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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용택 화백의 하오개 그림터에서
 권용택 화백의 하오개 그림터에서
ⓒ 박병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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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22년 전,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백석산 자락, 해발 640미터 돌 반 흙 반인 땅에 보금자리를 틀었다. 주변 산책을 했다. 백석산, 오대산, 가리왕산, 두타산에 등반도 했다. 수많은 야생화가 반겼다. 집 주변엔 계곡이 있고, 음지 반 양지 반이었다. 야생화가 자생할 수 있는 최적지였다. 야생화 군락지에서 씨앗을 채취하거나, 주변 농장에서 야생화를 구매해 정성스레 심었다. 그렇게 심은 야생화 종류만도 400여 종이다. 이 분의 삶이 궁금했다.

나는 카메라를 멨다. 멋지고 예쁜 야생화를 벅차게 만났다. 돌에 그림을 그려 유명 화가로 거듭난 권용택(69) 선생을 찾아 삶의 향기를 공유했다. 경기도 오산에서 미술 교사로 생활하다 8년 만에 퇴직했다. 그림에 빠진 운명이었다. 
 
나비 형국 57x24x3.5cm 평창 돌위에 아크릴 2022년작
 나비 형국 57x24x3.5cm 평창 돌위에 아크릴 2022년작
ⓒ 박병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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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년 전 귀촌한 권 화백에게 돌은 생명을 지닌 존재였다. 어딜 가나 돌을 만났고, 돌이 말을 걸었다. 권 화백은 돌이 건넨 주문을 따라 돌에 자연을 담기 시작했다. 돌에 그림을 그릴 때면 돌과 교감했다. 자신이 경험했던 자연의 아름다움을 돌에 그렸다. 돌 그림의 선구자로 미술 평론가들의 찬탄이 이어졌다. 다양한 미디어에서 권 화백의 삶과 예술 세계를 조명했다.

권 화백은 마을 이장을 4년이나 했다. 귀촌 전에는 환경 생태 관련 수많은 사회 시민 단체에서 운영위원이나 회장 역할을 수행했다. 마을 전체에 20가구가 살았다. 이장을 하면서 집집마다 방문하여 애로사항을 듣고 의견을 모았다. 좁은 길을 넓게 만들었고, 주민 뜻을 모아 도로 포장도 했다. 연말에는 개인별 카렌다를 제작하여 주민들과 소통했다.

2006년도에는 수해가 심하게 났다. 무려 15일 동안 동네가 고립됐다. 권 화백은 동네 주민들과 힘을 합쳐 복구에 몰두했다. 20년 혹은 18년 동안 이장을 했던 분들도 감탄했다. 외지에서 들어와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언행일치로 마을을 위해 헌신하자 마을 단합은 자동이었다. 마을 주민들은 미술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권 화백은 골짜기 이름을 따 '하오개 그림터'를 만들었다. 아내 이향재(68) 화가와 함께 돌 그림, 캔버스화를 그렸다. 고향인 수원에서 제2의 고향인 평창에서 권 화백의 예술 지평이 빛을 발했다.

 
하오개 그림터 앞에서, 권용택 화백
 하오개 그림터 앞에서, 권용택 화백
ⓒ 박병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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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초반, 미술에 입문하게 된 계기를 물었다. 초등학교 시절 비가 오는 날이었다. 고장난 듯한 자동차가 털털거리며 지나갔다. 차에서 기름이 떨어졌다. 기름 방울이 물 위에 떨어지는데 무지개 빛이 현란하게 눈에 들어왔다. 어릴 때였지만 그렇게 아름다운 건 없다고 믿었다. 하늘 무지개 일곱 개와는 너무 달랐다. 자유롭게 쫙 퍼진 무지개였다. 권 화백은 이때부터 색깔 재료에 관심을 두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중학교 때는 식물을 좋아했다. 식물 채집은 일상이었다. 삼촌이 보던 두꺼운 사전을 빌렸다. 그리고 페이지마다 채집한 식물을 끼워 넣었다. 그리고 그림을 그렸다. 그런 경험들이 쌓이면서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미술부에 들어가 활동했다. 미술부는 규율이 엄했다. 매일 한 장을 그려야 했다. 반장이 검사해서 통과해야 집으로 갔다. 동료와 선배들과 다양한 그림을 그렸다. 권 화백은 반드시 화가가 되리라 다짐했다.

