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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궁전의 정문인 오문은 베트남 전쟁으로 크게 파괴되었지만 다시 복원했다.
▲ 베트남 황궁의 정문, 오문 베트남 궁전의 정문인 오문은 베트남 전쟁으로 크게 파괴되었지만 다시 복원했다.
ⓒ 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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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낭은 경기도 다낭 시라 불릴 정도로 한국인에게 사랑받는 여행지다. 짧은 일정으로 많은 리조트와 기다란 비치가 있는 다낭과 풍경이 아름다운 호이안을 한데 묶어 많은 것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후에의 태화전은 중국의 자금성 못지 않게 화려한 내부를 자랑한다.
▲ 태화전의 내부 후에의 태화전은 중국의 자금성 못지 않게 화려한 내부를 자랑한다.
ⓒ 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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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다낭 북쪽 약 100km에 위치한 후에에 대한 관심은 다소 적다. 베트남 중부의 후에, 다낭, 호이안은 우리나라의 경주, 부산, 전주와 도시의 이미지와 느낌이 비슷하다. 호이안의 전통가옥들은 전주의 한옥마을을 연상하게 되고, 높은 호텔과 리조트를 배경으로 펼쳐진 미케 비치는 부산의 해운대와 유사하다.

후에도 경주와 마찬가지로 곳곳에서 유적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고 황제들의 능묘도 있지만 음식으로 유명하단 점이 다르다. 요즘 한국에서 베트남 쌀국수 중 급속도로 유명세를 얻고 있는 분보후에가 바로 이곳의 음식이다. 베트남 마지막 응우웬 왕조의 수도였던 후에는 궁정 요리의 전통이 지금까지 내려와 이곳만의 독창적인 요리를 만들었다.     
 
응우옌왕조의 수도였던 후에는 궁중음식이 발달했다. 그밖에도 수많은 후에의 대표음식 중 분보후에가 한국사람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 후에의 대표음식 분보후에 응우옌왕조의 수도였던 후에는 궁중음식이 발달했다. 그밖에도 수많은 후에의 대표음식 중 분보후에가 한국사람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 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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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는 처음에는 힌두교 문명의 참파 왕국 영역이었지만 베트남이 점점 남하하기 시작해 그들의 영토로 삼았다. 한동안 변방이었던 후에는 찐가문과 응우옌 가문이 남북조로 분단되었을 당시 응우옌 가문의 남조 본거지로 삼으면서 역사의 전면으로 나서게 된다. 

응우옌 가문은 타이선 농민운동으로 멸문지화를 당했지만 태국으로 도망쳤던 응우옌 푹 아인(쟈롱황제)이 태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그들을 몰아내고 왕조를 세웠다(1802년). 최후의 왕조인 응우옌 왕조가 바로 그것이다. 

응우옌 왕조는 오늘날까지 알려진 월남을 그들의 국호명으로 정했고, 유교 정책을 적극적으로 실현하고, 남북으로 오랜 기간 분열되어 있던 베트남을 하나로 통합하려 했다. 애초에 연호로 정한 '쟈롱'의 한자가 '嘉隆'이었는데, 이중 '嘉'는 베트남 남부의 사이공을 의미하는 것이고 '隆'는 북부의 탕롱을 상징하는 뜻이다.      
 
흐엉강을 따라 수많은 후에의 문화고적이 분포되어 있는데 높은 탑이 인상적인 티엔무사원이 대표적이다.
▲ 티엔무사원 흐엉강을 따라 수많은 후에의 문화고적이 분포되어 있는데 높은 탑이 인상적인 티엔무사원이 대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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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와 호찌민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후에를 수도로 정한 이유도 그중 하나였을 것이다. 베트남은 캄보디아와 라오스를 속국으로 삼고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확보하는 등 전성기를 누렸다. 그러나 빛이 있으면 어둠이 도사리는 법이다. 

응우옌 왕조는 쇄국정책을 실시하면서 참족 무슬림에게 강제로 돼지고기를 먹이거나 힌두교도에게 쇠고기를 먹이고 천주교인들과 프랑스인 선교사를 학살하기 시작한다. 이 와중에 역병과 자연재해까지 겹쳐 인구의 10프로인 80만 명이 사망할 정도로 환란이 들끓었다.     
 
