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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금옥(미디어협동조합 국민TV 이사)씨는 1972년 9월 15일 납북되었다 귀환한 무진호 선원 손용구씨의 자녀이다. 강원도 양양 인구라는 곳에서 태어난 손씨는 배를 타고 여기저기 옮겨 다니던 부친 직업으로 인해 어머니와 함께 속초, 고성, 양양으로 자주 돌아다녔다고 한다.
 
원래는 아버지가 양양 인구라는 곳에서 쌀장사를 했었요. 그런데 아버지가 마음이 좋은 사람이라 남의 집 굴뚝에 연기가 나지 않으면 그 집에 쌀을 들고 찾아가 그냥 쌀을 퍼주고 오시는 거예요. 누가 밥을 못 먹고 있다는 말만 들으면 쌀을 가져다주니 무슨 이익이 남겠어요. 더군다나 주말이면 외출 나온 군인들 배고프다며 밥을 해주니 쌀가게가 망하지 않을 리가 있어요? 아버지는 그렇게 인정이 많은 분이었어요.

결국 양양 인구에서 쌀가게를 접고, 부친이 납북되던 1972년에는 속초로 이사했다. 부친은 생계를 위해 배를 탔고 그 배가 바로 납북된 무진호였다.

손씨는 부친이 납북되었던 기억이 자세히 나지는 않는다고 했다. 다만 부친의 납북소식을 듣고 어머니와 함께 경찰서를 찾아가 부친의 생사를 확인했던 기억이 있다고 했다. 무진호는 1972년 8월 23일 납북되었다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9월 15일 속초항으로 돌아왔다.

손씨는 부친이 귀환한 날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부친의 배가 속초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와 함께 속초경찰서로 찾아갔다고 한다. 속초경찰서에 도착한 선원들은 경찰서 강당으로 입실했는데 그곳에서 줄을 세우는 과정에 구타가 심했다고 한다.

며칠 뒤 다시 어머니와 함께 부친을 찾아갔는데 경찰서가 아닌 여인숙이었다. 그곳에서도 여전히 부친을 포함한 선원들이 구타당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부친이 집에 돌아온 것은 1년의 징역살이를 마치고 나온 뒤였다.
 
아버지가 납북되었다가 오시니까 생활이 어려워졌죠. 학교 공납금도 내지 못할 정도로 형편이 어려워져 결국 초등학교를 다 마치지 못하고 그만두게 되었어요. 더군다나 아버지가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오른쪽으로 풍을 맞으신 거예요. 반신불수가 되신 것이죠. 그러니 일을 할 수가 없잖아요, 엄마는 먹고 살아야 하고, 아버지 치료비도 벌어야 했기에 아이들 학비를 댈 여유가 없었어요.
 
12살에 식모살이하며 생계 책임
 
속초지원 앞에서 방송 인터뷰 하는 손금옥씨.
 속초지원 앞에서 방송 인터뷰 하는 손금옥씨.
ⓒ mbc강원영동 뉴스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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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씨는 12살이 되던 해에 학교를 그만두고 비록 어린 나이지만 식모살이를 하러 가야했다. 아는 사람의 소개로 홀로 서울로 올라가 식모살이를 해야 했다. 1년치 선납금을 받는 조건으로 18살이 되던 해까지 서울 응암동의 한 가정집에서 식모살이를 해야 했다.

손씨는 단 하루도 쉬는 날 없이 매일 빨래와 식사를 준비해야 했다. 젊은 나이에 놀고 싶은 마음이 왜 없었겠는가마는 속초에 있는 가족을 생각하며 팔자라 생각하고 살았다고 한다. 그저 그렇게 쉬지도, 놀지도 못하고 사는 동안 '못 해, 안 가'라는 말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일했다고 한다.
 
내 밑에 여동생도 남의 집에 갔지만 얼마 버티지 못하고 그만 두었다고 해요. 나는 장녀이고 큰아이라는 책임감 때문에 이 악물고 버티며 일했던 것 같아요. 제가 그만두면 당장 속초에 사는 식구들 먹고사는 문제가 생기니까요. 그렇게 일해서 동생들 생활비 보내 모두 학교를 보냈어요. 나하고 밑의 여동생만 공부하지 못했고 남동생들과 막내 여동생은 그래도 제대로 공부했죠.

식모살이를 그만두고 난 손씨는 봉제공장을 전전하며 돈을 모았고 모은 돈은 모두 집으로 송금했다. 언제 끝날지 모를 생계의 책임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손씨는 21살이 되던 해에 일찍 결혼했다.

결혼은 그녀 나름의 탈출구였다고 한다. 서울에서 직장 생활하는 속초 출신 사람과 맞선을 봤다. 손씨는 결혼하게 되면 더 이상 가족의 생계를 위해 혼자 애쓰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한다. 부친 역시 배를 타지 않는 사람이라며 결혼에 반대하지 않았다고 한다. 손씨와 부친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혼이었다.

