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9.07 17:46최종 업데이트 22.09.21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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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가 SF를 친밀하게 느끼도록, 은밀하게 접근해 진입장벽을 슬그머니 무너뜨립니다. 이를 위해 SF 읽는 모습을 생활밀착형으로 전달합니다. [편집자말]
종종 SF에 관한 강의를 하고 있다. 근래 한국 SF가 각광받고 있는 덕이다. 보통 첫 시간에는 SF를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지, SF 소설을 어떻게 읽으면 좋을지, 읽으면 우리가 무엇을 얻는지 등을 이야기 한다. 다시 말해 "SF는 정말 끝내주는데..."다.

뻔하다면 뻔하고 새롭다면 새로운 이야기다. SF를 '우리 장르' 삼아 읽고 쓰는 집단에서는 쉽게 접할 법하지만, 아직 대중적으로 자리 잡지는 못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한 강의에서도 나는 SF 소설이 어떻게 편견을 습격하고 우리의 무의식을 변화시키는지 이야기했다.

나쁘지 않은 도피, SF

사람들은 흔히 SF를 허무맹랑하고 비현실적인 이야기라고 여긴다. 그 때문에 SF에 나오는 낯선 세상을 덜 경계한다. 예를 들면 <스타 트렉> 오리지널 시리즈가 SF 드라마였던 덕분에 당대의 반공주의 검열을 다소 피했던 것처럼. 당시에는 이례적으로 흑인 여성을 장교로 삼고, 할리우드 최초로 흑인과 백인 간의 키스 장면을 연출했던 것처럼. 그리고 이런 비현실은 우리의 무의식에서 싹을 틔운다. "그러면 왜 안 돼?"라고.
 

책 <세 개의 달> ⓒ 알마


듀나의 소설 '셰익스피어의 숲'에서도 비슷한 구절이 나온다. 얼마 전 인터뷰를 준비하느라 단편집 <세 개의 달>(SF2021 판타지 오디세이)을 다시 읽었는데, 듀나가 쓴 '셰익스피어의 숲'이 그중 첫 번째로 실린 단편이다. 처음 읽은 뒤로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진 않았지만, 찬찬히 다시 읽다 보니 전에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던 부분이 새삼스레 눈에 들어왔다. 예를 들면 이런 부분이다.
 
"판타지와 SF 장르에 속한 모든 작품은 현실 세계로부터의 도피입니다. 그게 가장 중요한 목표입니다. ... 전 이런 도피가 나쁘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 자칭 현실주의자들은 자신이 갇혀 있는 현실의 작은 구석만을 봅니다. 하지만 환상가들은 하늘로 날아올라 현실 전체를 조망할 수도 있고 지상에서는 오염된 공기 때문에 볼 수 없는 더 높은 곳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49쪽)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소설속 SF 작가다. <셰익스피어의 숲>은 작가가 소설을 만드는 과정을 서술하는 소설이다. 화자인 작가(인 척하는 캐릭터, 라고 자칭하는 캐릭터)는 자신이 쓰는 소설의 장면과 아이디어를 서술한다.

새로운 행성으로 이사 온 소녀, 숲에 살아남은 외계 미생물 군집, 그리고 이들이 독백처럼 속삭이는 의미 없는 말들. 말하자면 책 속의 책이다. 독자는 소설 속의 소설이 만들어지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셈이다.


작가 화자가 중얼중얼하는 과정은 꽤 재미있다. SF 소설을 쓰기 위한 기법이나 요령이 적절하기 때문이다. 화자는 외계다운 낯선 풍경을 묘사하는 방법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 경우는 위성의 묘사가 도움이 됩니다. 새로운 별자리를 만드는 방법도 있지만 효과는 떨어져요. 달이 두 개 이상 있으면 확실하게 다른 항성계의 다른 행성이지요."(31쪽)

독자인 나는 내심 끄덕거렸다. 맞아요. '두 개의 달'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에서, 애니메이션 <에스카플로네>에서, 다른 여러 곳에서 봤어요. 확실히 직관적으로 와닿더라고요. 이건 비현실이라고.

