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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거라 삼팔선> 신문 광고(1948년)
▲ <가거라 삼팔선> 신문 광고(1948년) <가거라 삼팔선> 신문 광고(1948년)
ⓒ 이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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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이 되었다.

35년 일제의 폭압에서 풀려났다. 하지만 민족의 자주적인 역량이 아닌 해방은 남북분단과 미군정이라는 새로운 사슬로 나타났다. 그럼에도 우리 말과 노래를 되찾은 해방이었다.

1945년 해방과 더불어 아리랑은 묻힌 덤불 속에서 쉴 새 없이 뛰쳐 나온다. 이 시기의 아리랑은 새로운 창작보다 묻힌 것, 가려진 것,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던 아리랑들을 되찾아냄으로써 아리랑 세상을 만나고 확장을 가속화시킨다. 양악에 의한 신민요 새 아리랑 가락도 탄생되고, 현대가요 아리랑도 태어난다. (주석 1)

조선총독부가 아리랑을 금지곡으로 탄압해오면서 일제강점기 후반에 국내에서는 철저히 묻혀 있었다. 그래서 해방이 되고서 금방 새로운 아리랑이 나오기 어려웠다. 해방이 되면서 창작보다 묻혀진 것이 불려지게 되고, 해방정국의 혼란과 미구에 닥친 6.25 전쟁의 와중에서도 민중은 되찾은 아리랑을 찾아서 불렀다.

해방공간에서 많이 불린 노래는 <가거라 삼팔선>, <달도 하나 해도 하나>, <귀국선>, 그리고 <독립행진곡> 등이었다. <독립행진곡>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어둡고 괴로워라 밤이 길더니 
 삼천리 이 강산에 먼동이 튼다 
 동포여 자리차고 일어나거라 
 아 해방의 해방의 종이 울린다. (주석 2)

1953년 휴전협정조인 반대 궐기대회 시가행진을 전후해서 불렀고, 술집 등에서 아리랑이 적지 아니 흘러나왔던 일들이 떠오른다. 일제시대에는 눌림과 닫힘의 상황 속에서 아리랑을 열창 내지 은창했고, 해방 후부터는 마음껏 열창하는 시간대와 공간대를 만나게 된 것이다. (주석 3)

앞서 언급했듯이 해방정국의 혼란과 곧이어 닥친 6.25전쟁으로 이 시기에 채록된 아리랑을 찾기 쉽지 않고, 1948년에 나온 <아리랑 삼팔선>이 보인다.

아리랑 삼팔선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38선 고개에 가마귀운다
 38선 고개는 못넘는고개
 3천만 원한이 사못치고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38선 고개는 못 넘는고개

 네가 잘나서 해방이든가
 숫자가 나빠서 따라지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38선 고개가 원수로다
 38선 고개에 사라진낭군
 3년째 들어도 소식이없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38선 고개는 못넘는고개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38선 고개서 발병이 나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38선 고개는 못넘는고개
 아리랑 고개는 넘기나 하련만
 38선 고개는 넘지도 못해 (주석 4)


주석
1> 박민일, <한국 아리랑민요연구>, 80쪽.
2> 조지훈, <한국문화사서설>, 337~338쪽, 탐구당, 1973.
3> 박민일, 앞의 책, 81쪽.
4> <건국공론>, 제29호, 1948.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문화열전 - 겨레의 노래 아리랑]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겨레의노래, #겨레의노래_아리랑,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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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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