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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등령에서 바라본 설악, 운무에 산은 섬이 되고
 마등령에서 바라본 설악, 운무에 산은 섬이 되고
ⓒ 박병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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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나는 누구일까? 조금은 오래된 사건이다. 지난 7월 7일, 고딩 친구와 설악산 공룡 능선에 올랐다. 설악산 노선을 거의 다 탔지만, 유일하게 남겨 놓은 공룡을 닮은 능선! 친구와 나는 치밀하게 계획을 세웠다. 체력 훈련은 기본이었다. 여러 산에 다니며 모의고사를 치렀다. 하필이면 장마가 심한 때였다. 오전에는 흐림, 오후엔 비가 예보되어 있었다.

우비 두 개를 챙겼다. 우비마다 차이가 있어 어떤 우비는 비가 샌다고 했다. 겹으로 입으면 비가 샐 리 없다고 믿었다. 더구나 카메라와 렌즈를 달고 가니 귀중한 자산을 보호해야 했다. 기록으로 남길 SD 카드에 물이라도 들어간다면 낭패 중의 낭패일 터였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주먹밥과 유부초밥을 만들었다. 우리는 들떠 있었다. 
 
설악과 운무가 만나 선경을 만들고
 설악과 운무가 만나 선경을 만들고
ⓒ 박병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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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서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 찰나에 뭔가 쿵!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층을 표시하는 곳에선 이상한 글자가 아른거리고 우린 3층 반쯤에서 갇히고 말았다.

비상벨을 누르고 숙소 관계자와 소통했다. 그런 와중에도 119를 부르지 않았다. 내가 머문 숙소에 폐를 끼칠까 두려웠다. 당일치기 산행이므로 새벽같이 나왔는데, 엘리베이터에 갇혔으니 식은땀이 절로 났다. 나는 인생 마지막인 듯 친구 힘을 빌려 영상을 촬영했다. 휴, 영화 한 편 찍은 느낌이었다.

준비는 철저했으나, 새벽 출발부터 혼란스러웠다. 마음을 다스리며 소공원에서 비선대까지 급하게 걸었다. 엘리베이터 사건으로 시간이 지체됐기 때문이었다. 비선대 철창문을 지나 금강굴 쪽으로 들어섰다. 가파른 돌길, 숨이 찼지만 공룡 능선 생각에 여전히 들떠 있었다.
   
비 예보가 있었지만 강행하기를 잘했다. 비는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고, 풍경은 보물처럼 눈에 박혔다.
 비 예보가 있었지만 강행하기를 잘했다. 비는 한 방울도 내리지 않았고, 풍경은 보물처럼 눈에 박혔다.
ⓒ 박병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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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등령에 다다르기 전, 우리는 숨을 몰아쉬었다. 이 구간이 주는 특유의 매력은 '노력하면 다 된다'였다. 가장 힘든 구간이었다. 거의 끝자락에 올라 보니, 능선 옆으로 펼쳐진 산 구름이 선경 그 자체로 감탄사만 연발케 했다. 섬인 듯, 산인 듯, 구름에 가린 신비의 세계에 할 말을 잃었다. 연속 셔터를 누르며 내 존재를 토닥였다. 오를 때 그토록 안개 자욱하더니, 올라오니 장관이었다. 감탄 감동을 융합하며 힘차게 걸었다. 삼대가 덕을 쌓았으리라 믿었다.

공룡 능선 초입부터 야생화에 빠진 친구는 에델바이스로 유명한 '산솜다리'에 핸드폰을 들이댔다. 덩달아 설렌 나도 셔터를 눌렀다. 저토록 큰 바위에서 그 틈새에서 그토록 오랜 세월 번식을 하며 꽃쟁이들을 흥분케 하다니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고교 시절 수학여행 중에 액자에 담긴 에델바이스를 사온 적이 있었다. 바로 '산솜다리'였다.
 고교 시절 수학여행 중에 액자에 담긴 에델바이스를 사온 적이 있었다. 바로 "산솜다리"였다.
ⓒ 박병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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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야생화 멘토인 친구는 발걸음이 빨랐다. 친구는 이미 공룡 능선을 한번 타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공룡 능선이 운무에 가려 진면목을 보지 못했다. 풍광을 새롭게 본 친구에게 "지난 산행은 무효지? 이번이 진짜야. 내가 산 복이 좀 있거든!"이라고 말하자 격하게 공감했다.

돌아보면 산행마다 축복이었다. 덕유산, 지리산, 소백산, 오대산, 한라산 등 내가 갔던 모든 산이 함께 했던 우리를 안아 주었다.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본다는 일출을 단박에 보았다. 10년 넘게 지리산, 설악산을 다녀도 일출을 보지 못했다는 산꾼의 푸념이 이상야릇했다. 갈 때마다 축복이었고 산 복이 가득했다. 언젠가는 나도 산의 매 발톱에 고생할 날 있으리니 자만을 경계하고 무조건 준비를 철저히 하리라. 

