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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일본 승려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와 함께 금남 최부가 쓴 <금남표해록>은 세계 3대 중국 기행문으로 꼽히고 있다. 금남 최부는 역사서인 <동국통감> 편찬에 참여하는 등 많은 저술활동을 하였지만 최부를 말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 중에 하나가 <표해록>이다.

<금남표해록>은 최부가 1487년 제주도 추쇄경차관이란 관직으로 부임하여 갔다가 아버지의 부음 소식을 듣고 육지로 나오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한 이야기를 쓴 것이다.

최부는 표류하여 중국 절강성 영파부 연해에 도착, 내륙지방을 거쳐 다시 우리나라로 오게 되는데 약 6개월 가량 중국에서 겪고 느낀 과정을 적은 표류견문기를 남겼다. 최부는 그의 나이 35세에 성종의 명에 의해 1488년(성종19년) 이 표류기를 완성하여 바쳤다.

그런데 이 책은 저작된 지 80여년 뒤인 1569년에야 외손자 유희춘에 의하여 간행되었고 1578년에 다시 재간행되었다. <금남표해록>이 간행된 것은 외손자인 유희춘의 힘이 매우 컸다. 유희춘은 외할아버지 최부에 대한 자부심과 존경심이 컸던 것 같다. 그는 <미암일기>에서 자주 최부에 대해 언급하며 <금남표해록>과 <금남집>의 발간 과정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미암은 최부의 <금남집>을 직접 편집하고 발문을 써 간행하였다. 또한 중국 기행문인 <표해록>을 직접 간행한 것을 보면 그의 외조부에 대한 애정을 엿볼 수 있다. <미암일기>에서 이 책들을 간행하기 위한 흔적들을 찾아 볼 수 있다.

1568년 戊申 8월 초1일
나사침을 붙잡아 두고 함께 금남선생집을 교정했다.


미암 유희춘은 조부인 최부의 생애를 찬(撰)한 <금남선생사실기>(錦南先生事實記)를 남겼는데, 이 기록에서 최부에 대해 말하기를 "경술과 기절이 뛰어나 성종대왕에게 발탁되어 시종신(侍從臣)이 되었고 박학과 씩씩한 기절로 온 세상에 이름이 났었다"라고 평한다. <미암일기>에서는 유희춘이 표해록을 간행하기 위한 일을 꾸준히 추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1569년 己巳年 8월 15일
표해록의 발문을 초했다. 관서로 보내기 위함이다.

1569년 己巳年 8월 17일
지평 최정과 유경심이 이어서 다녀갔다. 경심이 아침 저녁 두 번을 왔는데 나를 위하여 표해록의 발문을 고쳐줘 기쁘다.


해남 인물사의 개산조

미암 유희춘이 태어난 해남은 고려시대까지는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이 거의 없을 정도로 문풍(文風)이 별무한 곳이었지만 16세기 사림시대를 통해 문향 고을로 변모해 간다.

미암 유희춘의 아버지 유계린이 순천에서 살다가 최부의 사위가 되어 처가 고향인 해남에서 살게 된 것도 금남 최부로 인해 이 지역에서 문풍의 기반이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낯선 유배자나 드나들던 해남이 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여 16세기 조선 사림의 한 축을 형성한 것은 최부가 학문과 문화적 기틀을 형성하는데 큰 기여를 했기 때문이 다. 이 때문에 최부를 해남 인물사의 서막을 연 사람이라 하여 해남유학의 '개산조開山祖'라 부르기도 한다.

최부가 제주로 떠난 관두량

금남 최부는 본래 나주시 동강면 인동리 성지촌에서 태어났다. 그가 어떻게 하여 해남에 있는 해남정씨와 연연을 맺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해남에서 최고 거부이자 영향력을 지닌 호장직의 해남정씨 정귀감의 사위가 됨에 따라 처향인 해남으로 오게 된 것이다.

최부의 <표해록>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 중 하나가 해남 화산면 관두량이다. 관두량은 제주로 부임하는 목사나 사신, 제주 등 인근 섬으로 귀양 가는 사람들이 이용하는 항구였으며 고려시대에는 중국으로 향하는 국제항의 역할도 하였다. 지금은 관두량 앞의 바다를 막은 간척사업으로 인해 영터만 남아있고 그 흔적을 찾기 어렵다.
 
