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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연재의 주제는 노인들이 경험하는 네 가지 고통입니다. 이 기사에서는 그 중에서 '무위(無爲)', 즉 '할 일 없음'이라는 고통을 다루겠습니다.

청소년들의 장래희망에서 '건물주'가 높은 순위를 보였다는 말이 회자된 적이 있습니다. 정확한 출처를 파악하기 어려웠는데, 검색해 보니 2016년 JTBC의 뉴스 기사였습니다(관련 기사). "취재진이 서울 시내 초중고등학생 830명을 대상으로 장래희망을 물어봤는데", 고등학생들이 선망하는 직업 2위가 건물주와 임대업자였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엄밀한 사회조사가 이루어졌는지 알 수 없지만, 그 이유가 '안정적이고 높은 소득이 보장되기 때문'이었다는 점은 고개를 끄덕이게 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봐도 '쉬고 싶다, 놀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해 보이며,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두고 어딘가로 떠나서 한정 없이, 걱정 없이 쉬고 싶습니다.

이런 담론이 확산되면서 파이어(FIRE: 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족이 얼마 전에 화두가 됐습니다. 30대 말이나 40대 초반의 이른 나이에 은퇴하고 나서 자유롭고 여유로운 삶을 살고 싶다는 의미겠죠.

그런데, 정말 우리들 삶에서 일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지금 죽을 때까지 일하지 않고도 평생 먹고 살 수 있는 자산이 있다면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사시겠습니까? 아마도 적지 않은 분이 '그러겠다'고 답할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많은 분은 '그래도 일은 해야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수십억 원의 복권에 당첨된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을 듯합니다. 소득을 위한 일은 하지 않더라도, 하루 중 최소 몇 시간, 일주일에 다만 며칠, 1년 중 일정 기간은 일을 하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65세 이상의 어르신들은 어떨까요? 각종 조사 자료를 종합하면, 우리나라 노인들은 평균 73세까지 소득활동을 하며, 70대 노인의 45% 정도가 소득을 위한 일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일은 '소득'을 기준으로 일을 파악한 것이므로, 거꾸로 말하면 일이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해야 하니까' 일을 하는 어르신이 많은 것입니다. 보건복지부 노인실태조사 자료(2020년)에서도 일을 하는 주요 이유로 73.9%의 어르신이 생계비(생활비) 마련을 위한 것이라고 답했습니다. 용돈 마련 7.9%를 더하면 80%를 넘는 어르신이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다시 지난 기사를 떠올려보면, 우리나라 노인의 빈곤율은 40% 정도입니다. 소득활동을 하는 분도 여기에 포함돼 있습니다. 빈곤의 이유는 질병과 장애, 거동 불편으로 인한 근로능력의 부재나 저하 때문일 수도 있지만, 일을 할 수 있더라도 할 일이 아예 없거나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이 정도로 나열하고 보면, 일을 기준으로 어르신들의 상태를 몇 가지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겠습니다. 근로의지와 근로능력을 교차해서 보면, ①일을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어르신, ②일을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어르신, ③일을 하기 싫지만 할 수 있는 어르신, ④일을 하기도 싫지만 할 수도 없는 어르신 등입니다. 그런데 일을 할 수 없는 어르신에게 일을 시킬 수는 없겠죠? 사실상 노인빈곤 인구로 파악되는 40%의 어르신 중 대부분이 '일을 할 수 없는' 어르신에 속할 것이며 그분들에게는 기초연금과 기초생활보장을 제공해야 합니다. 노인성 질병과 중증질환, 중증장애를 갖고 계시다면 생활시설에서 보호해 드려야 할 수도 있고요.

위의 근로능력을 제외하고 재정상황을 결합하면, 첫째, 일을 하고 싶고 할 수 있으며 해야 하는 어르신과 둘째, 일을 하고 싶고 할 수 있지만 안 해도 되는 어르신, 셋째, 일을 하기 싫지만 할 수 있으며 해야 하는 어르신, 넷째, 일은 할 수 있지만, 하기 싫고, 안 해도 되는 어르신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안 해도 된다'는 것은 일단 자산이 충분하다는 뜻으로 이해하겠습니다. 그리고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질병이나 장애가 전혀 없거나 거동에 불편함이 전혀 없다기 보다는 제한적으로라도 일을 할 수 있는 능력, 즉 잔존능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보건복지부의 노인실태조사 2020년 자료를 보면, 평생 일을 하지 않은 어르신은 응답자의 13.6%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노인 일자리 정책의 대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하는 분들은 첫째, 일을 하고 싶고 할 수 있으며 해야 하는 어르신과 둘째, 일을 하기 싫지만 할 수 있으며 해야 하는 어르신일 것입니다. 73세까지 계속 소득활동을 하고 싶어 하는 어르신들이 아마도 첫 번째 집단에 소속되겠죠? 그리고 일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자산이 충분하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하고 있고 해야 하는 어르신들이 후자에 속할 것입니다. 이 분들의 인구가 380만 명 정도 될 것입니다.

