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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폭력에 의하여 무참하게 학살되어 죽어간 원혼들의 넋을 기리며 막걸리 한 반에 과자 몇 조각을 올리고 묵상에 잠겨있는 참가자들.
▲ 이덕구 산전에서의 묵상 국가 폭력에 의하여 무참하게 학살되어 죽어간 원혼들의 넋을 기리며 막걸리 한 반에 과자 몇 조각을 올리고 묵상에 잠겨있는 참가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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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미천에서 이덕구 산전으로 가는 길에는 숲이 울창하고 조릿대가 숲의 바닥을 뒤덮고 있는데, 그 조릿대들을 베어내고 사람이 다닐 수 있게 길을 내고 있었다.
▲ 조릿대 숲으로 덮인 길 천미천에서 이덕구 산전으로 가는 길에는 숲이 울창하고 조릿대가 숲의 바닥을 뒤덮고 있는데, 그 조릿대들을 베어내고 사람이 다닐 수 있게 길을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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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에서는 내가 지난 봄에 찾아가다가 길을 찾지 못한 '이덕구 산전'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이덕구는 조선 9대 성종의 아들인 예성군의 후손이다. 예성군이 연산군에 의하여 제주로 유배를 와 정착을 한 것이다. 이덕구의 아버지는 조천읍 신촌리에 살았던 부유한 집의 지방 유지라 한다. 어릴 때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의 리스메이킨(立命館大學) 경제학부 재학 중 1943년 관동군에 징집되었다.

일본 패망 뒤 귀국하여 조천중학원에서 역사와 체육을 가르치는 교사로 재직 중 제주 총파업에 참여 경찰에 잡혀가 많은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그 뒤 교사를 그만두고 인민유격대 3·1지대장을 맡아 제주읍, 조천, 구좌 등 지역에서 활동을 하다 김달삼의 뒤를 이어 제주도 인민유격대 사령관직을 맡았다고 한다.

미군정의 도움으로 한국판 킬링필드를 만들어 단독정부를 세우고 대통령이 된 이승만이 조선 태종의 세자였던 양녕대군의 직계 후손이라면, 이덕구는 세종의 직계 후손이다. 이승만은 제주 도민들을 무참하게 학살하여 권력 기반을 공고히 한 반면 이덕구는 이에 맞서 싸우다 가족, 형제 등 일가가 몰살당하는 비운의 주인공이 된다. 

이덕구 산전은 제주시 교래리에 위치해 있으며 옛 지명은 '시안 모루, 북받친밭'이라 불린다. 제주 4·3 유적지를 테마로 하여 찾아오는 사람들도 산이 깊은 숲 속에 자리 잡고 있어 잘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한 20여 년 전 전교조 선생님들과 함께 제주 4·3 역사 기행을 하면서 찾은 적은 있지만 산이 많이 깊은 곳에 있어서 오래 만에 찾으려고 하니 쉽지가 않았다.

마침 울산에서 전교조 지부장 등 전교조 활동을 열심히 했던 한강범 선생이 제주에 내려와 정착한 지가 벌써 몇 해가 되기 때문에 '이덕구 산전'의 위치를 알 것 같아서 전화를 걸어 안내를 부탁하였다. '교래리 입구' 버스 정류장에서 강범 선생을 만나 사려니 숲길 입구 인근에 주차를 하고 산전을 찾아 나섰다.

사려니 숲길 입구에 도착해 보니 사려니 숲길에 대한 안내 지도와 관련 안내 설명 판이 세워져 있고, 전교조 출신 도종환 시인(현 민주당 국회의원, 전 문체부 장관)의 '사려니 숲'이라는 시비가 세워져 있어 반가웠다.
  
현역 민주당 국회의원이며 전 문체부 장관인 전교조 출신 시인인 도종환 의원의 '사려니 숲'이란 시비가 세워져 있어 반가웠다.
▲ 사려니 숲길 입구에 세워져 있는 시비 현역 민주당 국회의원이며 전 문체부 장관인 전교조 출신 시인인 도종환 의원의 "사려니 숲"이란 시비가 세워져 있어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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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구 산전은 사려니 숲길 입구에서 대략 1.5km 정도를 가면 작은 구름다리가 놓여있는 천미천을 만날 수 있다. 그 구름다리를 건너면 표고버섯을 재배하는 농장으로 나 있는 임도가 나온다. 그 길을 따라 500~700m 쯤 올라가면서 오른쪽 길가에 세워져 있는 '이덕구 산전' 안내판을 찾으면 만날 수 있다.

