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9.21 05:21최종 업데이트 22.09.21 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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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15일 엘 그리토를 위해 멕시코 대통령궁 앞 헌법광장 소칼로에 시민들이 운집했다. 오후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지만, 시민들은 독립기념일 행사를 즐기며 자리를 지켰다. ⓒ 대통령 공식홈페이지

 

ⓒ 대통령 공식홈페이지

 
'행복한 조국祖國의 달입니다  ¡Feliz el mes patrio!'

9월이 시작되면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한결 같은 축하 인사를 건넸다.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지역에서는 통상 생일이나 크리스마스, 신년에 행복을 뜻하는 펠리스(Feliz)라는 단어를 붙여 서로 축하인사를 전한다. 그런데 멕시코의 경우 9월 한 달을 통째로 펠리스라는 단어와 함께 축하하며 보낸다. 말 그대로 '행복한 조국의 달'이라는 것인데, 멕시코의 독립을 기념하는 날이 9월 16일이기 때문이다.

조국의 달

자국의 독립 혹은 건국을 축하하며 한 달 내내 '행복한 조국의 달' 인사를 주고받는 나라가 이 세상에 과연 몇이나 될까? 어쩌면 멕시코가 유일할 것이다. 유난히 축하와 파티를 좋아하는 성정을 가진 멕시코 사람들이 아니라면 어찌 감히 독립, 혹은 건국을 핑계로 한 달 내내 기뻐하며 축하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말뿐인 축하가 아니라 온 국민이 엄청난 파티를 준비하고 있는 상황이라면 외부의 시선으로는 이해가 쉽지 않을 것이다.


9월 초부터 어디를 가나 축하가 난무했다. 내 조국이 아닌 나라의 독립 기념에 내게도 덩달아 축하가 쏟아졌고 나 또한 축하를 쏟아냈다. 이곳 멕시코에서 9월을 지내는 자라면 누구라도 펠리스라는 말과 함께 축하를 주고받았다.

9월이 되면서 거리 곳곳에도 멕시코 국기의 삼색(초록색, 흰색, 빨간색)이 어우러진 애국을 상징하는 물건들이 진열되기 시작했다. 차량들은 양 옆으로 크고 작은 국기를 달고 달렸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삼색이 어우러진 장신구 하나쯤은 몸에 착용해야 할 것 같은 그런 달이 바로 멕시코의 9월이다.
 

멕시코 독립기념일엔 멕시코 국기에 담긴 삼색 (초록색, 흰색, 빨간색)으로 사람들이 치장을 한다. ⓒ 멕시코 대통령처

 
16일, 독립기념일이 다가올수록 사람들의 설렘은 농밀해졌다. 코고 작은 가게들은 대목을 맞아 모든 것을 삼색으로 치장하리라 맘먹은 듯했다. 사방 어디에 눈을 둬도 그 곳에 삼색이 있었다. 소비 수준 기준으로 멕시코 최대 명절이라 할 수 있는 크리스마스 정도는 아니지만 '조국의 달' 특수는 곳곳에서 느껴졌다. 게다가 코로나바이러스 여파로 지난 2년 동안 독립기념일 행사가 없었던 탓에 올해는 작심하고 이 날을 즐기리라 하는 굳건한 의지들이 여실히 느껴졌다.

직장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미 9월 초 학과 차원의 독립기념일 파티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독립기념일을 며칠 앞 둔 지난 월요일(9월 12일) 공문이 내려왔다. 독립기념일 하루 전날인 9월 15일에 모든 수업이 휴강된다는 소식과 당일 전 직원이 멕시코 독립기념일을 축하하는 의미로 점심을 같이 먹으며 연회를 즐길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9월 15일, 수업이 휴강 되었으니 출근하지 않고 16일(금요일)부터 이어질 연휴를 늘려 볼까 생각하였지만, 전 직원 연회에 빠질 수 없었다. 학교에 나가보니 다들 멕시코 국기에 들어간 삼색 장식을 몸 어딘가에 두르거나 걸치고 점심에 있을 잔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학교 안에서는 학생들뿐 아니라 교직원들에게도 음주가 엄격히 금지되지만 날이 날이니만큼 복도 한 편에 맥주가 가득 쟁여진 커다란 얼음 상자가 놓여 있었다. 오전 일정은 정상 근무였지만, 일손이 잡힐 리 없었다.