폭력적으로 변한 아버지

그러나 결혼하더라도 납북 귀환 어부 가족이 감내해야 하는 불이익은 피해 갈 수 없었다. 부친이 귀환해 돌아온 직후부터 부친과 가족들은 여러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제가 서울에 살 때 동생들에게 집에 별일이 없느냐고 가끔 물어봐요. 그러면 동생들이 아버지 손을 잡고 가끔 파출소에 갔다는 거예요. 아버지가 그동안 어떻게 지냈다고 보고하러 파출소로 간 것이죠. 그리고 속초 청학동 본가 집 주변에 항상 모르는 남자들이 길가에서 집을 감시하고, 심지어는 집안 내부를 들여다보고 간다는 거예요. 아버지는 어디 가려고만 하면 경찰서에 신고를 해야 하니 웬만해서는 집 밖을 나가지 않았어요.

부친의 몸이 조금씩 회복되자 '뗏마'(전마선) 배를 하나 구해 부모님이 근해에서 가자미 같은 작은 생선을 잡아서 생계를 이어갔다. 부친의 몸은 경찰 고문 이후 매우 예민해졌다. 어머니가 계모임에 갔다가 늦기라도 하면 폭력적으로 변했다. 부친의 폭행으로 어머니는 안면을 수술하기도 했다고 한다. 다른 사람에게 사려와 배려가 깊고, 부부 금슬이 깊었던 부친의 모습이 아니었다.

특히 부친이 예민해 하는 말이나 단어, '납북된 사실', 그 이야기만큼은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말아야 했다. 자식들도 부친에게 '왜 북에 다녀왔느냐'고 한 번도 묻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간첩으로 몰릴 뻔한 부친이 가장 걱정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연좌제로 인한 자식들의 피해였다.
 
한번은 남동생이 축구 선수를 해서 고등학교 때 대통령배 우승을 한 적이 있어요.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 결승전 경기를 보러 가지 못했어요. 경기를 관람하려면 경찰에 신고를 하고 가야하는데 그 일이 너무 싫어서 가지 않았던 적이 있어요. 그 해 축구대회에서 우승을 한 남동생이 일본에 있는 학교와 교류전을 하러 가기로 되었는데, 남동생은 부친의 연좌제로 인해 일본에도 가지 못했죠.

그뿐만이 아니었다. 90년대 초 막내 여동생이 부천에서 결혼식을 올렸는데 그때도 경찰서에 신고를 해야 했다. 속초경찰서에 찾아가 딸의 결혼식에 참석해야 한다고 하니 딱 하루만 다녀오라고 했다는 것이다. 결국 부친은 결혼식 당일에만 참석했다가 곧바로 속초로 내려와야 했다.

이런 감시 때문에 부친은 외지에 나가 있는 자식들의 집에 찾아가 본다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같은 동네에서도 집 밖을 나오면 무조건 신고하라는 삼엄한 감시하에서 생활은 엉망이 될 수밖에 없었다. 수시로 담벼락을 서성이며 감시하고 주변인들에게 탐문하는 상황에서 부친은 모든 사회생활을 포기하고 살아야 했다고 한다.

굴레 벗어던지겠다 다짐

손씨와 자녀들 역시 여권이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해 해외여행은 꿈도 꾸지 않고 살았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성당을 다니면서 손씨의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서울에 살 때 성당을 다녔어요. 성당은 약자를 위해 활동을 하잖아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어요. 사회문제가 아버지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우리 같은 약자는 같은 약자 편에서 일해야 하고, 약자들의 이야기를 들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약자들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만으로 힘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거예요. 세월호 때도 함께 단원고 부모님들과 단식을 했던 것도 미래 아이들에게 다시는 이런 아픔을 물려주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였어요.
 
최근 강릉지원에서 손씨 부친에 대한 재심 개시를 결정한 결정문의 일부.
 최근 강릉지원에서 손씨 부친에 대한 재심 개시를 결정한 결정문의 일부.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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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최근 강릉지원에 접수한 부친의 재심 개시가 결정되었다. 아직 정확한 재판 기일이 나오지 않았지만 재심이 열리는 것만으로도 그동안 쌓였던 억울함이 조금은 풀리는 듯하다고 했다. 부친이 국가로부터 불법 감금되어 사건이 조작되었다는 작은 반증이기 때문이다. 

손씨는 부친의 누명을 벗기고, 자신도 자유로워지고 싶어서 진실규명을 시작했다고 한다. '빨갱이', '반공법'은 알게 모르게 평생의 굴레였고, 아이들에게도 '빨갱이'라는 오명을 두 번 다시 물려주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는 부친의 예민하고 폭력적인 성격 역시 국가폭력으로 인한 후유증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남편과 가정을 지키기 위해 고통스러운 희생을 감당해야 했던 모친을 생각하면 가족에게 씌워진 '납북 귀환 어부 가족'이라는 굴레를 벗겨야겠다고 다짐한다며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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