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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 시간 삶의 '흔적'이 쌓인 작은 공간조직이 인접한 그것과 섞이면서 골목과 마을이 되고, 이들이 모이고 쌓여 도시 공동체가 된다. 수려하고 과시적인 곳보다는, 삶이 꿈틀거리는 골목이 더 아름답다 믿는다. 이런 흔적이 많은 도시를 더 좋아한다. 우리 도시 곳곳에 남겨진 삶의 흔적을 찾아보려 한다. 그곳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를 기쁘게 만나보려 한다. [기자말]
서울 동대문을 벗어난 걸음이 개천(開川)으로 향한다. 청령포로 귀양 가는 왕을, 여기까지 따라온 왕비가 배웅했다던 영도교(永渡橋)에 이른다. 곧게 흘러온 물이 오간수문을 빠져나와 여기서 북으로 활처럼 휜다. 아낙들이 모여 소식을 나누었다는 빨래터 지나, 개천은 점점 품을 넓힌다.
 
동대문을 나와 함경, 강원, 경상도로 향하는 도성밖 첫 길. 청계7가와 8가 한가운데서 개천을 건너는 다리.
▲ 개천 영도교 동대문을 나와 함경, 강원, 경상도로 향하는 도성밖 첫 길. 청계7가와 8가 한가운데서 개천을 건너는 다리.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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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교는 청계7가∼8가 한가운데에서 개천을 건넌다. 한양에서 강원도와 경상도, 함경도로 향하던 길 초입이다. 왕십리 지나 뚝섬과 광나루를 잇대었으니 분명 번잡했으리라. 다리 건너가 황학동이다. 성동공고 남측의 가구 거리 평탄 지형이 왕조시대부터 장터였으니, 이곳 역시 물산과 사람들로 붐볐으리라.

왕십리 채소밭과 황학동 미나리꽝이 도성 찬거리였고, 강원도에서 북한강 따라 떠내려온 땔감이 뚝섬에서 이곳으로 옮겨져 도성 구들장을 덥히던 곳이다. 서울중앙시장 자리는 제법 경사진 구릉으로 무덤이 부지기수였다.

황학동

누구는 생의 가장 화려한 시절을 지나는 중일 것이고, 누구는 지나왔는지 모른다. 혹여 시절이 모두 소진되었다 느껴지거든, 황학동 중고시장에 가 보시라. 그곳에서 또 다른 내 얼굴을 만나거나, 잃어버린 나를 되찾게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의 황학동은 크게 주방 거리와 서울중앙시장, 성동공고 앞 가구 거리, 개천 변 중고시장으로 나뉜다. 주말만 되면 개천 양안에 노천 풍물시장이 열리는데, 앞사람 뒤통수를 보며 걸어야 한다고 상인은 말한다.
 
황학동 공간구조의 중심을 이루는 서울중앙시장 북측 입구 모습. 길 건너가 주방거리 및 중고시장 자리임.
▲ 서울중앙시장 황학동 공간구조의 중심을 이루는 서울중앙시장 북측 입구 모습. 길 건너가 주방거리 및 중고시장 자리임.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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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을 건너자마자, 옛 모습이 오래된 사진으로 오버랩한다. 신기루처럼 사라진 옛 풍경을 비웃는 듯, 시민 아파트가 사라진 자리엔 하늘을 찌를 듯 높다란 아파트가 시선을 가린다. 고가도로와 복개도로가 사라진 개천엔 거대한 'U자형 콘크리트'가 퍼 올린 물을 하류로 흘려보내고 있다.

마을 이름이 신비롭다. 신령스러운 노란(黃) 학(鶴)이 내려앉아서 황학동인가, 주변에 백학동이 있어 그리 불렀을까. 일제강점기 땔감과 숯을 거래하는 시탄시장(1923)을 열었고, 재래시장 기능을 없애려 공설시장(1941)을 개설하면서 지금과 비슷한 토지이용을 보인다.

인근에 귀국 동포와 월남민이 모여들어 판자촌을 형성하고, 군데군데 도시형 한옥이 자리 잡는다. 공설시장은 해방을 맞아 성동시장(1946)이었다 서울중앙시장(1962)으로 변모한다.

배고픔은 얼마나 처절한 고통이었을까? 삶을 찾아 도성 밖 개천 변에 자리했으나, 주린 배 채우기가 최우선이다. 살림살이와 가재 등속, 무엇이건 돈이 된다면 내다 팔아야 했다. 제방과 좁은 길은 돈 들이지 않고 점포를 열 수 있는 최적 조건이었다. 가히 중고품 노점 전성시대다. 해방 직후 성동공고가 자리(1946)하면서 랜드마크가 된다. 하지만 공간은 변천하는 시대의 단면으로, 아직도 잘린 상처 그대로다.

