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내가 사는 원룸형 오피스텔은 작은 크기에 비해 꽤 많은 전등이 설치되어 있다. 전구의 개수로만 따지면 방 겸 거실에 8개, 두 발짝만 옮기면 도달하는 주방에 2개, 욕실에는 샤워실에 설치된 알전구까지 포함해 3개, 현관에 센서등까지 모두 14개의 등이 설치되어 있다. 이 작은 방에 웬 전구가 이렇게 많이 필요한가 싶지만, 전구는 각기의 쓰임새와 역할을 지니고 각자의 자리에서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신축 오피스텔이었지만 입주한 지 6년이 넘으면서 손 볼 곳이 한두 곳씩 생겨나고 있다. 방의 전구 8개 중 3개는 이미 고장이 났고, 1개도 불을 켤 때마다 깜빡깜빡 본인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나에게 알려주곤 했다.

전구를 교체할 때가 되었다
 
이 전등을 아무리 보아도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세상의 물건이 아니었다.
 이 전등을 아무리 보아도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세상의 물건이 아니었다.
ⓒ 변은섭

관련사진보기

 
욕실의 전구도 1개는 이미 오래전 수명을 다하였고, 얼마 전 남은 하나마저도 몇 번 껌뻑이더니 끝내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가버렸다. 샤워실에 천장에 붙어있는 작은 알전구 하나로 근근이 버티고 있지만, 어두컴컴한 욕실에 들락거릴 때마다 전구 교체를 더 이상 미룰 수 없음을 절실히 느끼곤 했다.

15년 차 오피스텔 생활자로서 오피스텔에서 계속 살아온 이유는 이렇게 집 안 곳곳 손이 가야 할 때 관리실에 작은 수고비를 지급하면 척척 해결해주기 때문이었건만, 내가 사는 오피스텔의 관리실은 어떠한 관리도 해주지 않는 걸로 규정을 정해놓았단다. 누가 그런 규정을 만들었는지는 입주민 누구도 알 수 없지만, 규정이 그렇다니 어쩔 수 없다.

손재주도 없거니와, 예전 전구만 끼고 빼면 되던 전등이 아니라, 어떻게 갓을 빼야 할지 당최 알 수 없는 모양새를 지닌 저 전등의 전구를 내가 갈 수 있을까? 몹시도 의문이 들어, 인터넷 여기저기를 뒤지며 해결 방법을 찾아봤으나 내가 내린 결론은 한 가지였다.

'돈을 들여 해결하자.'

섣불리 손댔다 수습하는 데 돈이 더 들어갈 게 뻔히 보였다. 조명업체며, 전기업체며 집 근방 전구를 갈아줄 수 있는 여러 가게에 전화를 돌려보았다. 전구를 갈아주는 일을 해주는지, 가격은 얼마인지 등등 궁금한 것을 물어보며 통화를 이어갈수록 어렵지 않게 전구를 교체할 수 있으리라는 나의 희망은 점점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일단 전구만 갈아주는 것은 해줄 수 없다고 했다. 전구 옆에 안정기라는 부품이 들어가는데 그것까지 갈아야 한단다. 안정기도 소모품이니 어차피 전등을 여는 김에 같이 교체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 같은데, 부르는 게 값이라는 게 이런 건가? 말하는 사람마다 가격이 천차만별이다. 한 곳은 내가 전구를 교체한 실제 가격보다 배를 높여 불러댄다. 전화로 들리는 나의 목소리에서 '호구'의 냄새가 났던 걸까.

다른 업체는 불과 5년밖에 안 된 아주 멀쩡한 전등을 갓까지 모조리 바꾸란다. 우리집 전등의 사진을 보내주기도 전인데 무조건 전등을 깡그리 다 바꾸란다. 가격은 묻지 않고 그냥 끊어버렸다.

다른 업체는 LED로 변경하란다. 요새는 LED로 변경하는 추세이긴 하니까 그럴까 싶은 찰나, 거실에 있는 전구 중 4개의 사이즈는 LED로 나오질 않는단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냐니 그냥 4개는 꺼진 채로 그냥 두고 살란다. 또다시 전화를 끊었다.

'음... 그냥 어둡게 살까?'

전구 바꾸는 데 지갑이 비었네요

대화할수록 공허해지는 수차례의 통화에 지쳐갈 때쯤 포털사이트에 후기가 좋은 조명업체가 눈에 띄었다. 마지막이다 싶은 마음으로 전화번호를 눌렀다. 업체 사장님은 사진을 보시더니 전등도 새 거고, 안정기가 나간 거 같지도 않으니 다른 건 바꿀 거 없이 전구만 갈면 될 것 같다고 하셨다.

지금까지와는 결이 다른 사장님의 말씀에 '이분이다' 싶었다. 사장님은 전구는 일단 다 갈고, 안정기는 고장 난 것들만 바꾸라고 말씀해주셨다. 사장님과 오랜 시간 상담 후 어차피 전문가가 오시는 김에 안정기도 소모품이니 다 갈아달라는 나의 요청에 전구와 안정기를 다 바꾸는 것으로 정리가 됐다.

처음에 전구 몇 개만 갈면 되겠지 생각했던 때보다 지출은 입이 떡 벌어지게 커졌지만, 다른 업체들에 비해서는 합리적인 가격인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 됐다.

전기전문가가 오셔서 안정기와 전구를 갈아주시는 것을 본 결과, 난 우리 집 전등의 갓조차 뺄 수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도저히 내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 말인즉슨 또다시 전구가 나가도 나는 전구를 갈 수 없다는 뜻이다. 삼천 원짜리 전구를 하나 가는데 또 거금이 깨져야 한다는 말이다.

언제부턴가 혼자 사는 게 점점 더 힘들어진다고 느껴진다. 예전에는 크게 수고롭지 않았던 일들도 이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고, 적지 않은 돈을 지출해야 해결되는 일들이 많아졌다. 어쭙잖게 행동했다간, 같은 일을 하는데도 배로 돈을 부풀려 받는 사람들에게 된통 데일 수 있으니 정신도 똑똑히 차려야 한다.

시대가 변하고 상황이 변하니 어쩌겠나, 나도 그 방식에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수밖에. 수고로움과 텅 빈 지갑에도 불구하고, 삶의 질이 다소 좋아졌으니 만족하련다. 불이 환히 들어오는 방과 욕실이 이토록 소중할 줄이야. 음지에서 양지로 돌아온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태그:#전구 교체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40대에도 여전히 꿈을 꾸는, 철없는 어른아이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