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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고교 동창 인맥을 자랑하는 50,60대 남자들은 드물지 않다. 힘센 고위직 관료나 기업인과 고교 선후배 사이여서 업무상 도움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듣는다. 왠지 씁쓸하다. 그들의 끈끈함이 누군가의 불이익으로 이어졌을 것 같아서다.

이 땅의 여성들은 어떨까? 남성들만큼 찐한 고교 동창간 우정에 기대어 사회 생활을 할까? 통계가 없으니 잘 모르겠다. 남성 중심의 조직문화가 강고하게 지속된 나라라서 여성들이 기대할 수 없던 영역이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내 경우, 그저 외따로 떨어진 채 사회 생활을 한 축에 속한다.

다시 만난 여고 동창생들

여고를 졸업한 지 거의 50년. 광화문통에 있던 학교가 강 건너 우리 동네로 이사했다는 걸 아는 정도로, 별다른 관심이 없었던 나다. 올해 봄, 어쩌다 여고 동창 모임에 나갔다.

동기들이 조직한 <서양미술사> 강좌였다. 팬데믹으로 2년 넘게 닫혔던 동창회관이 다시 열린 터라 40여 명이 모여들었다. 가을 학기엔 <오페라 캐릭터를 통해 본 유럽문화사>란 격주 강좌가 열리고 있다.

강사는 이용숙 음악평론가. 첫 두 꼭지는 햄릿과 돈키호테라는 양극단의 캐릭터가 영화와 뮤지컬과 심리학에서 어떻게 쉴 새 없이 변주되고 재해석 되고 있는지에 관해 들었다. 간간히 관련 영상 클립을 본다. 귀에 쏙쏙 들어박힌다. 르네상스와 근현대 유럽 풍속사까지를 종횡무진하며 60대 청중을 초집중하게 만드는 강의다.

김밥을 나눠먹는 뒷풀이가 이어진다. 동기동창인데도 처음 보는 친구들이 꽤 많다. 너나없이 비축한 약간의 군살과 숨길 수 없는 눈가 주름, 우린 서로를 거울처럼 바라보며 어색함을 녹인다.

여고시절, 난 열등감이 많았다. 가난했고 성적은 중하위권에 수포자였다. 물리, 화학, 지학은 나를 괴롭히려 존재하는 과목이었다. 사투리 때문에 가벼운 따돌림도 겪었다. 학교 가기가 싫어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곤 했다. 졸업 후 여고시절은 내 기억에서 지워졌다. 어쩌면 다크 에이지였던 사춘기를 의도적으로 기억에서 삭제했던 걸지도.
 
여고시절 친구들, 50년 만에 만나도 "얘, 쟤"가 단박에 튀어나오는 사이가 된다. 함께 나이들어가는 동지로서 새로 사귀며 돕는 즐거움을 표현하고 싶다.
▲ 아주 오래된 새 친구들  여고시절 친구들, 50년 만에 만나도 "얘, 쟤"가 단박에 튀어나오는 사이가 된다. 함께 나이들어가는 동지로서 새로 사귀며 돕는 즐거움을 표현하고 싶다.
ⓒ 정경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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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난 옛 친구들은 새 친구들이다. 내가 그렇듯이 그들도 50년 전의 그녀들이 아니다. 전업 주부로 살았든, 직장 퇴근 후 집으로 출근하며 살았든, 우리 모두는 각자의 파란만장을 버텨냈다. 직장만큼이나 빡센 수행 커리큘럼이었던 결혼 생활. 나만 그렇게 느꼈을까?

결혼으로 만난 남편 집안과의 문화적 충격에 대처하며 우리들은 화학적 결합에 이르는 지혜를 어떻게든 터득해 냈을 것이다. 한편, 평균 두 아이의 임신과 출산 이후 20~30년에 걸친 양육만큼 각자의 삶을 변화시킨 게 있을까? 결혼의 가장 놀라운 부분은 자신의 안위보다 누군가의 안위가 더 중요해지는 마법을 체험하게 된다는 거다. 엄마, 또는 부모라는 배역이 아니면 거의 경험하기 힘든 '스스로 낮아짐'이랄까.
 
우린 연결될수록 건강하다


여고 졸업 후 뛰어든 시간 속에서 우리는 달라졌다. 지금 누군가는 돈이 많고 누군가는 돈이 적다. 누군가는 잘 나가는 아들딸을 자랑하고, 누군가는 가만히 듣는다. 누군가는 퇴행성 관절염을 호소하고 누군가는 극강의 동안 미모를 내뿜는다. 누구든지 어떤 부분은 성공했고 어떤 부분은 실패했다.