시대의 단면

한국전쟁은 모든 것을 앗아갔다. 황학동도 예외가 아니어서 가옥과 상점이 황폐화한다. 휴전되자, 판자촌이 다시 점령한다. 월남인과 유랑민, 먹고살 궁리로 농촌에서 몰려든 사람들이다. 노점과 사창가, 고물상과 미곡상이 공간을 채운다.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공구와 의복 등이 거래된다. 가난과 혼돈, 무질서가 난무했어도 삶의 가느다란 끈을 이어 가려는 몸부림이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시간이 흘러 고물상 일부가 골동품 전문점으로 변모한다. 덩달아 훔친 물건이 쉽게 거래되는 장물 처리시장이란 불명예도 따라붙는다. 가발용 머리카락이 주요 품목으로 부상하고, 미곡상이 중앙시장을 먹여 살린다.

1960년대 중반 빈번한 화재는 불행에도 불구하고, 공간구조를 바꾼 시작이었다. 화재가 사창가를 소멸시킨다. 사창가가 사라진 곳에 더 많은 상점과 노점이 고물과 골동품을 취급하며 공간을 채워 나간다.

공간은, 1967년 청계6가~청계8가의 복개로 개천이 빛을 잃음과 동시에 해체된다. 복개로 제방과 천변 도로를 점유하던 노점이 터전을 잃고, 주변 많은 판잣집과 도시형 한옥이 철거된다.

터전을 잃은 노점과 철거민을 위해 개천 양안에 7층의 각 12개 동 주상복합 삼일 시민 아파트(1969)가 들어서 경관마저 바꿔 버린다. 시민 아파트 뒷골목을 노점이 다시 점령한다. 골동품 상가가 이때 정식으로 인가받는다.
 
고가도로가 건설 중인 한 쪽에 남아 있는 판잣집. 복개와 고가도로로 개천 변 노점과 판잣집이 철거 당해 광주대단지 등으로 쫓겨남.
▲ 청계 고가도로와 판잣집(1969) 고가도로가 건설 중인 한 쪽에 남아 있는 판잣집. 복개와 고가도로로 개천 변 노점과 판잣집이 철거 당해 광주대단지 등으로 쫓겨남.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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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개도로 위로 고가도로가 들어선다. 청계7가∼8가는 1969년 완공된다. 늘 그늘을 드리우는 고가도로는 주변 토지이용을 잠식한다. 소음으로 정주 여건이 열악해진 까닭에 지대(地代)도 낮아, 가난한 서민이 그나마 정착하는 역설을 창출한다.

복개도로와 고가도로에 밀려 설 자리를 잃은 노점이 골목 깊숙이 침투해 온다. 공간구조 변천의 역설이다. 골동품은 70년대 내내 엄청난 호황을 누린다. 효용을 다한 민속공예품 등이 시골에서 대량으로 풀린다. 새마을 운동 때문이다. 모름지기 이때를 전후하여 벼룩시장이라는 칭호를 얻지 않았을까.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은 어떤 존재였을까? 도시재정비라는 명분으로 오히려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엉뚱한 곳으로 몰아낸다. 이때를 즈음하여 200여 곳이던 골동품점이, 20여 곳만 남기고 답십리 고미술 상가로 이주(1983)한다. 이 자리를 중고품을 취급하는 전자와 기계, 공구점이 차지한다. 시내에서 밀려난 노점도 몰려든다. 도깨비라거나 개미, 마지막 시장이란 별칭이 이때 생긴다.
 
황학동 중고시장 첫 골목. 골동을 취급하는 곡성당과 주변 음반 가게가 맞은 편 노점과 공존하고 있음.
▲ 첫 골목 황학동 중고시장 첫 골목. 골동을 취급하는 곡성당과 주변 음반 가게가 맞은 편 노점과 공존하고 있음.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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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복원(?)으로 개천은 다시 빛을 보지만, 노점은 이때 길을 잃는다. 대대적인 단속과 철거가 자행된다. 저항도 거셌다. 궁여지책으로 옛 동대문 운동장에 임시 풍물벼룩시장(2004)을 열게 한다.

옛 운동장마저 철거(2007)되어 국적 불명의 건축물 착공이 이뤄지자, 노점은 또다시 길을 잃는다. 우여곡절을 겪고 가까스로 신설동 옛 숭인여중 부지에 장터를 조성해 900여 노점이 입주(2008)한다. 결과적으로 황학동은 서울시 정책에 따라 셋으로 갈라져 답십리, 신설동으로 밀려난 모양새가 되었다.

