물어보니까 '아버지 이북 넘어갔다 온 것이 신원조회에 떠 가지고 탈락됐어요'라고 말하더라고요. 부모로서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돌이켜보면 납북 어부들, 특히 나이 어린 선원들은 인생을 시작도 해보지 못하고 꺾인 꽃과 같았다. 이 얼마나 불쌍한 일인가. 단지 먹고 살고 살기 위해 목숨 걸고 바다에 나간 사람들을 모진 고문으로 간첩이니 빨갱이로 만들어 본인뿐만 아니라 가족과 주변 사람들까지도 인생을 망가뜨린 걸 생각하면, 이런 것들의 진실이 규명되어야 제대로 된 사회가 아니겠는가? 이정기씨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절규했다.
 
"사실상 우리 납북어민들 진짜 불쌍한 사람들이에요. 생계유지를 위해서 목숨을 걸고 바다에 나간 사람들인데, 무슨 죄가 있습니까.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승운호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어업에 종사하는 분들, 또 납북되어서 다녀오신 분들 진짜 국가보안법, 반공법 위반은 위반이 아닙니다.

벌어 먹고 살겠다고 북한 놈들에게 납치되었는데 그게 무슨 죄 위반입니까. 우리를 모진 고문을 시켜서 죄를 뒤집어씌운 거 아닙니까. 특히 나이 어린 선원들 어디 직장 하나 들어가지도 못하고, 공무원 시험을 봐도 탈락을 하는 과정을 볼 때 국가보안법, 반공법이 철페한다고 할 때 박수쳤어요. 우리 진상규명이 되어야 가족이나 자식들이 똑바른 사회생활을 할 수 있지 않겠어요."

태그:#평화박물관, #승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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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가는 세상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서 활동합니다. 억울한 이들을 돕기 위해 활동하는 'Fighting chance'라고 하는 공익법률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문두드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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