베트남 황궁의 정전인 태화전은 중국 자금성의 정전과 이름이 같다. 베트남 기후의 특성으로 인해 건물이 낮지만 내부는 생각보다 넓다.
▲ 황궁의 태화전 베트남 황궁의 정전인 태화전은 중국 자금성의 정전과 이름이 같다. 베트남 기후의 특성으로 인해 건물이 낮지만 내부는 생각보다 넓다.
ⓒ 운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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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는 자국의 신부를 처형했다는 것을 명분을 삼아 본격적인 침략을 시작한다. 청나라의 개입도 청불전쟁로 무마시키면서 프랑스는 사이공(호찌민)을 시작으로 베트남의 남과 북쪽의 영토를 야금야금 먹는다. 결국 1884년 2차 후에 조약으로 프랑스의 보호령으로 들어가면서 수십 년간 이어진 프랑스 식민지 시대로 접어들고 만다.

우리와 차이점이라 하면 왕조가 없어진 조선과 달리 응우옌 왕조는 해방 이후까지 명맥을 유지한다는 점이다. 단지 실권은 전부 프랑스에게 넘어간 꼭두각시일 뿐이었다. 흐엉강을 사이에 두고 구시가와 신시가로 나누어지는 후에는 베트남 전쟁으로 인해 많은 파괴를 겪었지만 하노이에서 볼 수 없었던 궁궐을 마주하게 된다.

후에의 궁궐은 시타델 또는 호앙탄(황성)이라 불리며 동아시아의 다른 왕궁들처럼 성벽과 해자를 건너야 그 구역에 닿을 수 있다. 왕궁의 성벽은 둘레 2,500m, 남북 604m, 동서 620m로 우리의 경복궁보다는 조금 작지만 중국의 자금성을 본떠 지은만큼 건물 이곳저곳에서 그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

궁의 정문인 오문, 정전인 태화전 등 베이징의 자금성 전각들과 명칭이 같은데 이를 통해 베트남 역시 황제국으로서 위엄을 나란히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이제 오문을 지나 본격적으로 왕궁으로 들어간다.

이 위풍당당한 오문에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앞으로 펼쳐질 궁전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된다. 중앙에는 황제의 상징인 황색 기와를 덮고 있고, 2층으로 된 누각에는 100개에 달하는 철목들이 떠받치고 있으며, 용마루와 잡상 자리에 수많은 봉황상들을 설치했다.     

정문을 지나 정전 구역인 태화전에 닿으면 화려한 외관과 달리 건물의 높이가 다소 낮아 보이는데 이는 베트남의 날씨와 전통건축을 고려해 지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옥좌를 중심으로 하는 내부 공간은 우리의 건물보다 널찍하다. 태화전의 동편과 서편에는 태묘와 종묘 등이 여전히 남아있지만 이 뒤로 펼쳐진 내정 구역의 건물 대부분은 전쟁으로 파괴되었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68년 베트콩이 후에를 장악하기 위해 대대적인 공습을 펼치며 왕궁에 무자비한 폭격을 가했다. 전투 후반부에는 북, 남 베트남 군대가 본격적인 격돌을 펼치며 해자 외벽에 설치한 대공포를 무력화하기 위하여 미사일을 왕궁의 성벽에다 발포해 150개에 달하는 전각들 중 10개만이 살아남게 되었다.

베트남 정부에선 후에 왕궁의 역사적 가치 때문에 순차적으로 복원작업을 시작한다고는 하지만 아직 갈길이 요원하다. 그러나 흐엉강을 따라 산재해 있는 왕릉들은 각 황제가 심혈을 기울였을 만큼 화려하고 보존상태가 말끔하다. 다음화에선 응우옌 왕조의 왕릉을 따라 떠나보도록 하자.

덧붙이는 글 | 우리가 모르는 경기도(경기별곡 1편), 멀고도 가까운 경기도(경기별곡 2편)가 전국 온라인, 오프라인 서점에 절찬리 판매 중입니다. 경기도 각 도시의 여행, 문화, 역사 이야기를 알차게 담았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강연, 기고, 기타문의 ugz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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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문학 전문 여행작가 운민입니다. 현재 각종 여행 유명팟케스트와 한국관광공사 등 언론매체에 글을 기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경기도 : 경기별곡 1편> <멀고도 가까운 경기도> 저자. kbs 경인 <시사인사이드> 경인방송 <책과 사람들> 출연 강연, 기고 연락 ugzm@naver.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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