점심시간이 되자 맞춤 음식이 도착하고 당일을 위해 특별히 허락된 맥주 상자가 연회장 안으로 들어왔다. 여느 파티 같았다면 늦은 밤까지 이어짐이 당연하겠으나 저녁 전 마무리되었다. 멕시코에서는 명절 연휴가 시작되는 오후였고 그날 밤 행복한 조국의 달 모든 일정 중 클라이맥스인 '엘 그리토(El Grito, 외침)'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El Grito(외침)'가 있던 9월 15일은 오후부터 멕시코 많은 지역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El Grito(멕시코 만세)를 온전히 즐기기 위해 이른 오후부터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 멕시코 대통령처

 
엘 그리토

엘 그리토, 멕시코 식 만세삼창이다. 통상 멕시코 독립기념일 자정이 되기 직전 전야제 형태로 행해지는데 아주 작은 지방정부부터 중앙 연방정부에 이르기까지 해당 행정단위 중심광장에 수백 명 혹은 수십 만 명이 모여 각 정부 수장의 선창에 따라 멕시코 만세를 외치는 행사다.
 

매년 독립기념일마다 대통령 내외가 선 대통령궁 중앙 발코니 양측으로 그 해 초대받은 사람들이 같이 나와 행사에 참여하는데 올해는 우루과이 전 대통령 호세 무히카와 볼리비아 전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를 비롯 체 게바라의 딸, 줄리안 어산지의 형과 아버지, 그리고 마틴 루터 킹의 가족들이 자리를 함께 했다. ⓒ 대통령 공식홈페이지

  
우리나라 광복절 행사의 엄숙함이나 경건함과는 거리가 멀다. 온갖 흥이 발산된다. 정치 수장들은 212년 전 독립 전쟁이 선포되던 그 날 독립 영웅 미겔 이달고 신부의 외침을 인용하면서 멕시코가 더 이상 유럽의 속국이 아님을 다시 한 번 온 세상에 천명한다. 이어 독립 영웅들의 이름을 호명하고 마지막으로 '멕시코 만세(¡Viva México)!'가 반복해서 이어진다.

애석하게도 멕시코 독립기념일은 허리케인이 이 나라를 향해 줄지어 올라오는 계절의 한 중심에 있다. 그러니 어느 해 독립기념일 중심행사인 엘 그리토에 비가 내리지 않은 날이 극히 드문데, 자정이 가까운 밤 그 비를 뚫고 매년 멕시코 전역에서 숱한 사람들이 자기 고장의 중앙광장에 모여 '멕시코 만세'를 외친다.

올해 수도인 멕시코시티 헌법광장 소칼로(Zócalo)에 모인 사람은 13만 명에서 15만 명으로 집계되었다. 역시 당일 초저녁부터 비가 내렸지만 오후부터 운집한 시민들은 밤 11시 대통령궁 발코니에 나선 대통령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Andrés Manuel López Obrador)의 '엘 그리토'가 끝날 때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수도 멕시코시티와 같은 세련됨과 화려함은 없지만, 아주 작은 시골 마을에서도 '엘 그리토'는 절대 빠질 수 없는 행사다. 어디든 마을 중심 관청에서 마을의 정치지도자가 행사를 주관한다. 우리 마을도 9월 15일 22시 정각 시장과 마을 '공식 미녀들'이 관청 발코니에 온갖 치장을 하고 나와 212년 전 멕시코 과나후아토 주에서 미겔 이달고 신부가 독립전쟁을 선포하며 외쳤던 선언을 따라 낭독했다.
 