금남 최부가 추쇄경차관에 임명되어 제주로 가기위해 출발한 포구이다. 표해록은 제주로 가기위해 이곳에서 배를 기다리는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 해남 관두량 포구 금남 최부가 추쇄경차관에 임명되어 제주로 가기위해 출발한 포구이다. 표해록은 제주로 가기위해 이곳에서 배를 기다리는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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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부는 1487년(성종18) 7월 추쇄경차관에 임명되어 제주로 떠나게 되는데 그가 쓴 <표해록>에는 제주도로 가기 위해 이곳 관두량에 머물며 40여일 동안 순풍을 기다리는 이야기가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표해록>에는 당시 제주의 풍속과 서해 바다의 정황 그리고 중국 내 운하와 그 주변의 풍광 등이 잘 묘사되어 있으며, 중국의 수차제도에 대해 소개하는 등 중국의 새로운 문물에 대한 그의 실용적인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최부의 묘 늘어지와 출생지 동강마을
 
<금남표해록>을 썼던 최부의 묘가 몽탄면 이산마을 늘어지에 있다. 늘어지 전망대에서 보면 굽이쳐 흐르는 곡강의 모습이 아름답다.
▲ 영산강 곡강의 늘어지 <금남표해록>을 썼던 최부의 묘가 몽탄면 이산마을 늘어지에 있다. 늘어지 전망대에서 보면 굽이쳐 흐르는 곡강의 모습이 아름답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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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강을 따라 나주시 동강면과 무안 몽탄에 이르면 영산강이 한번 굽이쳐 흐르는 '늘어지 곡강'이 있다. 이런 곳은 보통 주변이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한다. 이곳에는 영산강을 내려다 보는 강가에 유서 깊은 정자인 '식영정'이 있는데 바로 옆 이산마을에 최부의 묘가 있다.

최부가 태어난 곳은 나주시 동강면 성지촌이다. 그런데 최부는 강 건너 영산강이 휘돌아 감고 있는 늘어지, 행정구역으로는 무안군 몽탄면 이산마을에 묻혀 있다. 나주시 동강면 '늘어지 곡강 전망대'에 오르면 영산강이 휘돌아 굽이쳐 흐르는 아름다운 곡강의 전경을 볼 수 있다. 늘어지는 멀리서 보면 한반도의 형상을 하고 있다.

최부의 명성에 비해 그가 태어난 동강면 성지마을에는 '금남최부유허비'만 덩그런이 남아 그의 흔적을 말해 줄 뿐이다. 주변을 의미있게 정비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최부는 지금의 나주시 동강면 인동 성지촌에서 태어났다. 생가마을에는 유허비만 덩그런히 남아있다.
▲ 최부 생가마을 유허비 최부는 지금의 나주시 동강면 인동 성지촌에서 태어났다. 생가마을에는 유허비만 덩그런히 남아있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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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 건너 몽탄 이산 마을에는 최부를 추모하는 재각인 경모재와 최부의 묘가 있다. 무덤 앞에는 문인석이 호위하듯 서 있고 오래된 여러 개의 묘비가 들어서 있다. 위쪽에는 아버지 최택의 묘가 있다. 최부의 묘는 유희춘의 아버지인 유계린이 모셔져 있는 해남군 마산면 모목동牟木洞에 있다가 1947년 후손들에 의해 무안군 몽탄면 이산마을로 옮겨졌다.

그가 지은 <표해록>을 기념하여 그린 듯 경모재 담벽에는 표해록의 장면들을 묘사한 여러 그림들이 있다. 약간은 만화 스타일로 보이기는 하지만 <표해록> 속에 담긴 장면들을 회상할 수 있게 한다.

최부는 김종직의 제자로 1498년(연산군4)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김굉필 등 동문들과 함께 함경도 단천으로 유배되었다가 갑자사화 때 처형당한 비극적인 인물이다. 당시 많은 인물들이 사화 속에서 유배되거나 목숨을 잃기도 하였지만 금남 최부 역시 사화의 한복판에서 생을 마감한다. 그가 갑자사화로 처형당할 때 그의 가족은 해남 마산면 버드나무골(상등리)에 살았다고 한다.
 
무안군 몽탄면 이산마을 늘어지에 최부의 묘가있다. 아버지 최택과 함께 묻혀 있다. 본래는 해남 마산면 모목동에 있었으나 1947년 후손들이 이곳으로 옮겼다.
▲ 금남 최부 묘역 무안군 몽탄면 이산마을 늘어지에 최부의 묘가있다. 아버지 최택과 함께 묻혀 있다. 본래는 해남 마산면 모목동에 있었으나 1947년 후손들이 이곳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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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금남표해록, #최부, #늘어지, #관두량, #곡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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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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