우리는 강범 선생만 믿고 그 길을 따라 천미천으로 들어섰는데, 그만 길을 잃어버렸다. 강범 선생은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을 하고, 배 선생은 GPS를 눌러 확인하는 등의 노력 끝에 겨우 찾을 수 있었다. 탐방을 마치고 내려올 때 확인해 보니 '4.3연구소' 등 이곳 탐방을 왔던 사람들이 길을 잘 내놓았지만 우리 일행은 천미천을 건널 때 반대편 냇가 나무들에 붙어있는 길안내 리본들을 잘 확인하지 않아서 발생한 실수였다.
 
천미천에서 작은 구름다리를 건넌 다음 임도를 따라 올라가다보면 약 500여 미터 지점에 서서 이덕구 산전 가는 길을 안내하고 있는 안내판이 서 있다.
▲ 임도 한편에 자리잡고 있는 안내판 천미천에서 작은 구름다리를 건넌 다음 임도를 따라 올라가다보면 약 500여 미터 지점에 서서 이덕구 산전 가는 길을 안내하고 있는 안내판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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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구 산전' 안내 표지판이 세워져 있는 곳부터 나 있는 길을 따라 약 100m 정도 가면 다시 만나는 천미천을 똑바로 가로질러 건너서 나무들에 붙어있는 안내 리본들을 찾아 걸어가면 어렵지 않게 당도할 수 있다.

천미천에서 약 400여 미터 쯤 올라가면 초소나 비트를 설치했을 것으로 보이는 돌무더기가 쌓여있는 흔적들이 나오고 누군가 갖다놓은 것으로 보이는 작은 철제상이 놓여있다. 그리고 주변에는 오래되어 깨진 무쇠 솥과 깨진 사금파리들이 널려 있다. 무쇠 솥은 당시에 사용하던 것인지 모르지만 사금파리들은 누군가 가져다 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제주4.3연구소'라는 단체명이 붙어있는 리본들이 곳곳에 붙어있어 이덕구 산전으로 안내하는 길잡이 구실을 하고 있었다.
▲ 이덕구 산전의 길안내 리본들 "(사)제주4.3연구소"라는 단체명이 붙어있는 리본들이 곳곳에 붙어있어 이덕구 산전으로 안내하는 길잡이 구실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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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현기영의 <순이 삼촌> 등 4·3 관련 소설들을 읽어보기도 하였지만 작년에는 제주 출신 재일동포인 김석범 선생이 쓴 권당 500쪽 이상 분량의 12권의 <화산도>도 읽었다.

<화산도>는 1945년 8·15 해방공간에서 일제가 물러난 나라에서 통일 정부를 세우려 했던 여운형 선생의 '건국준비위원회'의 활동, 김구 등의 임시정부 인사들, 좌우익 정치 세력들의 미군정과 남북 분단 정부 수립의 입장 등 복잡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통일정부를 세우려 했던 제주 도민들의 열망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게 해준다.

1947년 삼일절 기념행사에서 6명의 도민들의 죽음과 6명의 부상 이후 이에 항거하는 제주도민들을 미군정은 어떻게 탄압을 했는지를 알게 해 준다. 제주 4·3 평화기념관에는 백비가 누워있다. 아직도 제주 4·3이 '바르게 규명된 이름(정명)'을 갖지 못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막사를 지키기 위한 초소라든가 무장대들이 숨어 지내던 비든 등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된다.
▲ 비트, 초소 등 이 있던 자리 막사를 지키기 위한 초소라든가 무장대들이 숨어 지내던 비든 등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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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범 선생은 모 출판사의 청탁을 받고 제주 4·3에 대한 문헌 연구와 관계자들을 만나 자료를 수집하는 등의 연구를 통하여 책을 집필하는 중이라고 한다. 그는 말한다.

"제주 4.3에서 무장대 투쟁은 이덕구 사령관이 죽음으로써 사실상 끝났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덕구 사령관의 뒤를 이어 조천읍 와흘리 인민위원장 출신의 김의봉이 인민유격대 사령관 직을 계승하여 2년 가까이 무장 투쟁을 하다가 51년 봄 전사할 때까지 무장투쟁은 계속되었다."

강범 선생은 말을 잇는다.

"한라산 마지막 빨치산은 여성 대원 한순애이며, 57년 3월 27일 성판악 밑의 용강마을 교전 중 생포되었지만 그는 살아남았다고 한다. 마지막 남자 빨치산은 오원권인데 중산간 고향 마을인 송당리의 장기동에 내려왔다가 생포됨으로써 한라산 빨치산 투쟁은 사실상 끝이 났다고 한다."
  
배 선생은 흩어진 길 안내 리본 등을 다음 탐방객들을 위해 정비하고 있다.
▲ 길 안내 리본을 정비하면서 배 선생은 흩어진 길 안내 리본 등을 다음 탐방객들을 위해 정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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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전(山田)'은 산에 있는 밭이라는 의미다. 이 일대는 당시에 숲이 아니었고 넓은 들판에 억새가 많이 자라던 곳으로 화전민들이 불을 놓아 농사를 짓거나 말이나 소들을 방목하던 '캐'가 있던 곳이다. 제주 4.3 때, 토벌대들이 중산간 마을로 토벌을 한다고 몰려오자 봉개동 등 이 일대에 살던 사람들이 피난처로 쓰였던 곳이다.