전문가용 카메라를 멘 내게 경북 안동에서 왔다는 분들이 촬영을 제안했다. 전화번호를 받아 이틀 만에 사진을 보내 주었다. 인생 사진이라며 좋아했다. 풍광에 취하고 야생화에 반하며 정신이 없을 때였지만 거절 못하는 성격에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 이 또한 다음 산행 때 더 좋은 풍광과 만나게 하는 덕이라고 믿어 그냥 좋았다. 
    
설악산에만 서식한다는 희귀 식물, '연잎꿩의다리'
 설악산에만 서식한다는 희귀 식물, "연잎꿩의다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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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체꽃(구름체꽃)의 미소
 솔체꽃(구름체꽃)의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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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솜다리, 연잎꿩의다리, 솔체꽃(구름체꽃), 금마타리, 산꿩의다리, 꿩의다리, 동자꽃, 등대시호, 은분취, 함박꽃나무, 노루오줌, 숙은노루오줌, 병조희풀, 바람꽃, 솔나리 꽃봉오리... 나의 야생화 멘토 친구의 안내에 따라 과분한 야생화를 영접했다. 산 복과 꽃 복이 더해 산행 내내 감탄을 연발했다. 

전국 곳곳에 야생화가 산다. 그만큼 지역마다 꽃쟁이들도 많다. 야생화에 빠진 꽃쟁이들은 계절마다 분주하고 꽃 지도를 그려낸다. 낮아서 아름다운 야생화는 들여다볼수록 정교하고 신비하다. 좋은 사진을 촬영하려면 내가 눕거나 엎드려야 한다. 물론 이번 산행처럼 올려다봐야 할 때도 있다. 올려다볼수록 아름다운 노란 돌양지꽃에 렌즈를 집중했다.

공룡 능선을 타던 중, 잠시 고개를 왼쪽으로 돌렸다. 세상에, 직벽 한가운데 금강초롱꽃이 피어 있었다. 나는 너무나 놀라 앞서가던 친구에게 소리쳤다. 

"종열아! 여기 청사초롱, 청사초롱!" 

앞서가던 친구는 내 아우성에 놀라 소리쳤다. 
 
8~9월에 핀다는 금강초롱꽃이 7월 초순에 활짝 피었다. 야생화 전문가들과 공유했는데, 무척 신기해하며 반응이 좋았다.
 8~9월에 핀다는 금강초롱꽃이 7월 초순에 활짝 피었다. 야생화 전문가들과 공유했는데, 무척 신기해하며 반응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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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뭐라고?" 

이미 두 군데 난코스를 유격 훈련하듯 내려갔던 친구가 화들짝 놀라 되돌아왔다.   

"이야, 이건 금강초롱이잖아! 이걸 어떻게 봤어?"

우리는 한마음으로 촬영에 촬영을 거듭했다. 옆으로, 앞으로, 뒤로, 거꾸로 가능한 구도 전체를 동원하여 찍고 또 찍었다. 너무나 귀한 야생화였다. 그리고 발걸음을 옮겼다. 내 눈에 노란 돌양지꽃이 들어왔다. 작기도 작지만 저 엄청난 바위틈에서 나를 보며 웃을 줄이야!
 
암반에 핀 '돌양지꽃', 설명이나 표현이 불가하다.
 암반에 핀 "돌양지꽃", 설명이나 표현이 불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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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부턴 돌양지꽃만 눈에 들어왔다. 올려다 봐야만 촬영이 가능했다. 마크로 100mm 렌즈의 한계가 있었지만 작아서 더욱 아름다웠다. 

우리 사는 세상은 크고 웅장한 맛에 빠져 있는 듯하다. 사찰도 교회도, 유명한 카페와 식당도 펜션도 일단 커야 된다고 보는 듯하다. 작아서 아름다운 존재들로 가치 전환을 하면 어떨까. 나는 돌양지꽃을 정성을 다해 촬영했다. 꽃은 작지만 내 마음은 웅장했다. 평생 잊지 못할 공룡 능선 등반. 오후에 비 예보가 있었지만 하산까지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았다.    
   
우리 사는 세상은 크고 웅장한 맛에 빠져 있는 듯하다. 작아서 아름다운 존재들로 가치 전환을 하면 어떨까.
 우리 사는 세상은 크고 웅장한 맛에 빠져 있는 듯하다. 작아서 아름다운 존재들로 가치 전환을 하면 어떨까.
ⓒ 박병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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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하산해서 마시는 콜라맛을 칭송했다. 소공원 주차장을 50미터 앞두고 자판기가 눈에 띄었다. 궁금했다. 자판기에서 콜라 두 캔을 꺼냈다. 마셨다. 표현 불가능한 쾌감이었다. 차에 오르기 전 우리는 하이파이브를 했다. 서로를 토닥이며 웃음지었다. 우리를 안아준 설악을 뒤로 하고 설악항 횟집으로 향했다. 꿀맛 소주와 바다 내음과 친구의 미소를 마시며 나는 우쭐해졌다. 

나를 찾으러 떠난 산행은 아니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나는 누구일까?' 설악은 침묵으로 나를 가르쳤다. 덤으로 얻은 자신감, 자존감에 남은 생은 찬란하리라. 그래,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공룡을 타고 날아보리라. 

태그:#공룡 능선, #야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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