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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선'을 아시나요. 시집선이란 한 출판사가 발행하는 시집의 목록을 말합니다. 그래서 시집선에는 순번이 있습니다. 가장 많은 시집을 발간한 출판사는 '문학과지성사'입니다. 문학과지성사를 약칭으로 '문지'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2022년 7월 기준시집선이 570번을 넘어 섰습니다. 창비의 경우는 2022년 8월 현재 시집선이 480번을 넘습니다.

시집선의 1번이 누구인지 알아보는 것도 꽤 재미있습니다. 문지 시인선 1번은 황동규 시인입니다.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로 1978년 9월 25일이 발행일입니다. 창비 시인선 1번은 신경림 시인의 <농무>입니다. 1975년 3월 5일이 발행일입니다. 문지와 창비를 비교해 보면 창비가 3년 정도 발행이 더 빠릅니다.
 
농무(증보판)
 농무(증보판)
ⓒ 주영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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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소개하는 시집선은 모르시는 분이 많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의 풍랑을 겪어보셨던 분들이라면, 창비나 문지보다도 더 깊숙이 다가오는 시집선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시집선이기도 한 이 시집선의 이름은 '풀빛 출판사'의 <풀빛판화시선>입니다.

시집선이 몇 번까지 발간되었는지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제가 확인한 바로는 1991년 이봉환 시인의 시집까지(35번) 발간된 것으로 확인되는데요, 풀빛출판사 홈페이지에는 약 40여종이 출간되었다고 쓰여 있습니다. 1990년대에 발간이 중단된 시선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인터넷에서 36번부터 40번까지의 데이터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풀빛판화시선>의 1번은 김지하 시인의 시집 <황토>입니다. 1984년 7월 15일 출간되었습니다. 이 시집은 한얼문고에서 발간된 김지하 시인의 첫 시집 <황토>를 재간행한 시집입니다. 이 시집은 제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시집선 중 가장 빠른 시집선은 3번, 1984년 9월 15일 발행된 강은교 시인의 시집 <붉은강>입니다. 그러나 제가 가장 사랑하는 시집은 박노해 시인의 시집 <노동의 새벽>입니다. 이 시집은 1984년 9월 25일 발간되었습니다.
  
강은교 시집
 강은교 시집
ⓒ 풀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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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새벽>은 1980년대 노동 문학을 대표하는 시집입니다. 시를 읽어보면 왜 노동 문학의 대표작인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시집의 한 부분만을 소개해도 가슴이 저립니다.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이러다간 오래 못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가지
- 「노동의 새벽」 중에서

왜 화자는 '이러다간 오래 못가지'라고 이러다간 끝내 못가지라고 얘기하고 있는 것일까요. 저 노동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노동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노동자의 안전은 후순위로 넘겨버리고 '생산과 비용 절감'만이 최고의 선(先)이자 선(善)인 노동 현장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집이 발간되고 38년이 흐른 2022년, 오늘의 노동 현장은 어떠할까요? '비용'보다 '인간'이 우선시되는 현장으로 바뀌었나요. 만일 그러했다면 '구의역 김군'과 같은 불행한 사건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아직까지 시집 <노동의 새벽>의 주장은 유효합니다.
  
노동의새벽
 노동의새벽
ⓒ 풀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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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빛판화시선>의 특징이라면, 시집 한 권에 판화를 두 장씩 넣어 제본했다는 것입니다. 판화가 '오윤'의 작품입니다. 판화가 오윤의 작품을 좋아하시는 분들이라면 독특한 낙관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 낙관이 판화에서 보입니다.

판화가 오윤은 1980년대를 대표하는 민중미술의 대표작가입니다. 민중의 해학과 신명, 소외와 아픔을 판화라는 날카로운 형식을 통해서 나타냈는데요. 불행하게도 1986년 7월 5일 마흔한 살의 젊은 나이로 짧은 생을 마쳤습니다. 간경화였습니다.
 
국밥과 희망
 국밥과 희망
ⓒ 풀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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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빛판화시선>에 오윤의 판화가 실린 까닭을 조사해보니, 오랜 간경화 투병으로 몸이 좋지 않았던 판화가 오윤에게 일감을 주기 위해 출판사에서 부탁을 한 것이라고요(서울신문에 실린 윤성근 <이상한나라의헌책방> 대표의 기고를 참고). 그 마음이 참 아련합니다. 덕분에 <풀빛판화시선>이라는 멋진 시선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이니 작가와 출판사 모두에게 잘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오윤판화
 오윤판화
ⓒ 풀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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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사실은 <풀빛판화시선> 모두에 판화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또한 판화가 인쇄된 종이 재질도 다릅니다. 제가 <노동의 새벽> 초판본을 세 권 가지고 있는데 그중 두 권에만 판화가 있습니다. 처음 인쇄되었던 시집에는 판화가 없었으나 나중에 발간된 시집에 판화가 실린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시선 3번인 강은교 시인의 시집에도 판화가 없습니다. 시선 4번인 김준태 시인의 시집의 판화는 한지에 인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노동의 새벽>의 판화는 약간 두툼한 종이 재질입니다. 판화의 경우 한지와 두툼한 종이가 병행된 것이 아닐까 짐작합니다.

제가 조사한 <풀빛판화시선>의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지면상 모든 시집선을 소개하지 못하고 일부만 표기하였습니다. 다음번에는 <청사민중시선>, <청하시선>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풀빛판화시선 발간 순서

1번 김지하 시집 『황토』
2번 양성우 시집 『낙화』
3번 강은교 시집 『붉은강』
4번 김준태 시집 『국밥과 희망』
5번 박노해 시집 『노동의 새벽』
6번 신경림 시집 『다시 하나가 되라』
7번 문병란 시집 『아직은 슬퍼할 때가 아니다』
8번 최하림 시집 『겨울 꽃』
9번 임정남 시집 『이땅의 불꽃이여』
10번 김정환 시집 『해방서시』
~

34번 이종주 시집 『전경 일지』 * 풀빛시선으로 발간됨
35번 이봉환 시집 『해창만 물바다』 * 풀빛시선으로 발간됨


시 쓰는 주영헌 드림.

덧붙이는 글 | 산문은 오마이뉴스 연재 후, 네이버 블로그 <시를 읽는 아침>(blog.naver.com/yhjoo1)에 공개됩니다.


태그:#풀빛판화시선, #오윤, #박노해시인, #강은교시인, #노동의새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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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쓰기'보다 '시 읽기'와, '시 소개'를 더 좋아하는 시인. 2000년 9월 8일 오마이뉴스에 첫 기사를 송고했습니다. 그 힘으로 2009년 시인시각(시)과 2019년 불교문예(문학평론)으로 등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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