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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삶을 적나라한 필치로 풀어낸 프랑스의 작가이자 문학교수 아니 에르노가 지난 6일 202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됐습니다. 이번 '시민기자 북클럽'에서는 아니 에르노의 작품을 다룹니다.[편집자말]
스웨덴 한림원은 지난 6일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에게 노벨문학상을 수여했다. "개인적인 기억의 뿌리와 소외, 집단적인 구속을 드러낸 용기와 꾸밈없는 날카로움"을 수상 이유로 꼽았다.

아니 에르노는 1940년 릴본에서 태어나, 노르망디의 이브토, 카페 겸 상점을 운영하는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 문학을 공부한 후, 정식 교원, 현대문학 교수 자격증을 획득했고 1974년 <빈 옷장>으로 등단했다.

<남자의 자리>로 르노도상을, <세월>로 마르그리트 뒤라스상, 프랑수아 모리아크상을 수상했다. 대표작으로는 <단순한 열정>, <사진의 용도>, <한 여자>, <부끄러움>, <다른 딸> 등이 있다.

아니 에르노는 자전적 경험에서 사적인 감정을 배제한 채 사건의 경험과 진실만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글을 써 왔다. 개인의 특수한 경험을 밀도 있게 파헤친 그녀의 작품은 개인의 문제가 계급과 계층, 사회 문화적 구조와 동떨어져 발생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런 그녀의 글은 '칼 같은 글쓰기'로 알려져 있다. 자신의 상처에 칼을 대어 그 핵심을 파고 넓혀 밖으로 꺼내 놓는 방식. "글쓰기는 현실을 보여 주기 위해 겉으로 드러난 것들을 찢는"(<진정한 장소>, 신유진 옮김, 1984books) 행위라고 말하는 그녀는 자신에게 깊게 영향을 미친 사건이나 상황을 낱낱이 드러내어 개인적 경험에 담긴 사회·정치적 의미를 묻는다.
 
진실한 얼굴과 욕망을 숨겨 둔 빈 옷장이 누구에게나 있지 않을까.
▲ 빈 옷장 진실한 얼굴과 욕망을 숨겨 둔 빈 옷장이 누구에게나 있지 않을까.
ⓒ 김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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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 문학의 시초 <빈 옷장>

작가의 데뷔작 <빈 옷장>은 부모의 세계에서 떨어져 나와 신분 상승을 꿈꾸는 주인공의 성장 과정을 다룬다. 불법 낙태 시술이라는 충격적 장면에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사회가 침묵하는 것에 저항하는 에르노식 문학의 시초를 보여준다. 

도시의 변두리에서 빈민층과 노동자를 대상으로 카페 겸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부모를 둔 '드니즈 르쉬르'가 이 책의 주인공이다. 자신이 속한 세상에서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던 소녀는 사립학교로 진학하고 사춘기를 지나면서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된다. 학교와 선생님, 중산층 가정이라는 청결하고 예의 바른 세계와의 대면을 통해 자신과 부모, 동네 사람들을 바라보는 소녀의 시선에 수치심이 자란다.
 
어쨌든 그들은 작은 소매상이자 동네 카페 주인, 벌이가 변변치 않은 초라한 사람들이었고 나는 그것을 보고 싶지도,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음탕한 년이 되는 것도, 숨기는 것도, 존재 자체가 순수한, 가볍고 자유로운 반 친구들 앞에서 더럽고 무거운 여자애가 되는 것도 이제 그만 충분하다. 나는 부모님을 더 무시해야만 했다. - 113쪽, <빈 옷장>, 아니 에르노, 신유진 옮김, 1984 books

세상이 우월한 세계와 열등한 세계로 나뉘어 있음을 알게 된 소녀는 부모의 세계로부터 고통스러운 분리를 시작한다. 드니즈는 부모와 동네 사람들을 무시하고, 학업에만 몰두하면서 부모가 바라는 더 나은, 고상한 세계로 진입하길 꿈꾼다.

바칼로레아를 통과해 집을 떠나 대학 사회에 발을 들이고 부르주아 계급의 취향을 흡수하면서, 고급 문학과 철학의 세계에 심취하면서, 드니즈는 부모의 세계와 단절한다.

하지만 부르주아 출신의 남자 친구에게 버림을 받고 두려워했던 불법 낙태 시술이라는 현실에 놓이면서 그녀는 그동안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느낀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그녀 자신? 그녀의 부모? 자신을 욕망하게 했던, 좋은 세계라고 믿었던 부르주아들? 그녀는 홀로 피를 흘리며 자신의 상처를 응시한다.
 
