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 자작나무 단풍 .
ⓒ 박병춘

관련사진보기

 
이곳 강원도 평창군 해발 700미터 산골 아침은 영하 2도로 시작합니다. 서리까지 맞은 김장 배추는 몸을 움츠렸습니다. 햇살이 비추자 텃밭에 생기가 돕니다. 자작나무 숲에선 단풍 축제가 한창입니다. 자작나무 껍질은 연인의 편지로, 결혼식의 촛불 대용으로 쓰였다지요. 그래서 '화촉을 밝힌다'는 말이 자작나무에서 나왔다고 하네요.

단풍으로 단장한 자작나무는 언제 그랬냐는 듯 모든 잎새를 떨구고 줄기와 가지가 온통 하얀색인 채로 한겨울을 견뎌냅니다. 봄이 되면 여린 가지에서 연록의 새싹이 돋아나는데, 위대한 생명력에 찬사를 보내곤 하지요.
  
.
▲ 맨발의 선재길 .
ⓒ 박병춘

관련사진보기

 
집 주변 자작나무에 눈길을 두고, 오대산 선재길로 발길을 돌렸습니다. '선재길'은 불교 화엄경에 나오는 선재 동자에서 유래한 길이라고 합니다. 선재 동자가 지혜를 구하려고 천하를 돌아다니다가 53명의 현인을 만나 결국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지혜의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께서는 위 사진에서 무엇을 보셨나요? 잘 정돈된 데크 바닥? 울긋불긋 단풍? 낙엽? 여럿이 걷는 가을 분위기? 네, 맞습니다. 다 맞지만 제가 촬영한 것은 뒷짐을 진 채 맨발로 걷고 있는 분이랍니다. 운동화는 비닐 봉지에 넣고 맨발로 선재길을 걷는 모습에서 그게 무엇이든 치유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어 덩달아 기뻤습니다.
 
.
▲ 선재길의 단풍 .
ⓒ 박병춘

관련사진보기

 
단풍 숲을 지나며 지난 시간을 돌아봅니다. 그 동안 살아내면서 단풍 놀이를 몇 번이나 했을까. 말 그대로 홀가분하게 아무런 얽매임 없이 가을철 단풍 놀이를 몇 번이나 했을까 세어 봅니다. 유감스럽게도 없습니다. 단풍 놀이를 했다고 해도 일상의 틀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34년을 일터에서 보내고 퇴직하여 맞는 첫 단풍이기에 그 무엇에도 구속됨 없이 온전하게 느릿느릿 걸었습니다. 선재길은 제게 더 천천히 걸으라고 말했습니다.

뷰파인더로 보는 피사체의 선한 울림은 사진의 매력 가운데 하나입니다. 빛이 단풍 위에 있습니다. 그 역광을 받은 단풍이 미소 지을 때 황홀경에 빠집니다. 어느 프로 사진가는 만 장을 찍어도 마음에 드는 사진이 없다고 말합니다. 아마추어라 얼마나 다행인가 위안 삼으며 단풍 사진 한 장을 골라 봅니다.
  
.
▲ 선재길, 아름다운 부부 .
ⓒ 박병춘

관련사진보기

 
숲길의 편안함이 이어집니다. 다정한 부부가 노오란 단풍 아래서 기념 사진을 찍습니다. 어찌나 멋져 보이는지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촬영 동의를 얻습니다. 결과물을 보여 드리니 참 좋아합니다. 부부에게 선재길은 어떤 의미가 될까, 어떤 깨달음을 줄까 상상하면서 둘이 걸어도 한 걸음이 되기를 응원했습니다.
  
.
▲ 선재길 단풍 .
ⓒ 박병춘

관련사진보기

   
.
▲ 선재길 단풍 .
ⓒ 박병춘

관련사진보기

   
계곡에서 내려온 물이 모여 냇물을 이룹니다. 선재길의 가을 운치를 더하는 보물이지요. 바탕을 냇물에 두고 그 위에 단풍을 담았습니다. 분주한 일상 때문에 마음은 있어도 단풍 놀이는 엄두도 못내는 분들도 많잖아요. 사진은 공유할수록 빛나는 예술이라고 봅니다. 가을이면 흔하게 보는 사진이지만 단풍의 색감과 분위기가 그저 좋은 걸 어떡하나요. 아마추어의 평범한 객기를 이해 바랍니다.
  
.
▲ 우정 .
ⓒ 박병춘

관련사진보기

   
두 분은 친구래요. 역시 양해를 구하고 담았습니다. 서로 번갈아가며 사진을 찍었는데, 이후 지나가는 분들의 포토존이 되더군요. 여행이든 밥 먹는 자리든 누구랑 함께 하느냐가 참 중요하대요. 언제 만나도 편안한 사람이 친구래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친구 관계의 형성과 유지 요인에 대해 쾌락적 친구, 효용적 친구, 인격적 친구로 나누었다고 합니다.

탈무드에는 '귀는 친구를 만들고 입은 적을 만든다'는 말이 있어요. '음식과 같아서 매일 필요한 친구, 약과 같아서 가끔 필요한 친구, 질병과 같아서 항상 피해야 하는 친구'도 있대요. 이 깊어가는 가을에 친구의 의미를 새겨봅니다. 두 분의 우정, 영원하겠죠?
 
.
▲ 선재길 부부 .
ⓒ 박병춘

관련사진보기

   
아름다움을 배경으로 둘만의 시간을 갖는 일, 그것을 사랑이라고 해도 괜찮을 듯해요. 저 두 분은 분명 사랑하는 사이겠지요. 선재길에는 부부, 가족, 연인, 친구들이 함께 해요. 나홀로 걷기에도 탁월한 공간입니다. 위험하거나 힘든 구간이 거의 없어 연세 지긋한 분들도 일정 구간을 편하게 걸을 수 있습니다. 깨우침의 길이 선재길이랍니다. 여럿이 혹은 나홀로 여러분의 몸과 마음을 선재길에 맡겨 보세요.
  
.
▲ 더불어 함께 .
ⓒ 박병춘

관련사진보기

   
'더불어 함께, 따로 또 같이' 단풍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다리 위에 모였어요. 멀리서 망원렌즈로 촬영하는데, 일부 산행인들이 열린 마음으로 행복한 포즈를 취합니다. 제게도 참 행복한 일이지요.
  
.
▲ 낙엽과 그림자 .
ⓒ 박병춘

관련사진보기

 
여정을 마무리하며 단풍잎들이 냇물에 떨어져 있는 모습을 만났습니다. 그림자는 다리 위에 서 있는 저의 모습입니다. 나뭇잎을 떨군 나무는 겨울을 준비합니다. 그림자로 비친 저도 겨울을 준비해야 합니다. 나무에겐 낙엽이 있고, 제겐 그림자가 있습니다. 낙엽과 그림자는 분명 다를 테지만, 그림자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그림자야, 너도 내 몸에서 낙엽처럼 떨어진 거니? 그렇다면 추악한 마음만 떨어져 저 낙엽과 함께 멀리멀리 흘러가렴.'

태그:#박병춘의 산골 통신, #선재길 단풍, #오대산 선재길
댓글3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