우리마을 시장은 '엘 그리토El Grito' 의식에 우리마을 '공식 미녀들'과 등장하여 마을 사람들과 함께 '멕시코 만세'를 외쳤다. 매년 9월 초 선발하는 마을 공식 미녀들은 10월에 있는 마을 축제와 11월에 있을 주 축제에서 마을을 대표하는 '미녀'들로 활약한다. 멕시코는 여전히 미녀 선발대회가 작은 마을뿐 아니라 주 단위 혹은 국가 단위, 그리고 각 기관의 공식 행사로 활발하다. ⓒ 페이스북캡처

 
우리 마을 역시 이른 저녁부터 부슬부슬 비가 내렸지만 마을 광장을 향해 모여드는 사람들의 열기는 식지 않았다. '외침'이 시작되기 전 거한 춤판이 벌어졌고, 역시나 외침이 끝나고 난 뒤에도 길게 춤판이 이어졌다. 다음 날 만나는 사람들마다 어젯밤 마을 광장에 유난히 많이 모였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독립기념일 당일인 9월 16일에도 축제의 여파는 이어졌다. 지난 밤 늦게까지 시민들의 축제장이었던 멕시코시티 헌법광장 소칼로에서는 16일 오전 군 병력 시가행진과 사열이 이루어졌다. 우리 마을도 이른 아침부터 학생들이 시가행진을 하고 오후 늦도록 마을 광장에서 경품이 걸린 행사들이 진행되면서 잔치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9월 15일 밤, 우리마을 시장과 마을 사람들의 El Grito 행사가 끝나고 불꽃 놀이가 시작되었다. 작년과 재작년 코로나바이러스 창궐로 독립기념일 행사가 전면 취소되어 올해 마을 사람들은 일찍이 이 날을 기다려왔다. '조국의 달'인 만큼 불꽃 놀이도 멕시코 국기의 삼색인 빨강색, 하얀색, 초록색을 따라간다. ⓒ 림수진


그렇게 멕시코는 212번째 9월을 2022년의 버전으로 보내고 있는 중이다. 그간의 9월이 대동소이 하겠지만, 2022년의 9월 '외침'에는 그간의 '외침'과 또 다른 '외침'이 있었기에 기록한다.

80kg를 허리에 묶고 104m 높이에 오른 두 여성

대통령이 만세를 외치고 소칼로에 운집한 십 수만 명이 멕시코 만세를 연호하던 그 시간 그 곳으로부터 약 5km 정도 떨어진 곳에서 두 명의 여성이 무게 80kg에 달하는 대형 현수막을 허리에 묶어 끌고 높이 104m에 이르는 멕시코 독립 200주년 기념탑의 수직벽을 암벽등반 형식으로 오른 후, 그 곳에서 그들이 끌고 올라간 폭 4m, 길이 100m의 현수막을 펼쳐 내리기 위해 악천후 속에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멕시코 강제 실종자 가족 모임인 '너를 찾을 때까지Hasta Encontrarte' 회원 중 한 명이 멕시코 독립 200주년 기념탑 수직벽을 오르며 현수막을 끌어 올리고 있다. '16년 간의 면책'이라는 말과 '언제쯤 멕시코는 이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라는 말이 적힌 현수막은 폭 4m, 길이 100m, 무 게 80kg에 이른다. 해당 현수막은 두 명의 회원에 의해 기념탑 최상부에 올려졌으나 기상악화로 인해 펼치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고, 결국 시민보호청 대원들의 협조로 무사히 펼칠 수 있었다. 9월 15일 오전 6시에 시작된 현수막 운반 및 펼침 작업은 익일 새벽 2시 30분 경 완료되었다. ⓒ Hasta Encontrarte 페이스북

 
보는 것만으로도 아찔할 만큼 위험천만한 일이었지만, 아래에서 그들을 지지하는 또 다른 여성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두 명의 여성이 수직벽을 오르기 시작하던 순간 그들을 저지하던 경찰들과 몸싸움을 벌여가며 시간을 벌어준 수십 명의 여성들은 2006년 마약과의 전쟁이 시작된 이후 카르텔에 의해서 혹은 공권력에 의해서 강제 실종된 10만여 명 중 누군가의 어머니, 할머니, 이모, 고모, 숙모, 그리고 언니들과 동생들이었다. 그들 모두 멕시코 강제 실종자 가족 모임인 '너를 찾을 때까지(Hasta Encontrarte)' 소속이었다.
 

