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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천씨가 운영하는 황태가공장.
 이덕천씨가 운영하는 황태가공장.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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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천씨는 강원도 주문진에서 황태가공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겨우내 양구의 노지 덕장에서 말린 황태를 가져와 제품으로 포장해 판매하는 것이다. 그의 공장에 들어서면 말린 황태 향이 가득하다. 가공실 옆방에는 산처럼 쌓여있는 말린 황태 더미가 개별포장을 기다리고 있다.

어려서부터 주문진에서 자란 이덕천씨는 집안 가족 모두 뱃일에 종사하였다. 그 역시 선장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어려서부터 배를 탔고, 중학교 졸업 후에는 선원으로 일했다.

그가 1972년 납북될 때 승선했던 배 역시 아버지의 배였고, 형과 함께 승선하여 조업 중에 납북되었다. 이씨는 비록 나이 어린 동생이었지만, 납북될 당시 기관장 일을 맡았다는 이유로 재판에서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씨의 형 역시 납북귀환어부로 모진 고문을 받았고 현재는 암투병 중이다.

대한민국 함정이 보이는 곳까지 탈출했으나

이덕천씨는 아버지 소유의 동덕호(3.5톤)라는 풍선(풍력을 이용한 배)에 승선하면서 뱃일을 익혔다고 한다. 그 뒤 동덕호가 동력선으로 바뀌면서 10톤짜리 대양호로 개조하게 되었다고 한다. 중학교 졸업 전까지는 학교에 다니면서 배를 타는 당일조업에만 참여했다.

어려서부터 배를 타다 보니 선박의 동력에 호기심이 생겼고, 결국 대양호의 기관을 맡게 되기까지 했다고 한다. 납북되던 1972년 8월 그때도 형제들과 함께 배를 타고 오징어잡이를 나갔다. 마침 그날 조업에서 부친은 몸이 좋지 않아 대양호를 타지 않았기 때문에 납북을 면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몸이 좀 안 좋아서 배는 타지 않아서 다른 사람이 선장이었습니다. 1972년 8월 북한에 납북될 당시 제 나이가 19살이었습니다. 저는 대양호 기관장으로 승선했고, 형이었던 이은방은 일반선원으로 배를 탔습니다. 1년 전부터 제가 대양호 기관장으로 일했습니다. 선장은 주문진에서 사시던 분으로 얼굴은 익히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기관장이라 봐야 기관실에서 선장이 지시하는 대로 가라, 서라 하면 그대로 운전하는 것뿐이라서 어느 방향으로 가는 건지 전혀 알지 못합니다. 납북 당시 대양호 선원은 모두 13명이었는데 북에 납북되어서 17일간 억류되어 있다가 9월 15일 풀려나 돌아왔습니다."

대양호는 주문진항에서 17시간을 항해해 울릉도 동북쪽에 있는 대화퇴어장에 가서 오징어를 잡고 돌아오는 길에  납북되었다. 기관실에 있으면 어디가 어딘지 전혀 알 수가 없다.

예전에는 선장실에 '땡그락지'라는 작은 '종'이 있었는데, 선장이 그것을 '땡땡땡' 치면서 속도를 지시했다. 돌아오는 길에 선장이 갑자기 땡그락지를 '땡땡땡' 치면서 전속력으로 달리라고 해 영문도 모른채 출력을 최대로 올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한 쾌속정 서너 척이 총까지 쏴대면서 대양호에 접근해 왔다.

나중에 선장의 말에 의하면 대한민국 함정이 눈앞에 보이는 곳까지 탈출했었으나 결국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하고 납치되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이씨는 기관실에 있었기 때문에 밖에 상황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 결국 그렇게 대양호는 북한 쾌속정에 붙잡혀 끌려가고 말았다.

대양호 선원들은 북한 장전항 근처에서 17일간 억류되었다가 남한으로 귀환했다. 당시 다른 배에 비해 억류 기간은 아주 짧았다. 이씨는 당시 남북한의 적십자 회담이 이른 귀환 결정에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닌가 추측했다.

"이 일 때문에 돌아가신 것 같아요"
 
1972년 9월 15일 대양호를 비롯해 총 4척의 배가 속초항으로 귀항했다. 자료사진.
 1972년 9월 15일 대양호를 비롯해 총 4척의 배가 속초항으로 귀항했다. 자료사진.
ⓒ Y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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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9월 15일 대양호를 비롯해 총 4척의 배가 속초항으로 귀항했다. 해경의 지시에 따라 속초항 수로가 있는 곳에 배를 별도로 정박시킨 뒤 배에서 내리자마자 차량으로 인근 여관으로 끌려갔다. 일행은 모두 여관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조사를 받았다고 한다. 선박별로 여관 한 방에 모아 두었다고 한다.

여관 조사에서 납북경위와 북한에서의 행적에 대해 심문을 받았고, 북에서 무슨 지령을 받아 온 게 없느냐는 질문을 받았다고 한다. 조사는 2~3일간 진행되었고, 조사과정에서 욕설과 구타는 있었지만 심하지는 않았다고 했다.

