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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동의 장례는 충주건국대병원에서 문인장으로 치렀다.
▲ 장례식장 김성동의 장례는 충주건국대병원에서 문인장으로 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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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동 작가가 만다라를 마무리하고 우주로 떠났다. 2022년 9월 25일 오전 7시 45분. 당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 정좌한 채 숨을 거뒀다. 모래로 만든 만다라를 쓸어모아 강물로 흘려보내고 스스로 다비식을 치르듯 앉아서 떠났다. 

네 살 때 처음으로 터진 말

김성동은 1947년, 충남 보령의 지식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네 살 때까지 말을 할 줄 몰랐다. 6.25가 일어나고 7월에 느닷없이 말을 열었다. 멍석을 기어 다니던 그가 대전 방향 하늘을 바라보며 "아버지 아버지" 세 차례나 갑자기 불렀다. 그의 아버지는 해방과 6.25의 시대적 혼란 속에서 이승만 정권에게 끌려가 대전의 골령골에서 학살당했다. 시신을 찾지 못해 무덤도 없다.

1965년, 빨갱이의 자식은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서라벌 고등학교를 그만둔 뒤 도봉산 천축사로 출가했다. 6년 동안 선방과 토굴을 오가며 지냈다. 그의 법명은 정각(正覺) 이었으나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다시 지효선사 문하로 들어가 상좌가 되었다. 깨달음의 진전이 없자 소설 '만다라'의 '법운'처럼 방랑의 길을 걸었다.

만다라를 그리다
 
김성동 작가 서재에서 발견한 소설 '만다라'
▲ 만다라 김성동 작가 서재에서 발견한 소설 "만다라"
ⓒ 고석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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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정식 승적도 없었다. 정식 승적도 없는 그를 조계사는 1975년 종교소설 현상공모에 당선된 '목탁조'가 불교를 폄훼했다고 승적을 박탈한다. 그 후 그는 강릉 보현사 일대의 산골짜기를 헤매다 1주일 만에 소설을 하나 써낸다. 그 작품이 <만다라>다.

김성동은 <만다라>로 1978년 한국문학 신인상을 받고 소설은 영화로 만들어졌다. <만다라>는 임권택 감독의 세 번째 작품이자 출세작이 된다. 그런데 영화 <만다라>와 소설 <만다라>의 결말이 달랐다. '필요 없다'와 '필요 있다'의 완전히 뒤바꾼 결말이었다. 영화의 결말은 2001년 그가 새로 쓴 개정판과 결말이 같다. 초판에서 찢어버린 '피안행 차표'는 개정판에선 찢어지지 않았다.

가로막힌 '마술적 리얼리즘'

'만다라' 외에도 자신의 종교적 경험을 토대로 종교적인 인간의 본질 문제를 주로 다룬 작품으로 '피안의 새', '오막살이 집 한 채', '집' ,'길' 등이 있다. 생전 그의 영혼은 자유를 향했지만, 그의 글쓰기는 자유롭지 못했다. 마르케스류의 '마술적 리얼리즘'이라며 주목받은 장편소설 '풍적(風笛)'은 '문예중앙'에 연재 2회 만에 중단됐다.

지주가 9할, 소작농이 1할을 먹는 토지 문제를 비판하며 조선공산당 정강·정책에 담긴 소작농 7할, 지주 3할을 담았다는 이유다. 1983년, 전두환의 5공 때였다. 또 1960년대 이후의 학생 운동을 배경으로 하는 장편소설 '그들의 벌판'을 '중앙일보'에 연재했으나 반미적인 요소가 있다고 두 달 만에 연재를 중단당했다.

'이념의 장벽'을 깨다
대한민국 700여개의 문학상 중 작가들이 가장 받고 싶어하는 요산김정한문학상 시상식에서
▲ 요산김정한문학상 대한민국 700여개의 문학상 중 작가들이 가장 받고 싶어하는 요산김정한문학상 시상식에서
ⓒ 고석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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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시인이기도 하다. 1998년 '시와 함께'에 '중생' 외 10편의 시를 발표했다. 우리말에 대한 애정도 강해 한겨레신문에 '우리말 바르게'를 연재하기도 했다. 생전 신동엽 창작기금상(1985), 현대불교 문학상(2002·1998), 이태준 문학상(2016) 등을 받았다.