멕시코 강제 실종자 가족 모임인 '너를 찾을 때까지Hasta Encontrarte' 두 명의 회원들이 대형 현수막을 허리에 묶어 수직벽을 올라 104m 상공으로 운반하는 동안 나머지 회원들이 아래에서 실종된 가족들의 사진을 펼쳐 놓고 시민들의 관심을 촉구하고 있다. 이들은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 있는가, 우리의 자식들이여!'라고 외치면서 시민들을 향해 관심을 부탁하고 있다. 2020년 유엔은 멕시코 강제 실종자 수를 1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고 그들 중 97%는 멕시코에서 마약과의 전쟁이 시작된 2006년 이후 발생한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반면 실종 사건 관련한 수사는 지극히 미진하여 책임자 처벌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 Hasta Encontrarte 페이스북

 
2022년 9월 15일 오전 6시 경 멕시코 독립 200주년 기념 조형물의 수직벽 등반을 시작한 여성들은 다음 날 새벽 2시 30분 경 그들이 허리에 묶어 끌고 올라간 대형 현수막을 펼쳐 내릴 수 있었다. 차가운 비바람과 스무 시간 이상 싸워가며 목숨 걸고 올라간 두 명의 여성과 아래에서 그들을 지원하던 수십 명의 여성이 완수한 임무였다.

'16년 동안의 면책', 그들이 104m 상공에서 펼쳐 내린 현수막에 적힌 글이었다. 2006년 당시 대통령이었던 필리페 칼데론(Felipe Calderón)이 마약과의 전쟁을 시작한 이후 현재까지 마약 카르텔과 군 병력이 일상다반사로 총격전을 벌이는 와중에 실종된 시민들의 숫자가 10만 명을 넘어섰지만 책임자에 대해 처벌은커녕 제대로 된 수사조차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 대한 개탄이었다.
 

멕시코의 모든 사람들이 '멕시코 만세'를 외치던 2022년 9월 15일 늦은 밤, 멕시코시티 멕시코 독립 200주년 기념탑 위로 올라간 여성 두 명이 아래쪽을 향해 대형 현수막을 펼쳐 내리고 있다. 이들은 멕시코 강제 실종자 가족 모임인 '너를 찾을때까지Hasta Encontrarte' 회원들이며 당일 오전 6시 경 104m 높이의 독립 200주년 기념탑 수직벽을 오르기 시작해 늦은 밤 현수막을 펼쳐 내리기 시작했다. 현수막 펼침은 익일 새벽 두 시 반 경 마무리되었으며 당일 경찰에 의해 철거되었다. ⓒ Hasta Encontrarte 페이스북

 
2022년 9월 15일 밤 11시, 대통령궁 발코니에 선 대통령이 '멕시코 만세'를 외치고 소칼로에 운집한 13만 명 이상의 시민들이 다시 만세로 연호하는 그 시간, 높이 104m에 달하는 멕시코 독립 200주년 기념조형물을 둘러싼 이들과 그 위에 올라간 두 명의 여성들도 '멕시코 만세'를 외쳤다. 다만, 소칼로와 5km 떨어진 그 곳에서 외쳐진 '멕시코 만세' 뒤에는 '10만 명이 강제 실종된'이라는 부연이 이어졌다.

"지금 저곳 소칼로 광장을 가득 메우고 만세를 부르는 사람들, 딱 그만큼의 사람들이 이 나라 멕시코에서 지난 16년 간 강제 실종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누구도 제대로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곳의 우리가 불행한 이유입니다."

2022년 9월 15일 밤 11시, 모두가 '멕시코 만세'를 외치던 밤, 두 명의 동료를 104m 상공 차가운 비바람 속에 둔 채 그 아래서 절규하던 한 여성의 외침이었다. 멕시코에서 2022년 9월을 보낸 이들이라면, 원래의 흥겨운 '외침'에 더해 이 여인의 외침을 기억하고 기록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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