게다가 작가는 재미있는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중간중간 우리가 현실이라고 느낄 수밖에 없는 재료를 더한다. 아이디어의 출처, 연상되는 이미지, 현대 한국의 사건 등을 소설 안으로 끌어들인다.

화자인 작가가 알려주는 '소설 안의 소설'과 우리가 읽는 '소설 바깥의 소설'의 거리는 급격히 줄어든다. 젊은 여자 아이돌의 자살 사건 이야기를 읽으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앞에서 인용한 '현실 세계로부터의 도피' 뒤에는 무거운 문장이 이어진다.
 
"단지 앞이 보이지 않는 현실에 치이면 이 모든 게 변명처럼 보입니다. 전 언젠가 동료 작가에게 지금 동시대 젊은 남자들의 여성 혐오를 언급하지 않고 현대 배경의 청소년 소설이나 이성애 로맨스를 쓰는 것이 과연 정직한 것인가 물은 적 있습니다. 전 둘 다 안 쓰니까 이런 말을 막 던져도 별 문제가 없었지요. 지금은 이런 생각이 듭니다. 지금 사회의 저열함이 어떻게 극복되었는지를 설명하지 않고 더 나은 미래를 그리는 건 마찬가지로 부정직한 게 아닐까? 이를 상상하는 것은 SF 작가의 의무가 아닐까?" (50쪽)
 
SF가 현실과 충돌하는 순간에 튀는 불꽃

SF에 찬사를 바칠 때 나는 언제나 진심이었지만 그게 속내의 전부는 아니었다. 더욱 진심으로 솔직하게 말할 때는, SF가 현실을 변혁한다는 말은 과장일지 모른다고 털어놓는다.

SF와 같은 비현실이 현실의 오염에서 우리를 늘 끌어올려주진 않는다. 이는 외면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SF가 그리는 낙관적인 미래는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을 생략한, 무책임한 상상이다. 이 또한 사실이다.

그리고 물론, SF와 같은 환상과 도피의 세계가 현실 세계와 충돌하는 순간 어떤 불꽃이 튄다는 점도 확실한 사실이다. SF는 구름 위의 이야기일진 몰라도 사상누각은 아니다. 현실에서 쌓아올린 고민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단편집 <세 개의 달>은 두 개의 달이 존재하는 비현실에 현실의 달을 하나 더 합친다.

단편집 기획의 기반이 된 북서울미술관 전시 프로그램 'SF 2021: 판타지 오디세이'는 SF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이미 현재 속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로 존재하므로 판타지의 형태로 말할 수밖에 없는 것". SF의 세계는 현실도피로 뻗을지언정 뿌리는 현실을 깊이 파고든다. 그럴 수 있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는 여전히 과장, 혹은 과대포장일지도 모른다. 나는 대신 자기실현적 예언이라는 표현을 많이 쓴다. 자기실현적 예언은 자주 성취된다. '정말 그렇게 될 것이다'를 진심으로 말하고 다니다 보면 정말 그렇게 된다.

나로서는 SF가 "동료 시민에 대한 혐오를 최대한 줄이고 희망을 유지하며 의미 있는 미래를 상상"(51쪽)하게 해준다고 믿지 않을 도리가 없다. SF 소설가인 작가 화자의 말을 빌리고 싶다.
 
"도피는 저에게 가장 중요한 작업 동기입니다. 저는 과거로 도피할 수 없기 때문에 미래로 달아날 수밖에 없어요. 아무리 우리가 기후변화, 대멸종, 약자 혐오, 극단적인 빈부격차 그리고 총체적인 저열함을 향해 달려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해도 저에겐 향수로 미화된 과거는 탈출구가 아닙니다. 미래밖엔 대안이 없어요." (20-21쪽)  



세 개의 달 - SF2021 판타지 오디세이

듀나, 심너울, 정지돈, 조예은, 배명훈 (지은이), 알마(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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