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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京都)는 794년 헤이안쿄(平安京) 천도로부터 대정봉환(일본을 사실상 통치하던 막부가 정권을 천황에게 반납한 사건) 이후 일본조정이 도쿄로 이동한 1869년에 이르기까지 1075년의 세월동안 일본의 공식적인 수도로 기능했던 도시다.

천년 이상을 일본 정치·문화의 중심지로 기능했던 이곳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유적과 유물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교토가 간직하고 있는 그 특유의 정취는 한국인 방문객들에게도 많이 알려져 있다.

교토의 시작과 끝
  
현대에 복원된 천수각은 현재 방치상태로 내부에 입장하는 것이 불가하다. 성벽은 당시의 것으로 전해진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한 후시미성 현대에 복원된 천수각은 현재 방치상태로 내부에 입장하는 것이 불가하다. 성벽은 당시의 것으로 전해진다.
ⓒ 박광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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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도 교토 남쪽의 모모야마(桃山) 지역은 수도 교토의 시작과 끝, 일본사의 굴곡을 여실히 보여주는 곳이다. 한국인 방문객의 입장에서도 쉽게 지나칠 수 없는 장소들이 곳곳에 있다. 가령 모모야마의 후시미성은 조선을 침공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최후를 맞았던 곳이다. 복원됐다가 현재 방치상태에 놓인 천수각, 무성한 잡초 사이에는 당시의 성벽이 남아서 제행무상의 진리를 외롭게 증언하고 있다.

후시미성 근처에는, 교토 천도를 단행한 간무 천황(桓武天皇, 737~806)의 능이 있다. 간무 천황의 교토 천도는 정치적 불안정, 거듭되는 자연재해로 좁아지는 입지에 활로를 뚫기 위함이었다. 이때의 천도는 나라시대에서 헤이안시대로 넘어가는 일본 역사의 분기점이 된다.

한국인 방문객 입장에서 간무 천황에게 더욱 큰 흥미를 느끼게 되는 이유는, 그가 백제계 도래인의 자손이라는 점 때문이다. 2001년 12월 23일, 아키히토 당시 천황은 68세 생일을 맞아 기자회견에서 "저 자신은 간무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돼 있는 사실에 한국과 인연을 느낍니다"고 발언했었다.
  
간무 천황의 어머니는 백제 무령왕의 후손으로 전해진다. 간무 천황의 교토 천도로 일본사는 '나라 시대'에서 '헤이안 시대'로 진입했다.
▲ 간무 천황의 능 간무 천황의 어머니는 백제 무령왕의 후손으로 전해진다. 간무 천황의 교토 천도로 일본사는 "나라 시대"에서 "헤이안 시대"로 진입했다.
ⓒ 박광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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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히토 천황이 언급한 '속일본기'에는, 정치적으로 불안정했던 간무 천황이 모계 혈통으로부터도 스스로의 정통성을 구하려 한 행적이 엿보인다. '속일본기'는 간무 천황의 어머니가 백제 무령왕의 아들 순타태자의 후손임을 밝히면서 "백제의 먼 조상 도모왕(都慕王, 동명왕을 가리킴)은 하백의 딸이 태양의 정기에 감응해 낳은 이로, 황태후는 곧 그 후손이다"(엔랴쿠 9년 1월 15일)라고 고구려 건국 신화까지 인용하고 있다. 교토 천도로 일본사에 커다란 획을 그은 천황의 어머니가 백제 왕족의 후손이라는 사실은 한일 고대사의 깊은 인연을 상기시킨다.

간무 천황의 능에서 도보로 15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는 메이지 천황(明治天皇, 1852~1912)의 능이 있다. 간무 천황이 교토의 시대를 열었던 인물이라면, 메이지 천황은 교토의 시대를 닫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막부로부터 정권을 반납받은 메이지 천황은 1075년동안 수도였던 교토를 떠났다. 천황의 새로운 거처는 200년 이상 도쿠가와 막부의 근거지였던 에도였다. 메이지 천황은 에도를 동쪽의 수도라는 뜻의 도쿄(東京)로 개칭했다. 교토가 수도였던 시대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다만 교토를 그리워했던 메이지 천황은 자신의 시신만큼은 교토에 묻히기를 원했고 이에 따라 그의 능은 교토 모모야마에 조성됐다.
  
천년동안 허수아비였던 천황의 존재는 메이지 유신으로 국가 전면에 부각되었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시대가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경향이 강하다.
▲ 메이지 천황의 능 천년동안 허수아비였던 천황의 존재는 메이지 유신으로 국가 전면에 부각되었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시대가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경향이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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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를 그리워했던 메이지 천황은 사후 교토에 안장되기를 원했다고 한다.
▲ 메이지 천황의 능에서 내려다본 교토 시내 교토를 그리워했던 메이지 천황은 사후 교토에 안장되기를 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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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시대의 문을 열었던 메이지 천황의 존재는 신성화되었다.
▲ 메이지 천황의 능으로 이어지는 230개의 계단 제국 시대의 문을 열었던 메이지 천황의 존재는 신성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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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시대가 남긴 것들

메이지 천황의 능은 나라(奈良)나 교토에 있는 다른 천황릉과 확연히 구별된다. 능 정면으로 교토 시내가 내려다보이고, 그 아래로는 230개의 계단이 이어진다. 메이지 천황의 권위를 강조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엿보이는 조성이다. 권신과 무사의 그림자에 가려 천년 동안 허수아비 신세였던 천황의 존재가, 메이지 유신을 기점으로 국가의 전면에 부각됐으니 이상할 것이 없는 연출이다.

