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8.29 16:27최종 업데이트 22.08.29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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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에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하트스토퍼> ⓒ 넷플릭스


올해 넷플릭스에서 가장 사랑 받은 드라마를 뽑자면 대부분 <하트스토퍼>를 떠올리지 않을까. 앨리스 오스먼의 그래픽 노블을 원작으로 한 이 드라마는 성소수자 청소년들의 사랑과 우정을 다루고 있다. 그중 드라마의 중심이 되는 건 찰리와 닉이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물론 <하트스토퍼>에 달콤한 로맨스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동성애자라는 사실이 드러난 후 학교에서 괴짜 취급을 받는 찰리와 자신이 양성애자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를 가족에게 공유하기까지 혼란을 겪는 닉의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드라마의 주된 갈등은 연애를 시작한 찰리와 닉이 이 관계를 비밀에 부치는 것에서도 발생한다.


<하트스토퍼>는 평단의 호평에서 알 수 있듯 매우 잘 만들어진 드라마다. 연출부터 연기까지 어디 하나 흠잡을 곳이 없다. 나 또한 이 드라마를 매우 즐겁게 감상했고 여전히 소중히 여긴다.

다만 드라마에 대한 호오를 떠나 조금은 심드렁한 감정이 드는 순간이 있었다. 정체성이 드러난 이후 고통받거나 비이성애 관계를 사람들에게 공개할지 말지 고민하는 성소수자의 이야기는 너무 많지 않나? 이제는 조금 다른 걸 해볼 때도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드라마는 현실을 반영한다. 특히 <하트스토퍼>는 현대 사회를 배경으로 하는데 만약에 그런 드라마에 지금 현실의 성소수자들이 겪는 고민이 조금도 등장하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저렇게 사는 게 가능해?'

평등한 세상은 소수자가 행복한 세상일까

만일 정체성과 성적 지향에 대한 고민이 없는 성소수자가 나오는 드라마를 보고 싶다면 방법은 두 가지다. 드라마의 배경을 지금 이 지구가 아닌 어딘가로 설정하면 된다. 대체 역사물을 쓸 수도 있겠고 판타지의 영역으로 이동해도 좋다.

나머지 방법은 이것보다는 많이 어려운데 우리가 지금 사는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성소수자를 둘러싼 차별과 편견이 사라지고 이들이 사회 어디서나 아무렇지 않게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으면 된다. 농담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이것도 방법 중 하나다. 만약 실현이 된다면 먼 미래에 우리는 시대극 속에서나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고난과 갈등을 겪는 캐릭터를 보게 될지 모른다. 물론 지금으로서는 아득한 일이지만.

사람들이 가끔 하는 오해 중 하나는 이 이야기를 단순히 '드라마에서 행복한 성소수자들을 보고 싶다'는 희망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행복한 사람을 보는 건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사람은 복잡한 존재다. 가령 나만 해도 1년 365일을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고통받지는 않는다.

그것 말고도 인생에 괴로움을 안기는 요소는 수천 가지가 있고 매 순간 다른 종류의 것들이 찾아온다. 가령 오늘 아침만 해도 내게 가장 큰 스트레스를 안겼던 건 바쁜 출근 시간에 굳이 지하철역 출입구에 서서 스마트폰 메시지를 확인하는 이들의 존재였다. 그러니 차별과 혐오가 사라진 세상이 온다고 해도 드라마에 인생에 행복뿐인 소수자들이 등장한다면 나는 아까와 똑같은 질문을 던지며 의심할 것이다. '저게 된다고?'