속초에서의 최초 심문과 조사가 끝나고 강릉경찰서 유치장으로 이송된 선원은 모두 집으로 돌아갔고, 선장과 기관장들만 감금 구속되었다고 한다. 함께 납북되었던 친형도 이때 풀려났다고 한다.

구속된 후 기소되어 춘천지방법원 강릉지원에서 반공법 탈출죄, 국가보안법, 수산업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억울함에 항소해봤지만 춘천법원에서 기각했다. 결국 이씨는 상고를 포기했다. 이씨는 강릉교도소에서 6개월 정도 머물다 춘천교도소로 이감되어 1년 6개월 만기 출소했다.

이씨는 수감 후 교도소에서의 전향 공작 압박을 심하게 받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북에 동조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납북되었다가 돌아온 것뿐이기에 전향에 응하지 않았지만, 전향을 하지 않으면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를 것 같다는 공포감에 결국 전향도장을 찍고 말았다고 한다. 전향에 응하고 나니 전향한다는 내용을 녹음해 교도소에서 방송했다고 한다.
 
"옥살이 중 또 하나 기억에 남는 일이 있었는데 내가 복역하던 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보통은 복역 중에도 직계 가족이 상을 당하면 며칠씩은 보내주는데 나는 반공법 위반자라고 해서 내보내 주지 않더라고요. 부모가 죽었는데도 알려주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대략 두 달 정도 지난 뒤에 어머니가 면회를 오셔서는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해 주셔서 알게 되었죠. 그때 심정이 오죽했겠습니까? 말로 다 표현하기가 어렵죠. 내가 납북되었다가 돌아와서 다시 징역살이를 하고 있어 아버지가 속이 많이 상하셨을 것 아닙니까. 이 일 때문에 더 몸이 안 좋아져서 돌아가신 것 같아요."

고통은 자식에게까지 이어졌다

이씨는 교도소에서 출소한 뒤 대양호가 정박해 있던 속초항을 찾았다. 그러나 대양호는 1년 6개월 동안 배를 운행하지 못해 이미 침수된 채 운행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당시에 같이 넘어왔던 배 4척 모두 비슷한 상태였다. 이씨는 동덕호라는 망선바리(그물잡이) 배를 타고 연안에서 멸치잡이로 생계를 이어 나갔다. 결혼을 한 뒤 1984년경부터 대관령 덕장에서 황태를 건조해서 가공 판매를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형사들이 늘 좇아와 감시했다. 이씨는 보호관찰을 17~18년 정도 받았다고 한다. 1년에 한 번씩 속초에서 4시간씩 반공교육을 받아야 했고, 자신을 담당하는 형사로부터 수시로 전화 연락을 받고 동향 감시를 당했다고 한다. 어딘가 외지라도 나가려면 강릉경찰서 정보과 담당 형사한테 타지로 간다고 신고해야만 했고, 주문진의 다방으로 끌려 나가 찻값을 계산하기도 여러 차례였다고 한다.

이씨가 처음 결혼한 것은 28살 때였다. 그러나 첫 결혼생활은 얼마 가지 못했다. 납북귀환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결혼 생활은 1년도 가지 못했다. 이씨의 납북사실을 알고 난 아내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행동했고, 그런 결혼생활을 더 이상 유지하기는 힘들었다고 한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재혼을 했지만 여전히 경찰의 감시로 힘든 생활을 했다고 한다. 수시로 찾아오는 형사로 인해 아내의 고통이 이만저만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한 고통은 자식에게까지 이어졌다.
 
"15년 전쯤 아들이 강릉에서 부사관에 지원했는데 떨어졌습니다. 연좌제 피해를 본 것이죠. 납북되었다가 돌아와 반공법 국가보안법으로 복역한 경력 때문에 아들이 피해를 본 건 아닌가 싶죠. 알게 모르게 우리 가족은 불이익을 많이 받았습니다. 또 한번은 건조인연합회에서 해외여행을 가려고 했는데 제 여권이 나오지 못해 아내 혼자 연수를 갔었죠."

일반선원이었던 형은 구속은 면했으나, 이씨와 똑같이 피해를 봤다고 한다. 납북귀환자 교육을 받으러 갈 때도 항상 형과 같이 참여했다고 한다. 서로가 납북귀환어부 피해자였지만 납북사건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살았다고 한다. 형제는 함께 사찰대상인물로 올라 감시를 받으며, 의무적으로 교육을 받아야 했다. 10여 년간 일 년에 4~5번 교육받으며 지내야 했다. 이제서야 진실규명을 시작하려는 이유를 묻자 이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너무 억울하잖아요. 아무것도 모르는 나이에 선장이 여기 가라 저기 가라 하라고 해서 갔다 온 것뿐인데 가족들에게 늘 미안해요. 모든 면에서 위축되고 자존감 떨어지고 하잖아요. 경찰이라면 심적으로 고통스럽잖아요. 괜히 주변 사람들 만날 때도 위축되죠. 압박도 되고 하죠. 이 전과자는 불명예를 씻고 가족들에게 떳떳하게 살고 싶어요."

태그:#납북귀환어부, #평화박물관, #대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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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가는 세상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서 활동합니다. 억울한 이들을 돕기 위해 활동하는 'Fighting chance'라고 하는 공익법률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문두드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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