한때 서양 세력으로부터 함포외교의 위협을 받던 동방의 약소국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열강의 반열에 올라섰다. 동아시아 질서의 축이었던 중국(청)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음은 물론, 심지어는 서양 세력인 러시아와의 전쟁에서도 이겼다. 대만과 조선 등의 식민지는 그 전리품이었다. 그 성공의 중심에는 제국의 유일한 주권자로 상정된 메이지 천황이 있었다고 여겨졌다.

만주사변에서 아시아태평양 전쟁 패전에 이르는 15년의 전란이 반성해야 할 오판의 역사로 평가되는 반면, 근대국가 수립과 제국의 승승장구로 이어진 메이지 시대의 역사는 자랑스러운 역사로 평가되는 경향이 강하다. 열강의 침탈 대상이던 국가가 스스로 열강으로 올라서서 서양 국가를 상대로 승전까지 했으니, 메이지 시대는 세계사를 통틀어 봐도 확실히 이례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노기 마레스케 대장은 메이지 천황 사후 '군주의 뒤를 따른다'며 아내와 함께 자살했다.
▲ 메이치 천황의 능 근처에 위치한 노기신사 노기 마레스케 대장은 메이지 천황 사후 "군주의 뒤를 따른다"며 아내와 함께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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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메이지 시대 영광의 이면에는 식민통치의 폭력성뿐만 아니라, 훗날 제국의 패망을 초래한 비합리성 또한 도사리고 있었다. 메이지 천황의 능의 230개 계단을 내려가 조금 더 걸으면 만날 수 있는 노기신사(乃木神社)에서는, 제국을 파멸로 이끈 맹목적인 애국과 천황숭배가 태동하던 당시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노기신사는 일본 육군의 영웅으로 알려진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1849~1912) 대장을 기리는 신사다. 국운을 걸었던 러일전쟁을 승전으로 이끌고 메이지 천황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보인 그의 삶은 당대 군인들의 모범이었으며, 오늘날에도 메이지 시대를 예찬하는 이들에게 기념된다.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 극동 세력의 거점이던 뤼순은 일본군이 반드시 점령해야 할 목표로 설정됐다. 러시아군은 견고하게 구축된 요새와 강력한 중화기들, 항구에 정박한 러시아 태평양 함대에 의지해 방어전을 펼쳤다. 뤼순 함락 여부에 제국의 존망이 걸려 있다고 봤던 노기 장군은 일본군의 부족한 화력을 이른바 '육탄돌격'으로 만회하고자 했다.

1904년 8월 1일부터 이듬해 1월 4일까지 이어진 격전 끝에, 일본군은 뤼순의 러시아군에게 항복을 받을 수 있었다. 노기 장군이 그토록 갈구하던 승리였지만 희생은 너무나도 컸다. 1만6000여 명의 일본군이 전사했는데 그중에는 그의 두 아들도 있었다.

'육탄'과 '공격 정신'의 지난 역사... 우린 무엇을 읽어야 할까
  
노기 마레스케, 아나톨리 스테셀 등 양국의 지휘관들이 전투 종결 후 기념사진을 촬영했다.(1905년 1월 5일) 아시아태평양 전쟁 당시의 영미권 포로들과 달리, 뤼순 전투 후 러시아군 포로들은 신사적인 대우를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 뤼순 점령 후 일본군-러시아군 지휘부의 기념사진(노기신사) 노기 마레스케, 아나톨리 스테셀 등 양국의 지휘관들이 전투 종결 후 기념사진을 촬영했다.(1905년 1월 5일) 아시아태평양 전쟁 당시의 영미권 포로들과 달리, 뤼순 전투 후 러시아군 포로들은 신사적인 대우를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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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 열강들은 유럽에서 진작에 폐기된 육탄돌격으로 승리를 일궈낸 동양인들의 집념에 찬사를 보냈지만, 노기 장군은 전몰장병들의 유가족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아야 했다.

죄책감을 느낀 그는 자결을 원했으나 메이지 천황의 만류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리고 메이지 천황이 사망하고 국장이 거행되던 1912년 9월 10일, 노기 마레스케 대장은 아내와 함께 동반자살했다. 그는 유서를 통해 자신의 죽음이 군주의 죽음을 따르는 '순사'라고 밝혔다.

노기 마레스케 대장의 유산은 일본을 넘어 세계사에도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뤼순 전투의 '전훈'에 감명받은 유럽의 육군 관계자들은 10여 년 후 벌어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자신들이 스스로 폐기했던 육탄돌격을 다시금 재현했다. 돌격하는 보병이 중화기 앞에 무력하게 쓰러졌던 뤼순의 역사는 유럽의 참호전에서 또다시 반복되었다. 일본군 역시, 서구보다 부족한 물적조건을 '공격정신'으로 극복한다는 뤼순의 '전훈', 임금을 위해 목숨 바친다는 노기의 '모범'에 집착했고 그 결말은 아시아태평양 전쟁의 패전이었다.

시대는 속절없이 흐른다. 지나간 시대를 살아간 이들의 무덤은 말이 없다. 아무 말이 없는 망자들의 흔적을 마주하며, 오늘날의 세대는 무엇을 읽어내야 할까. 일본사의 굴곡이 그대로 묻어나는 교토 모모야마의 숲길을 걸으며, 나는 지난 천년의 시간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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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전쟁체험에 관한 연구에 정진하고 있는 오사카 거주 유학생입니다. 한일친선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편견과 혐오 너머로 새로운 지면을 여는 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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