다음은 권용택 화백과 나눈 대화이다.

10년가량 가열차게 민중미술

- 자신의 작품 세계 특징을 간추려 본다면?

"내가 좋아서 그림을 그리지만, 보는 이들과 소통이 안 된다면 의미가 없다고 본다. 소통을 주목표로 삼았다. 내 그림이 추상으로 안 간 이유이기도 하다. 형상이 있는 그림 세계를 추구해서 소통하고자 한다. 그렇다고 지난 50년 동안 같은 계열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조금씩 변화시켜 가다 보니 내 그림의 궤적이 생겼다. 
 
평창 두타산에 눈이 내리고 130x80cm 2012년작
 평창 두타산에 눈이 내리고 130x80cm 2012년작
ⓒ 박병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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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따뜻하고 소박한 서정적 자연주의 작품을 그렸다. 예를 들면 담벼락, 수원 화성의 성벽, 바윗덩어리 위의 담쟁이덩굴 같은 것이다. 어쩌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그림이었다.

그런데 시대 흐름 속에서 내 그림이 진부해 보였다. 시대의 흐름에 맞게 내 개성을 살려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형식은 약간 초현실주의적인 느낌이었다, 비무장 지대를 그렸는데, 철조망이 하늘에 떠 있는 그림을 예로 들 수 있다. 눈에 보이는 것보다 한 바퀴 돌린 듯한 느낌의 그림이었다. 이 또한 고뇌했다. 내 사고가 현실과 동떨어지고 남들과 다른 사람이 되는 느낌이었다. 사람과 소통하지 못하고 내가 한 단계 더 위에 있다는 비합리적인 느낌이 들었다. 망상과 공상에 빠져 있다는 느낌이 짓눌렀다,

1987년 6월 항쟁을 경험했다. 나는 당시 화가였지만 골방에서 그림만 그릴 수는 없었다. 대학생들의 시위가 대견스러웠다. 대학생 제자들이 감옥에 가기도 했다. 시대와 사회에 관심이 생겼다. 민중을 위한 사회과학 서적에 몰입했다. 화가로서 시대의 아픔과 함께 가야 한다는 사명감을 얻었다. 5.18 민주 항쟁 관련 자료를 찾아 그림을 그렸다. 슬픈 교육 현장 그림도 그렸다. 10년가량 가열차게 민중미술을 지향했다. 노동, 환경, 통일, 위안부 문제 등 사회 전반의 부패한 권력과 부조리에 맞서는 투쟁 대열에 함께 했다. 나는 현실과 괴리될 수 없다. 대중과 소통은 필수였다. 내 그림이 투쟁 현장에서 의미 있게 활용됐다. 
 
작품 퇴근길
 작품 퇴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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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작품 '퇴근길'과 '남남북녀'를 예로 들고 싶다. 당시 넥타이 부대는 퇴근길에 시위 현장에 함께했다. 전경이 시위 대학생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모습을 보며 깨진 벽돌을 들고 던질까 말까 주저하는 시민의 모습이다. 왼쪽 시민과 오른쪽 전경 사이에 있는 죽순은 결국 죽순처럼 일어서는 민중을 상징한다. 
 
작품 남남북녀
 작품 남남북녀
ⓒ 박병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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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남북녀'는 남북의 대치를 넘어 통일을 지향하는 의미를 담았다. 당시 그토록 절실했던 통일 운동의 단면이 사실처럼 그려졌다. 그림 상단의 남녀는 나와 아내인데 남남북녀를 상징한다. 당시 통일 운동을 경험한 분이라면 하단부 인사들이 누구인지 헤아릴 것이다. 이 기회에 제자들이 엮어준 도록을 기자에게 보여 주고 싶다. 내 40년 그림 인생을 담은 도록이다. 내 지도를 받은 제자들과 나의 40년 그림 인생을 담아 사제 동행 전시를 했다."

물 좋고 숨쉬기 편해 평창에 정착

- 해발 640미터, 평창군 백석산 오지에 그림터를 짓게 된 배경은?

"'물난리' 그림이라든가 '들꽃 그림전' 등을 진행하며 민중의 삶이나 시대 상황을 연결했다. 대중의 반응이 좋았다. 1998년도부터라고 기억한다. 자연에 대한 관심이 증폭됐다. 꽃과 물이 있는 곳을 찾았다. 지금 이곳에 온 마음이 집중됐다.