흔적과 변화

황학동 중고시장 길은 넓으며 깊다. 켜켜이 쌓인 오랜 시간의 흔적을 온전하게 품고 있어서다. 하지만 길은 한없이 좁기도 하다. 쓰임을 기다리며 하염없이 시공간의 층을 쌓아 올린 중고품이 골목을 점령하고 있어서다.
 
황학동 중고시장의 한 카메라 가게. 시대별로 변화해 온 각종 카메라가 전시되어 있어 쌓인 시간의 흔적을 느낄 수 있음.
▲ 중고 카메라 상점 황학동 중고시장의 한 카메라 가게. 시대별로 변화해 온 각종 카메라가 전시되어 있어 쌓인 시간의 흔적을 느낄 수 있음.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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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선 중고품도 훌륭한 상품이 된다. 우선 눈이 즐겁다. 눈이 즐겁다는 건 그만큼 구경거리가 널려 있다는 뜻이다. 하루에 다 둘러볼 수 있을까 싶은, 다른 주인을 기다리는 물건이 산더미다.

노동의 산물로서, 효용이 살아 있는 상품이거나 아직 사용가치가 남아 있는 것들이다. 중고품은 이곳 기술자의 손에서 또 다른 상품으로 재탄생한다. 다듬어지고 고쳐지고 부품이 갈아 끼워져, 가치가 높아진다. 이곳에선 말이다.

개천 변 가까이 골동품점 몇이 옛 영화를 되새김질한다. 1970년대 화려한 전성기를 누리던 흔적은 이제 손에 꼽을 정도다.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이다.

골동품점이 비운 자리를 낚시용품과 LP 레코드 등이 채웠고, 전자제품이 중고시장 천이와 군집의 대표종목으로 자리매김했다. 1980년대 전자제품 전성기를 이야기하듯 안으로 갈수록 세탁기, 냉장고, TV 등이 골목을 점령하고 있다. 가운데 길은 기계와 모터, 공구점 등이 메우고 있다.
 
오래된 생활가전 등으로 길게 늘어선 골목은, 그야말로 없는 게 없는 중고시장의 전형임.
▲ 성동공고 담벽 골목 오래된 생활가전 등으로 길게 늘어선 골목은, 그야말로 없는 게 없는 중고시장의 전형임.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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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동공고 담벼락 따라 늘어선 노점과 상점엔 오래된 카세트 플레이어를 비롯한 빈티지 전자제품이 주류를 이룬다. 오래된 카메라와 TV 등을 쉽게 볼 수 있으며, 각종 생활가전이 주류를 이룬다. 한때 황학동 효자품목이던 가발을 취급하는 노점도 있다. 이 공간엔 없는 것 빼곤 다 있다는 말이 딱 그대로 재현되어 있다.

안쪽 마장로에 가까워질수록 주방용품이 공간을 지배한다. 셀 수도 없는 다양한 그릇은 물론 싱크대와 가스레인지를 비롯하여 각종 화구가 새로 단장한 모습으로 또 다른 주인을 기다린다.
 
마장로 5길 중고시장에 들어선 주방골목. 이곳은 자영업자 등 서민경제의 가늠자 역할을 하는 곳임.
▲ 중고시장 주방골목 마장로 5길 중고시장에 들어선 주방골목. 이곳은 자영업자 등 서민경제의 가늠자 역할을 하는 곳임.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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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목은 자영업자로 상징되는 서민경제 가늠자다. 자영업자가 폐업하면 쓸모있는 주방용품이 이곳으로 실려 온다. 코로나19는 자영업자를 벼랑으로 내몰았다. 폐업이 속출했고, 이곳 창고는 더는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넘쳐난다. 신규 창업의 발길은 끊어진 지 오래다. 거래가 절벽이니, 덩달아 이곳 상인들의 한숨도 깊어만 간다.

황학동은 온통 중고품 천지다. 이곳에 서면 절로 즐겁다. 중고품 가치를 높이려 쉼 없이 돌아가는 기계 소리, 남아 있는 쓸모를 찾아 구석구석 닦고 조이며 정성을 다하는 상인의 모습에선 비장함마저 느껴진다. 하지만 황학동은, 쥐 파먹듯 곳곳에서 벌어지는 재개발로 여기저기 뜯겨 나가는 중이다.

좁으나 넓고 깊은 황학동 골목이 묻는다. 빛나는 시간을 갉아먹어 중고라 해도, 다하지 못한 내 삶의 사용가치는 과연 얼마일까. 남아 있다면 쓰임은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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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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