분노와 슬픔, 결코 단순하지 않은 감정
 

넷플릭스 <하트스토퍼>의 주인공 닉과 찰리 ⓒ 넷플릭스


이런 생각을 보다 깊게 하게 된 계기가 있다. 사람들과 동성결혼에 대해 이야기 할 때면 이따금 '나는 위자료 받아서 먹고사는 게 꿈이야'라고 농담할 때가 있다. 물론 이혼은커녕 한국은 동성 간 결혼도 불가능한 나라이니 이게 될 리가 없고 당연히 진지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런데 하루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혼한다는 건 정말 어떤 느낌일까. 이건 단순히 오래 동거한 커플이 헤어지는 것과는 달라 보인다. 법원에 가서 숙려를 권고 받고 그 시간을 거쳐 관계의 종지부를 찍는 일. 가족과 친구들의 화려한 축하를 받으며 시작한 관계를 끝내는 일. 가족관계등록부에서 하나의 이름이 사라지는 일. 의도하든 하지 않든 하나의 관계가 끝났음을 세상이 알려야 하는 일 말이다.

물론 많은 경우 이 과정에는 엄청난 고통이 뒤따를 것이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개인이 겪은 이혼에 대해서는 아까와 같은 '위자료 농담' 따위는 절대 하지 않는다. 그건 매우 무례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슬픔과 분노라는 감정이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예를 들어 분노는 사람을 들끓게 하여 지치도록 만들지만 때로는 인생에 중요한 결단을 내릴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슬픔은 마음이 가라앉게 하지만 고요히 침잠하는 그 순간은 사람에게 성찰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나와 주변을 돌아보는 게 가능해진다.

그리고 분노와 슬픔은 납작하게 수렴할 수 없다. 어떤 상황과 이유로 그 감정을 느꼈느냐에 따라 결은 천차만별일 것이다. 즉 다양한 분노와 슬픔은 입체적인 인생의 여러 면들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희로애락이 평등한 사회를 바라며

지난 18일, 한국성적소수자문화인권센터 주최로 열린 '퀴어한 희망의 페차쿠차'에 발표자로 참여했다. 페차쿠차란 단시간에 여러 장의 슬라이드를 화면에 띄우며 이어가는 발표를 의미하는데, 이날 발표 주제는 제목처럼 우리가 생각하는 퀴어한 희망이었다.

그런데 발표문을 만드는 건 생각보다 난감한 일이었다. 매일 같이 닥쳐오는 불평등과 부조리를 놓고 이를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다 보면 미래도 희망도 상상할 시간이 없다. 그렇다고 성소수자라면 대부분 가지고 있을 희망, 세상이 조금이라도 평등해져 우리 같은 사람도 살기가 나아졌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자니 그것도 마뜩잖았다. 바쁜 시간을 쪼개서 들으러 온 사람들에게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당연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고민 끝에 붙인 발표의 제목은 '희로애락이 평등한 공동체'였다. 사람들은 평등한 사회를 상상할 때 '그리하여 결국은 행복해진 소수자들'의 이미지를 떠올리곤 한다. 과연 그럴까.

평등한 사회란 소수자들에게도 다른 이들과 같은 기회와 가능성이 열린 곳이라 생각한다. 이는 새로운 사랑과 행복의 가능성이기도 하지만 전에는 몰랐을 분노와 슬픔도 우리를 기다릴 것이다. 선택지가 늘어난다는 건 그만큼 감수해야 할 위험도 늘어난다는 뜻일 테니 말이다.

일이 잘 풀릴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 한 것처럼, 그렇다고 해도 그 속에 고통만이 존재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더욱 단단하고 성숙한 사람이 될 계기도 함께 할지 모른다.

이런 이유로 나는 희로애락이 평등한 공동체를 희망한다. 오직 사회가 그어 놓은 빗금 안에서 정해진 상처만을 받는 게 아니라 더욱 다양한 분노와 슬픔을 느낄 수 있는 사회를. 사람들이 보편적이라 말했지만 실은 그렇지 않았던 경험과 감정을 소수자들도 겪고 느낄 수 있는 세상을 원한다. 그곳에서 소수자들의 삶은 지금보다 더욱 평등하게 복잡하고 아름다울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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