수원에서 심의 받지 않는 불법적(?) 인권 영화제가 열렸다. 나는 당시 행사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제주 4.3 사건을 다룬 영화였는데, 제목은 <레드 헌터>였다. 재일교포라는 이유만으로 간첩 혐의를 받고 오랫동안 감옥 생활을 했던 서준식 목사의 제안으로 우리나라의 심각한 인권 문제를 알리기 위해 이루어졌다. 심의를 거치지 않고 민감한 사안을 상영해서 고발을 당했다. 영화제 전부터 정보과 형사들의 감시가 이어졌고, 나는 가택 연금을 당했다. 담당 경찰서 정보과장은 위원장만 없으면 된다며 행사 일주일 동안 나의 행사장 출입을 제한했다. 다행스럽게도 행사는 성공리에 개최되었다.

나는 아내와 전국 여행을 하다가 강원도 평창을 알게 됐다. 물 좋고, 숨쉬기가 편했다. 아내는 간호사 일을 접고 내 영향을 받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우리 부부에게 작업실이 절실했다. 한 지면에서 정보를 보고 오래된 집 마루에 앉아 보았다. 마음에 드는 '복바위'가 있고, 햇살이 몸에 안온하게 들어왔다. 교통은 나쁘지만 땅값도 저렴했다. 우선은 내가 창작에 몰두할 수 있는 시간과 환경을 만들고 싶었다. 드디어 찾았다. 들꽃 그림과 물 그림을 다 그릴 수 있는 공간이었다. 제일 처음에 풍경화를 그려 전시했는데 보는 이들과 소통했고 모든 그림이 다 팔렸다." 
 
오대산 43x25x3.5cm 평창 돌위에 아크릴 2022년작
 오대산 43x25x3.5cm 평창 돌위에 아크릴 2022년작
ⓒ 박병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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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을 보면 수많은 형상이 떠올라

- 이제 돌 그림으로 유명한 화가가 되었다. 왜 돌에 그림을 그리는가?

"이곳에 정착하며 산책을 하는데 식물 도감에서나 보던 꽃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야생화를 '산풀꽃'이라고 부른다. 복수초, 괭이눈 등 온갖 산풀꽃이 지천에서 피었다. 집 주변 백석산, 가리왕산, 오대산을 10년 동안 오르며 산풀꽃과 가까워졌다. 산풀꽃과 인연이 돌로 이어졌다.

집 주변 계곡에서 손을 씻는데 기묘한 느낌이 왔다. 내게 돌이 말을 걸었다. 돌은 자신에게 무언가를 그려달라고 애원했다. 이후 돌을 보면 수많은 형상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돌이 내 그림의 재료가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언젠가 장고 가죽판에 그림을 그려 개인전을 연 적도 있었다. 캔버스를 떠나 다른 재료에 얼마든지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자신감을 그때 얻기도 했다. 돌에 형상을 만들면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 같았다.
 
가끔은 하늘을 보며
 가끔은 하늘을 보며
ⓒ 박병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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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작은 돌에 그림을 그려 발표했다. 사람들의 반응이 좋았다. 내가 추구하는 소통 미술의 진가가 나타났다. 이후 내 돌 그림이 본격적으로 알려졌다. 2017년에 수원 시립 아이파크미술관에서 돌 그림으로 초대전을 열었다. 미술 평론가들의 반응이 좋았다. 생태주의적 관점으로 독창적 시도를 했다는 것이었다. 돌 그림이 대상의 재현이라는 비판적 시각의 평론가도 있었다. 그런 의견을 간과하지 않고 작품 제작에 몰두했다. 결코 재현이 아니라 나의 창작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만의 메시지를 담으며 진행 중이다.

이곳에서는 호미만 대면 돌이 나온다. 돌이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 온다. 무생명체인 돌이 '나는 하오개의 부석사다. 하오개의 복바위다' 라고 말을 걸으며 얼굴을 보여준다. 앞면이 아니면 뒷면을 본다. 그럼 반드시 맞아 떨어지고 그리기에 성공한다. 평범한 돌이 어느 화가의 눈에 띄어 전혀 다른 세계로 재탄생한다. 돌에 생명을 불어 넣는 작업이다. 돌이 좀 작아도 괜찮다. 여러 개의 돌을 연결하여 시리즈로 연결하면 된다. 이번 전시회(현재 평창 진부아트스튜디오에서 전시 중) 때 아홉 개의 돌로 한 개의 이야기를 만들었다. 반응이 매우 좋다."