2019년 그는 작가라면 누구나 받고 싶어 하지만 아무나 받을 수 없는 '요산 김정한 문학상'을 받았다. 그가 상을 받은 이유는 그의 소설집 '민들레 꽃반지 끼고'가 문학에서 '이념의 장벽'을 깬 공헌이다. '민들레 꽃반지'는 남로당원의 징표였다. 김성동은 요산문학상을 받고 대성통곡했다. 비로소 '김봉한'의 이야기를 한 것이다.

그는 빨갱이 가족이라는 연좌제에 묶여 참혹한 세월을 견뎌야 했다. 그의 중편소설 '고추잠자리'는 조선공산당의 당수 박헌영의 비선 김봉한의 죽기 전 행적을 그렸다. 김봉한은 김성동의 아버지다. 인민공화국 시절 어머니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복원한 중편 '멧새 한 마리'에는 1951년에 국가보안법 등으로 기소됐던 어머니의 재판 기록을 원문 그대로 담았다.

국수(國手)

김성동은 바둑 고수이기도 하다. 젊은 날 잠시 한국기원의 바둑 잡지에 기자로서 일한 적도 있고 바둑TV 명사초대전 대국에도 초청됐다. 그가 27년 만에 완성한 국수(國手)는 바둑과 소리, 악기, 무예, 글씨, 그림 등 나라 안에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예술가나 일인자를 지칭하는 말이다.

소설 '국수'는 임오군변(1882)에서부터 동학농민운동(1894) 전야까지 각 분야의 예인들과 걸출한 민중들의 이야기를 아름다운 우리 말의 향연으로 펼쳐냈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휴가 때 읽었던 책으로 유명해지기도 했다.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은 김성동 작가가 가장 아끼던 그의 저서였다. 소중한 손님이 방문하면 이 책에 친필 서명을 해서 선물로 주곤했다.
▲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은 김성동 작가가 가장 아끼던 그의 저서였다. 소중한 손님이 방문하면 이 책에 친필 서명을 해서 선물로 주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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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동 작가가 정작 아끼는 책은 '만다라'도 '국수'도 아니었다.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이다. '현대사 아리랑'의 증보판으로 소설이 아니다. 민족과 민중의 해방을 위해 싸운 독립운동가들의 꿈과 이력을 고스란히 담은 기록서이다.

작가는 각 인물에 대한 풍부한 고증을 바탕으로 치열했던 독립운동 활동과 고단한 삶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작가는 손목 힘줄이 늘어날 정도로 2,700장의 원고, 846페이지를 딱 한 달 동안 한숨도 못 자고 이 책을 썼다.

녹색평론의 김종철은 이 책이 공식 사서(史書)에서는 볼 수 없는 내면적 언어로, 역사의 격랑 속에 몸을 던졌던 개인들의 실존적 진실을 핍진하게 드러냈다고 극찬했다.
 
어른도 없고 손윗사람도 없으며 벗 또한 드문 스산한 시대여서 그러한가. 새록새록 그리워지는 어르신들이니, 아아! 혁명이 사라져버린 시대에 허물어진 혁명가들 삶 떠올려 보는 마음 애잡짤하고녀.
- 김성동, 2013년 12월, '꽃다발도 무덤도 없는 혁명가들' 머리말 
 
친일문학을 말하다
 
양평의 한 카페에서 담소를 나누는 김성동, 그는 찾아오는 손님을 늘 반갑게 맞이하며 분단 속에 가려진 역사 이야기를 많이 했다.
 양평의 한 카페에서 담소를 나누는 김성동, 그는 찾아오는 손님을 늘 반갑게 맞이하며 분단 속에 가려진 역사 이야기를 많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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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스산한 시대다. 김성동 작가를 보내며 후배 작가와 따르던 지인들은 또 한 명의 시대의 어르신을 잃음에 안타까워한다. 김성동 작가는 2020년 충주로 이사 오기 전 20년 가까이 양평에서 살았다.

양평 몽양기념관 사업 일로 김성동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김희원 민족문제연구소 경기동북부지부장은 그가 들려주었던 역사 뒤의 역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음을 애통해한다. 그의 머리에 뚜렷이 남아있는 김성동 작가의 한마디 말이 있다.
 