그런데 보건복지부가 주관하는 노인일자리사업의 대부분은 연령 제한이 만 60세부터입니다. 이 연령에는 베이비부머가 포함되기 때문에 훨씬 더 많은 인원이 추가되고, 앞으로는 더 빠르게 늘어날 것입니다. 게다가 베이비부머들은 중년이 시작될 때 이미 국가 차원의 건강관리를 시작했기 때문에 일을 할 수 있는 분의 비율은 더 높을 것입니다.

이 시점에서 잘 거론되지 않는 통계자료가 있어서 말씀드립니다. 현재 '일을 하고 있는' 어르신이라고 하면 남성 어르신을 떠올리실 수도 있겠지만, 보건복지부 노인실태조사 자료를 보면, 남성 어르신의 46.9%, 여성 어르신의 29.3%가 일을 하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연령대별로 보면, 75-79세 어르신의 28.8%, 80-84세 어르신의 19.1%, 85세 이상 어르신의 10.6%가 역시 현재 일을 하고 있다고 답했습니다. 어르신들 중에서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일을 많이 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중에서 일부 어르신들은 은퇴 연령 제한이 없는 자영업으로, 일부 어르신들은 건물주와 임대사업으로, 일부 어르신들은 전업투자자로, 어떤 어르신들은 사기업의 자문이나 고문역으로, 어떤 어르신들은 고기능이나 전문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는 민간 일자리에서 일하고 계실 것입니다. 이런 어르신들을 제외하고, 그마나 좁은 고령자 고용시장의 경쟁에서 밀려났거나 근로능력이 약한 분들은 '일을 해야 하고,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일을 하고 싶지 않은 분들도 일부 포함되겠죠.

이런 분들을 위해 정부는 '노인 일자리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공공부문(공공형)이나 사회서비스기관(사회서비스형)에서 일하시게 하거나 민간영역(민간형)에서 채용하는 조건으로 각종 혜택을 주거나 지원하고 있습니다. 하고 싶다고 해서 다 해줄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인 분들에게는 일자리를 제공해드려야겠죠? 그래서 지난 정부에서 노인 일자리 사업을 확대해 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최근 기획재정부는 내년 예산 중 노인 일자리 사업의 참여 인원과 예산을 줄이고, 그 중에서도 75세 이상 어르신들이 참여하는 공공형 일자리를 6만개 정도 줄이겠다고 발표했습니다. 기초연금을 받는 어르신들이 월 30시간, 27만원을 받는 일자리를 통해 생계비를 벌 수 있는 기회인데, 그 기회를 빼앗겠다는 것입니다. 그 대신에 민간형 일자리를 2만명 정도 늘리겠다고 했지만, 문제는 앞으로 1, 2차 베이비부머가 노인인구로 계속 편입됨에 따라 매년 노인인구가 60여만 명씩 증가할 것이라는 점입니다.

긴축예산으로 어르신들의 근로와 소득 욕구를 감당할 수 있을까요? 여러모로 첩첩산중입니다. 우리나라가 현재 그리고 앞으로도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상태라면 어르신들에게 굳이 일자리를 연결해 드리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일하는 보람과 남을 돕는 데서 느끼는 행복을 위해서라면 자원봉사활동을 개발해서 연결해도 되고, 더 건강해 지셨으니 일은 그만하시고 취미여가 활동을 하시라고 권해드리며 그 여건을 확충해 드리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코로나19도 종식되지 않았고, 경제위기의 암울한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으며, 정부는 사회적 약자들을 오히려 외면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맞는 말이겠네요. 노인의 사회적 권위는 낮아졌지만, 투표권 등 대중적 권력은 강해졌으니 어르신들의 단합된 힘을 기대해 봐도 될까요?

이 기사의 주제 질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어르신이 일을 해야 하고 하고 싶은데, 어느 날 '할 일이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요? 현재 가난하거나 그럴 가능성이 높은 어르신들은 생존을 위협받거나 생계를 걱정해야 할 것입니다. 국가가 가난한 어르신들을 보면서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으니 그렇게 되면 기초생활보장이 확대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어르신들이 살아남기 위해 각자 알아서 일을 찾아야 합니다.

생계를 걱정할 형편이 아니라면, 그것은 '시간이 남아도는' 상황으로 연결될 수 있습니다. 남는 시간, 그러니까 여가시간에는 뭘 하셔야 할까요? 일은 소득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보람, 사회에 대한 기여, 삶의 의미, 관계 형성, 성장, 자존감, 자아정체성, 자기효능감의 핵심고리이기도 합니다. 일을 하고 싶은데 할 수 없다면, 어르신들은 자존감에 상처를 입을 수도 있고, 무력감을 느낄 수도 있으며, 더 살아갈 의미를 못 느낄 수도 있습니다.

어르신들이 '생계 때문에' 일을 하지는 않아도 되는 나라, 하고 싶으면 언제라도 누구라도 할 수 있는 나라, 그 일을 통해 풍요롭고 건강해지고 관계가 유지되고 행복해지는 나라, 그런 나라가 노인을 위한 나라일 것입니다. 
 
구름에 가려서 보이지 않아도, 빛은 거기에 있습니다.
 구름에 가려서 보이지 않아도, 빛은 거기에 있습니다.
ⓒ 권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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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은밀한 맥락을 찾아서, #노인복지, #노인일자리사업, #무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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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 현상의 은밀한 맥락과 패턴을 탐구하는 질적 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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