나는 둘로 나뉘었다. 바로 그것이다. 내 부모님, 소작농 가족, 노동, 학교, 책, 보르낭들. 여기도 저기도 아닌 그것이 증오를 키웠다. 선택을 해야만 했다. - 214쪽, <빈 옷장>

드니즈가 "다른 아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모욕을 배웠고 모욕을 느"꼈던 것은 학교와 선생님, 중산층 가정처럼 사회적으로 우월하다고 받아들여진 세계의 시선 때문이다. 그녀는 "학교에서, 시내의 가게 앞을 거닐면서, 책을 읽으면서 비교하는 법"과 "좋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는 법, "평가 시스템"을 배웠다. "남들과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모두를 속이"는 데 익숙해지는 법을 훈련했다.

그녀에게 수치심을 느끼게 했던 외부의 폭력적 시선은 점차 그녀 내부로 옮겨갔다. 드니즈는 자신이 학습한 시선으로 자신과 자신이 속했던 세계, 부모와 소작농과 가난한 노동자의 세계를 바라보았다. 그것을 반추하는 드니즈의 언어는 날 것의 생생함으로 읽는 이를 불편하게 한다.

분리를 강요하는 세상에 언어로 저항하기
 
그 글쓰기(<빈 옷장>)는 교육과 수치심을 통해 드니즈라는 화자에게 행사되는 보이지 않는, 긴 폭력성을 지녀야 했어요. 언어의 폭력성이 이 은근한 문화 지배의 폭력성에 대한 답이어야 했죠. - 125쪽, <진정한 장소>

소녀를 둘로 나뉘게 한 것은 사회와 교육 시스템, 그리고 문화다. 무엇이 좋고 나쁜지, 무엇이 우월하고 열등한지, 그러므로 무엇을 욕망하고 꿈꿀 것인지 사회는 새겨 넣는다. 사회에서 배우고 성장하는 과정 자체가 한 사람에게 분리를 가르친다.

소설 속 화자인 드니즈는 그 '은근한 문화 지배의 폭력성'을 비문학적 언어로 풀어낸다. 그로 인해 이 소설이 지니게 되는 '언어적 폭력성'은 '세상을 향한 복수'이기도 하다. 한 사람을 이방인이 되도록, 자신이 속한 곳과 분리시키고 증오와 수치심을 습득하게 만든 사회를 향한 에르노식 언어 저항이다.

드니즈가 마주했던 분리와 단절은 사회에서 성장하는 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누구나 겪는 것이다. 그러한 경험을 통해 증오와 수치심을 배운다. 아니 에르노의 <빈 옷장>은 우리가 지우고자 애쓰는 혐오와 편견의 말, 시선이 사회화의 소산임을 깨닫게 한다.

인종과 계층, 나이와 성별, 지위와 역할에 따라 사회는 바람직한 기준을 제시하고 강요한다. 그에 부합하기 위해 우리는 여러 번 자신의 가면을 바꿔 가며 성장한다. 그러느라 어떤 욕망과 가면은 아무도 모르게 저마다의 빈 옷장에 숨겨 둘 수밖에 없다.

진실한 나로 머무는 것이 열등하다고 말하는 사회를 향해 드니즈와 함께 되물어야 하지 않을까. 무엇이 우월한 것이며 우월과 열등의 구분만이 전부인가라고. 선을 긋고 특정한 욕망만을 주입시키는 세상을 향해 이러한 질문을 끈질기게 되던져야 할 것 같다. 자신이 속한 곳과 단절 없는 세계, 우월과 열등이라는 구분 없는 세계로 나아가는 일은 그렇게 가능해지지 않을까.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통해 보편적 진실을 묻는 아니 에르노의 저작들은 나의 상처를 직시하고 그 의미를 되돌아볼 용기를 건네주었다.
▲ 아니 에르노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통해 보편적 진실을 묻는 아니 에르노의 저작들은 나의 상처를 직시하고 그 의미를 되돌아볼 용기를 건네주었다.
ⓒ 김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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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는 자신이 살아낸 삶을 글로 쓰면서 세상의 지배적인 시선에 저항했다. 사회가 침묵하는 것을 찢고 그 속의 상처를 파헤치며 진실을 묻는 글을 썼다. 그녀는 책을 읽으면서 자신이 겪은 일이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에르노의 책을 읽으며 나 또한 "늘 나만 그렇다고 생각해 왔다"(76쪽, <빈 옷장>)는 비밀스러운 의구심을 벗어던질 수 있었다.

세상에는 온전히 꺼내 놓을 수 없는 상처가 아직 많다. 혐오로부터 자신을 숨겨야 하는 성소수자와 히잡을 쓰는 여성들, 난민처럼 세상의 이분법으로 낙인찍히고 배제당하는 사람들이 있다. 용기를 내어 침묵을 깨어줄 작가, 세상이 말하지 말라고 강요하는 이야기를 들려줄 작가가 여전히 우리에겐 필요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기자의 개인 블로그 및 아트렉처(https://artlecture.com/)에 게재됩니다.


빈 옷장 - 개정판

아니 에르노 (지은이), 신유진 (옮긴이), 1984Books(2022)


서평 쓰는 사람들의 모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북클럽'입니다.
태그:#아니에르노, #빈옷장, #신유진, #1984BOOKS, #노벨문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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