각자 처한 상황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다시 함께 불러 앉힌 건 무엇일까? 그것은 우리가 생애 최대의 과제인 나이 먹기를 앞두고 있어서다. 누구든 평등하게 늙어가고 있어서 유쾌하다. 동지애가 발생하는 시점이다.

이젠 누구도 더 이상 자신의 행복이나 행운을 과장 홍보하지 않는다. 몇몇은 아들딸을 남부럽잖게 키우기엔 성공했으나 그들과의 거리두기에 실패했음을 고백한다. 암 생존자인 친구는 투병 후 세상을 보는 관점이 바뀌었다고 말한다. 부동산 재테크 능력이 뛰어나 부러움을 샀던 그녀, 항암제 투여기간 중, 돈을 써야겠다고 결심했단다.

"돈을 모으려고만 했지 한 번도 돈을 써보지 못한 게 후회됐어. 돈이란 건 움켜쥐고 있는 만큼 다 내 것인 게 아니야. 쓰는 만큼만 내 돈이겠더라고."

그래서 그 친구는 친척, 친구들에게 온라인 쇼핑 택배로 자잘한 선물을 보냈다. 이런 저런 명분으로 밥을 샀다. 아프리카 난민을 돕는 NGO에도 정기 후원을 시작했단다. '남보다 먼저 큰 병을 앓은 이의 지혜'라는 말은 헛말이 아니었다.

베이비부머인 우리를 덮치려는 재앙에 대한 토론도 피할 수 없다. 시댁과 친정 부모 부양에 나름 애썼지만, 자식들에겐 부양 서비스를 기대할 수 없는 낀 세대에게 창궐하는 노후염려증이다. 이래저래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지금 서명해 둬야 한다는 의견들이 많다. 지난 6월 발의된 '조력존엄사법'의 귀추에도 너나없이 관심을 갖는다. 한편, 최대 현안은 여성 평균 수명 90까지 긴 여정을 채울 콘텐츠가 무엇이어야 할지다.

열띤 분위기를 식힐 겸, 나는 이른 저녁에 가기 좋은 혼술 이자카야 정보를 구한다. 제각각 현장 답사 후 단톡방에 올리기로 한다. 홀로서기의 정보력은 역시 여럿이서 힘을 합하는 게 최선!

연금보다 근육이 더 노후 복지에 치명적이라고 말하는 친구에게 엉덩이와 허벅지 근육 유지 꿀팁을 전수받는다. 용감하게 혼자서 식당 삼겹살에 도전한 친구의 '무용담'에 모두들 부러움과 감탄을 연발한다. 60대 후반으로선 쉽지 않은 쾌거라서다.

여고시절 앳된 모습은 사라졌지만 우린 지난 시간동안 진화했다. 60갑자 한 바퀴를 돌아 꽃처럼 아름다운 화갑(華甲)까지 치렀다. 한 친구가 말한다.

"젊었을 때 내 안에 들끓던 억울함도 원망도 어디론가 사라졌어. 참 신기하지. 미워죽겠던 남편에 대한 좋은 기억만이 남았다는 게. 미칠 것 같던 결혼생활이, 지금 생각해 보면 고강도 수행 프로그램 같아. 이번 생에서 겪고 배워서 통과해야할 그 무엇이랄까."

다른 친구가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 60년을 살고 났더니, 이젠 모든 게 좀 담담해. 가족들이 너무 사랑스럽지도 않고 너무 밉지도 않고. 그저 적당히 사랑하게 되더라. 어떤 사람들은 다시 한 번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던데, 난 절대 아니야. 다시 한 번 그 난리 블루스를 벌여야 한다면, 너무 힘들어. 젊은 건 한번이면 족해."

다들 끄덕끄덕. 그렇게 우리는 아주 오래된 친구를 새로 사귀기 시작한다. 서로의 자잘한 성취를 칭찬하고 아픔을 나누기로 한다. 한 생애의 세 번째 30년을 함께 할 동지들을 애틋하게 바라본다. 혼자서 나이 먹는 것보다 훨씬 덜 힘들 것 같다. 심지어 재밌어지겠지. 옆 친구가 말한다. 우린 연결될수록 건강하다고. 정말 그렇다.

덧붙이는 글 | https://brunch.co.kr/@chungkyun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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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세울 것 하나 없는 직장생활 30여년 후 베이비부머 여성 노년기 탐사에 나선 1인. 별로 친하지 않은 남편이 사는 대구 산골 집과 서울 집을 오가며 반반살이 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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