- 야생화(산풀꽃)를 돌 그림에 애용하는 이유는?

"이곳은 산풀꽃이 자생하기에 최적의 환경이다. 여분의 밭에 농사지을 생각은 없었으므로 근처에 있는 식물을 옮기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 종의 보존을 도모하고 싶었다. 그러면서 작품의 소재로 활용했다. 산풀꽃은 강인한 생명력으로 우리 곁에 오랫동안 함께했다. 산풀꽃만 보면 행복했고, 긍정적인 사고가 확장됐다. 이곳은 산풀꽃 500여 종이 함께 있는 화가의 식물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곳에 있는 모든 꽃이 내 작품에 활용되고 소재로서 가치가 심대하다. 화가로서 꽃을 활용하면 작품의 확장성이 커진다. 매력 넘치는 작업이다."

- 돌 그림과 캔버스 전을 열 계획이라고 들었는데.

"2년 후에 서울에서 규모 있게 작품전을 열 예정이다. 주제가 있는 기획전이 될 것이다. 돌과 캔버스는 항상 병행하고 있다. 내 작품을 원하는 분들에게 아주 괜찮은 소장 기회가 될 것이다."

자연이 없다면 나도 없다

- 평창군에 귀촌하여 어떻게 생활했나.

"여기 와서 동아리 형식으로 '평창미술인협회'를 조직했다. 연 2회 전시회를 열어 올해로 17회째 진행 중이다. 아내도 회원으로서 함께 활동하여 매우 든든하다. (웃음) 2006년 엄청난 수해를 맞아 강원도에서만 피해액이 1조 3193억 원에 다다를 정도였다. 이런 시름에서 벗어나려고 평창 송어 축제, 평창 고랭지 김장 축제, 오대산천 산나물 축제가 이어졌는데, 이러한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한 일들에 홍보 담당이나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매월 발행하는 평창군 소식지에 군민 기자단으로 활동하며 지역 홍보와 발전에 일익을 담당했다."
 
권용택 - 이향재 화가 부부
 권용택 - 이향재 화가 부부
ⓒ 박병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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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부 화가로서 두 분의 그림 세계를 요약한다면

"아내는 행복한 화가다. (웃음) 남편이 개인 교습을 했고 아내는 독립했다. 나는 아내의 그림에 간섭하지 않고 오직 격려로 일관한다. 나는 전문 화가로서 아내가 혹시라도 내 그림을 닮을까 봐 걱정을 한다. 아내가 내 그림 세계를 닮는다면 그것은 결코 옳지 않다. 자기만의 세계를 가야 한다. 아내는 야생화를 키우며 애지중지 관리한다. 그러면서 식물과 소통하고 교감한다. 고개 숙이고 엎드려야 볼 수 있는 식물 세계와 교감하며 화폭에 담아낸다. 이를 압축하면 생태 미술이라고 할 수 있다.
 
식물과 소통하고 교감하며 생태 미술 화가로 거듭난 이향재 화백
 식물과 소통하고 교감하며 생태 미술 화가로 거듭난 이향재 화백
ⓒ 박병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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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에는 아내의 과거와 현재가 상존한다. 그림의 오른쪽 하단을 확대하면 현재 자연과 생태에 교감하며 사는 자신의 모습이 담겼다. 나무 주변에는 아내가 애지중지하여 돌본 꽃들이 무수히 그려 있다. 밤나무엔 아직 잎이 돋지 않았다. 밤나무는 늦게 잎을 드러낸다. 계절적 배경이 봄이라서 그렇다. 이곳 백석산 하오개 생태를 축약해서 표현했다."

- 이곳으로 귀농 귀촌하는 분들에게 추천사를 하신다면?
"한마디만 하겠다. 자연이 살아 있는 곳이다."

- 인터뷰 마무리하며 한 말씀
"큰 욕심 없다. 내 작품 세계에 진전이 있다면 좋겠다. 보다 깊이 있는 작품을 만들고 싶다.이 산골에서 느끼는 감정은 변치 않을 것이다. 자연이 없다면 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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