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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다낭은 한국 항공사들의 직항 항공편이 뚫려 있어 저렴한 가격에 찾을 수 있는 명소로 유명하다.
▲ 다낭 베트남 다낭은 한국 항공사들의 직항 항공편이 뚫려 있어 저렴한 가격에 찾을 수 있는 명소로 유명하다.
ⓒ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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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에서 가장 한국화한 관광지를 꼽으라면 역시 다낭입니다. 거리 어디에서나 한국말로 적힌 간판이 있고 적지 않은 점원들이 간단한 한국어를 구사합니다. 대한항공을 비롯해 한국 항공사가 직항편을 둔 덕에 한국인 관광객이 유독 많이 찾는 도시가 됐단 점이 그 이유일 겁니다.

베트남 중부의 주요 관광지인 다낭엔 볼만한 것들이 제법 많습니다.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쉽게 만날 수 없는 기다란 해변은 다낭을 한국인들이 많이 찾는 휴양지로 만든 일등공신이지요. 요즈음 다낭의 명소를 또 하나 들자면 동남부 해안에 위치한 린응사(영흥사)를 꼽을 수 있겠습니다.

2003년에 지어진 이 절은 탁 트인 경치와 함께 바다를 내려다보는 거대한 관음상으로 인기가 높습니다. 아파트 30층 높이라고 흔히 말해지는 해수관음상은 무려 67m로, 한국에서 유명한 낙산사 해수관음상보다 4배 가량 높은 어마어마한 크기죠.

해수관음상은 말 그대로 바다를 수호하는 관세음보살상입니다. 관세음보살은 중생을 구제하려 부처에서 스스로 보살이 된 존재입니다. 고통 어린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자비로 그들을 인도한다고 알려져 있지요. 관음상의 가호를 바라는 이들은 어디에나 그 형상을 세웠습니다. 뱃일하는 이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관세음보살의 자비로 바다에서 안전하길 바랐던 것이죠.
 
해수관음상 모습
▲ 다낭 해수관음상 모습
ⓒ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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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낭 너른 바다를 굽어보는 초대형 관음상

린응사 해수관음상엔 남다른 사연이 있습니다. 이 절을 설립한 이가 바다에서 죽다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그는 보트피플 생존자로, 미국에서 크게 성공한 뒤 거금을 내어 다낭 땅에 절과 바다를 굽어보는 해수관음상을 지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베트남 관광지인 다낭은 과거 보트피플의 주요 탈출로였습니다. 1970년대 들어 바다에 배를 띄우고 어디로든 탈출하려 했던 사람들이 이곳 미케비치(My khe beach)를 통해 밖으로 나갔습니다. 자료마다 다르지만 미케비치의 보트피플 사망자는 어느 자료든 1만 명을 상회합니다.

보트피플이 무엇인가요. 남북으로 갈라져 동족상잔의 전쟁을 벌여야 했던 베트남인들, 또 타지에 흘러들어와 온갖 차별을 견뎌야 했던 화교들, 공산정권으로부터 탄압을 받은 식민지 및 남베트남 정부 협력자들의 역사가 보트피플의 비극 안에 깃들어 있습니다.

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한 1970년대 중반부터 약 10여 년 간 남베트남에선 최대 400만 명의 사람들이 보트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들은 서로는 태국, 남으로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 북으로는 홍콩 등지로 탈출해 서방세계로 망명하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탄 배는 제대로 된 동력도 없고 물자도 없어서 극한의 상황에 처하기 일쑤였습니다. 바다 사정이 안 좋으면 배가 뒤집히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목적한 대로 미국이나 영국으로 망명한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오늘날 북아프리카에서 출항해 유럽으로 향하는 난민보트들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겁니다.
   
KBS 프로그램에 나온 전재용 선장 모습.
▲ 전재용 선장 KBS 프로그램에 나온 전재용 선장 모습.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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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트피플과 광명87호

한국도 보트피플과의 연이 없지 않습니다. 1985년 11월, 1년여의 조업을 마치고 부산으로 귀항하던 참치잡이배 광명87호가 보트피플 96명을 태워 돌아온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배 선장은 전재용씨였습니다.

광명87호가 남중국해를 지날 무렵 작은 배를 만났습니다. 배 가득 실려 있던 사람들이 SOS를 외쳤습니다. 이를 본 전 선장은 본사와 교신해 상황을 전달했습니다. 회사에선 "관여치 마라"는 지침이 내려왔습니다. 배는 그대로 난파선을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전 선장은 이내 뱃머리를 돌렸습니다. 뱃사람으로서 그들이 오래 버티지 못하리란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선박의 제한된 물자를 보트피플과 나눠가며 부산까지의 열흘을 버텨냈습니다. 여성과 아이들에게 선원들의 침실을 내주었고 노인과 환자는 선장실에서 치료했다고 했습니다.

돌아온 전 선장을 기다린 건 회사의 해고 통지였습니다. 여러 군데 이력서를 넣었지만 정부 조사까지 받은 그를 원하는 선사는 없었습니다. 그는 고향으로 가 멍게양식으로 생계를 유지했습니다.

훗날 그를 찾은 난민 대표에게 전 선장은 보트피플을 구할 때부터 제 경력과 미래를 희생하게 될 것을 예감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다고 했죠. 국제 난민인 보트피플과 한국의 만남이었습니다. 훗날 그 보트피플이 전 선장을 만나기 전까지 무려 25척의 배가 구조신호를 외면했단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베트남 다낭은 넓은 해안을 따라 배가 드나들기 유리한 구조로 되어 있다. 사진은 다낭 해안에 정박 중인 소형 어선 모습.
▲ 베트남 베트남 다낭은 넓은 해안을 따라 배가 드나들기 유리한 구조로 되어 있다. 사진은 다낭 해안에 정박 중인 소형 어선 모습.
ⓒ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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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은 끝나고 희망이 도래한다

보트피플의 비극은 베트남이 도이모이라 불리는 쇄신정책을 펼치며 사그라들기 시작합니다. 사상이 다른 이들을 포용하고 망명에 성공한 보트피플, 즉 베트남계 서방 이주민들과 손을 잡기 시작한 겁니다.

보트피플이 출자한 자본을 중심으로 2003년 다낭에 린응사가 설립되고, 미케비치를 내려다보는 해수관음상이 세워진 데는 이 같은 역사적 굴곡이 있습니다. 해수관음상은 살아남은 이가 관세음보살의 자비에 기대어 바다에서 죽어간 한 많은 이들의 원혼을 달래고자 하는 원념이 아닐까요.

린응사 해수관음상이 선 뒤로 다낭일대는 태풍피해가 전보다 덜했다고 하니 어쩌면 관음의 넓은 자비가 효험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린응사 해수관음상은 다낭에 또 다른 축복도 내렸습니다. 높은 해수관음상을 가까이서 보려는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고 이곳을 방문한 것입니다. 한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의 관광객이 오늘도 다낭의 미켓비치와 린응사를 구경합니다. 베트남 다낭은 더 이상 비극의 땅이 아닙니다. 그 모습을 해수관음상이 웃으며 내려다봅니다.

덧붙이는 글 | 김성호 시민기자의 브런치(https://brunch.co.kr/@goldstarsky)에도 함께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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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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