강범 선생은 말을 잇는다.

"이 산전이 있는 옆에는 천미천이 흘러서 식수 공급이 용이했고, 불을 피워도 아래 동네에서 잘 보이지 않아서 은신하기 좋았던 곳이라고 한다. 운동장 같은 넓은 평지가 있어 군사들 훈련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무장대들은 그곳에서 군사 훈련을 하였다고 한다. 그렇다고 이덕구 부대가 이곳에 오래 주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래 주둔했다가는 토벌대의 표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주둔지를 수시로 옮겨 다녔을 것이다."
  
깨어진 무쇠 솥과 누가 갖다놓은 것 같은 사금파리 조각들이 사람이 기거했다는 것을 확인해 주고 있었다.
▲ 이덕구 산전에서 만난 가재 도구들 깨어진 무쇠 솥과 누가 갖다놓은 것 같은 사금파리 조각들이 사람이 기거했다는 것을 확인해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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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운데에는 좀 넓게 움막을 지었던 돌담 벽의 흔적이 남아있고, 주변 이곳저곳에는 초소나 조그만 비트를 지었던 흔적으로 보이는 돌무더기들이 쌓여 있는 곳들도 보였다. 우리 일행은 미군정의 한반도 지배 전략과 이승만의 권력욕에 의하여 무참하게 희생된 수많은 제주 4·3 원혼들의 넋을 위로하는 뜻으로 막걸리 한 잔에 과자 몇 조각을 올려놓고 잠시 묵상에 잠겼다.

강범 선생은 말을 잇는다. "전에는 이곳에 김경훈 시인의 '이덕구 산전'이란 시가 쓰인 판이 세워져 있었다. 지금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고 하며 그 시에 곡을 붙인 음악을 틀어준다.
  
많이 퇴색되어 잘 보이지도 않은 나무판 위에 쓰여진 글귀

<아무런 이유 없이
억울하게 죽은 것이 아니라
죽어서 아무런
이유가 없어져 버린 것이
억울한 것이다.>
▲ 이덕구 산전에서 만나는 글귀 많이 퇴색되어 잘 보이지도 않은 나무판 위에 쓰여진 글귀 <아무런 이유 없이 억울하게 죽은 것이 아니라 죽어서 아무런 이유가 없어져 버린 것이 억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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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상 옆의 나무 밑에는 누구 글의 낙관인지 알 수 없는 많이 퇴색되어버린 글귀를 새긴 팻말이 그곳을 찾은 탐방객들의 가슴을 저미게 한다. 그 글귀를 옮겨온다.

"아무런 이유 없이
억울하게 죽은 것이 아니라
죽어서 아무런
이유가 없어져 버린 것이
억울한 것이다."

 
돌담으로 군막을 지었던 흔적들이 있고, 주변에는 깨진 무쇠 솥과 사금파리들이 널부러져 있는 가운데 무심한 관중만 탐방객들을 맞고 있었다.
▲ 이덕구 산전에서 만난 군만이 있던 자리 돌담으로 군막을 지었던 흔적들이 있고, 주변에는 깨진 무쇠 솥과 사금파리들이 널부러져 있는 가운데 무심한 관중만 탐방객들을 맞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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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에서는 '이재수의 난'이라 불리는 '신축항쟁'의 이재수와 같이 비극적 죽음으로 끝나는 대장을 '장두'라 부른다. 이덕구도 이재와 같은 장두의 반열에 있어서 동네 아이들이 불렀다는 '이덕구의 노래'도 있다.

'덕구 덕구 이덕구
박박 얽은 이덕구
장차 대장될 거 마씸'

 
조릿대 등으로 덮여있는 비트나 조소가 있었던 자리로 추정되는 곳들이 주변에서 많이 만날 수 있었다.
▲ 비트 등이 있었던 자리 조릿대 등으로 덮여있는 비트나 조소가 있었던 자리로 추정되는 곳들이 주변에서 많이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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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이덕구 산전, #제주 4·3 항쟁, #아직도 끝나지 않은 4·3, #한국판 킬링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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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교조 초등위원장, 환경과생명을지키는전국교사모임 회장을 거쳐 현재 초록교육연대 공돋대표를 9년째 해 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서울의 혁신학교인 서울신은초등학교에서 교사, 어린이, 학부모 초록동아리를 조직하여 활동하고 있습니다. 지속가능한 미래, 초록세상을 꿈꾸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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