역사 의식 없이 글을 쓰는 것은
국가와 민족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다.
- 김성동, '친일문학을 말하다' 강연회 중에서 
 
도망치는 인생
 
서재 책꼿이에서 발견한 김성동의 젊은 날 사진
▲ 김성동 사진 서재 책꼿이에서 발견한 김성동의 젊은 날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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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어머니와 누나 세 식구는 빨갱이 가족이라고 스무 번 정도 도망치듯 이사하며 살아야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한 달에 한 번 기관원은 어머니를 찾아왔다. <만다라>를 출간하고 나서는 불교계에서 죽이겠다고 협박해 20년간 피해 다녀야 했다.

실제 살해의 위협을 느낄 정도였다고 한다. 김성동 작가는 생전에 자신은 '도망치는 인생'이었다고 회고했다. 그의 마지막 정거장이었던 충주에서 그를 가까이 지켰던 후배, 최용탁 작가는 슬픔이 더 크다. 김성동 작가는 그와 함께 있고 싶어 충주로 이사 왔다. 최용탁 작가는 말한다. 

"6월에 지역 서점에서 강의하고 뒤풀이로 오랜만에 약주 한잔을 걸치셨습니다. 그날따라 무척 기분 좋아 보이셨어요. 그날 이후 곡기를 끊으셨습니다. 살은 점점 빠지는데 그러면서도 통증을 참아내며 꼿꼿이 앉아 마지막 원고 교정을 하셨어요."

미륵뫼를 찾아서 

유고집이 된 그의 마지막 책은 세 권이다. '죽고 싶지 않았던 빼빼'는 복간이고 '(가칭)미륵 세상 꿈나라'는 상권에 이어 하권을 완성했으며 '미륵뫼를 찾아서'는 신간이다. 작가회의 회보 편집장을 하며 김성동 작가와 인연을 맺은 이장곤 시인이 출판을 맡았다. 

문인장으로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 도종환 시인, 안재성 소설가 등 150여 명의 작가가 찾아왔다. 김사인 시인이 장례집행위원장을 맡았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조화를 보냈다. "가없는 그리움으로 살았던 분"이라는 추도사에 모두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다. 

땅 한 평 없어 허공에 뿌려질 뻔한 그를 충주의 지인이 마지막 머물 곳을 마련했다. 행여나 그를 잊지 못해 찾아올 독자들을 위해서였다. 47년생 유일한 벗으로 양평에서부터 허물없이 함께한 윤형로씨는 해마다 추모제를 지낼 수 있는 장소가 생겨 마음이 놓인다 했다. 그의 묘가 있는 '충주시 산척면 석천리 산62-1'은 미륵뫼가 됐다.  
  
'병 속의 새'를 어떻게 꺼낼 것인가 

그의 책 '민들레꽃반지'에 해설을 쓴 성공회대 김동춘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이 시대에 그가 살아남은 것은 기적"이라고. '기적 같이 살아온' 그가 떠났다. '병 속의 새'도 마침내 하늘로 날아갔다. 그가 떠난 다음에야 깨달았다. '병 속의 새'는 김성동 자신이었으며, 분단으로 인해 고통받는 한반도의 민중이라는 것을.

결국 그는 이승에서 병을 깨지 못하고 저승에서야 비로소 분단의 고통에서 벗어났다. 저승에서는 훨훨 자유의 몸이 되어 한 살 때 만나고 헤어진 아버지를 만나 지상에서 불러보지 못한 "아버지"를 실컷 부르고, "아버지! 아들아!" 얼싸안으며 해후의 기쁨을 나누길 두 손 모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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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직장은 잡지사 였으나 의도된 기사를 강요해 포기. 방송작가와 방송프로듀서를 천직으로 알다 돈 벌어보겠다고 게임 사업함. 외국에서 한국어교사를 하다 돌아와 세계시민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다문화교육 전공. 시니어와 돌봄의 사회문제에 관심 많음. 가끔 시를 쓰나 발표할 생각은 없음. 좋은 기자가 되겠다던 첫 직장에서의 꿈을 이루고 싶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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