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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1946년 '서울특별자유시'가 되었고 1949년에 '서울특별시'가 되었다. '서울특별시 행정특례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서울특별시는 정부의 직할하에 두되 이 법이 정하는 범위 안에서 수도로서의 특수한 지위를 가진다"고 되어 있다. 수도 행정의 독자적인 특성을 발전시키기 위해 서울을 특별시로 정한 것이다.

해방 후 주민등록증이 나온 1968년까지 서울 시민들은 '시민증'이 신분증이었고, 서울 아닌 지방에서 사는 사람들은 '도민증'이 신분증이었다. 그만큼 시민증은 특별한 국민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빙이었다. 그런데 1963년에 서울로 편입된 강남 지역 사람들은 한동안 특별시가 아니라 '서울보통시'에 산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농촌이었던 서울 근교 강남

1960년대와 70년대 강남을 묘사한 신문 기사들을 보면 도시 외곽의 전원, 혹은 농촌을 떠올리게 한다. <경향신문> 1964년 3월 26일의 '나룻배 뚝섬 봉은사' 기사는 뚝섬 유원지를 소개하는 글이지만, 당시 서울 근교였던 강남의 모습도 엿볼 수 있다.

기사에 따르면 '뚝섬 나루터'는 강 건너 청담동이나 "서울 근교의 관광지인 봉은사"로 가는 길목이었다. 이 시기는 뚝섬 인근에 다리가 없었기 때문에 나룻배를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에 5백여 명이 이용한 뚝섬 나루터는 뚝섬에서 청담동 방향과 봉은사 방향의 두 코스를 운행했다.

뚝섬으로 가는 나룻배는 시민들이 교통수단으로 이용하기도 했지만, 청담동과 삼성동, 그리고 대치동 농민들의 농산물 운송 수단이기도 했다. 이 지역은 서울 시민들에게 "채소와 과일"을 공급하는 농촌이었다. 그래서 봄철이면 "무거운 짐짝과 월간 50대의 마차와 40대의 손수레마"가 나루터를 이용했다고 한다.
 
뚝섬 나루터에서는 송파와 청담동을 뱃길로 연결했다.
▲ 영동대교 북단 아래의 "뚝섬나루터" 표지석 뚝섬 나루터에서는 송파와 청담동을 뱃길로 연결했다.
ⓒ 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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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8년여가 지난 <조선일보> 1972년 12월 9일의 '새서울 영동 파노라마' 기사에서도 과거의 모습과 크게 달라지지 않은 강남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기사에서 강남은 "선정릉과 봉은사"가 자리 잡고 "크고 작은 50여 개의 구릉"이 있는 "도시 속의 농촌"으로 묘사된다. 한남대교가 놓이기 전에는 "버려진 땅" 아니면 "서울 시민들에게 야채를 대어주는 채소밭"이 많았고 주민들에게는 "농사가 생업"이었다고 소개한다.

특히 "압구정동, 청담동, 삼성동, 논현동, 학동, 대치동" 등은 "서울보통시"라는 별명이 붙었었다고. 이 지역에 사는 주민들이 서울 시내로 가려면 "청담 나루터에서 나룻배를 타고 뚝섬으로 건너"가 도심으로 가는 버스로 갈아타야 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지하철 수인분당선 '압구정로데오역'의 이름이 '청수나루역'이 될 뻔 했었다. 역이 자리한 청담동에 나루터가 있었던 역사를 반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민들 반대로 '압구정로데오'로 역명이 정해졌다.

배가 끊기면 헤엄쳐 건너야

강남의 옛 모습을 과거 신문에서 찾다 보면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들을 목격하곤 한다. <조선일보> 1970년 7월 17일의 '서울의 길 닦아온 25년 어느 과장의 사임'이라는 기사가 특히 인상 깊었다.

서울시청에서 25년 근무하고 퇴임한 오모 과장이 기사의 주인공이다. 그는 서울 도로 개발의 실무를 담당했던 서울시 도로포장과 과장이었다. 그런 오과장의 공적도 훌륭하지만, 그의 일화는 더 특별했다.

오과장의 집은 청담동에 있었다. 1973년에야 영동대교가 완공될 예정이니 당시 청담동 주민들이 서울 도심으로 가려면 멀리 한남대교로 돌아가거나 뚝섬에서 나룻배를 타야 했을 것이다.

오과장도 "25년간을 한결같이 나루를 건너 통근"했다고. 그런데 밤늦게 퇴근할 때 나룻배가 끊기면 "몇 번이나 헤엄쳐 건너야 했다"는 믿기 어려운 사실이 기사에 나온다. 
 
영동대교 북단은 예전에 청담동과 송파를 나룻배로 연결하던 뚝섬나루터가 있던 곳이다.
▲ 영동대교 북단에서 바라본 청담동 영동대교 북단은 예전에 청담동과 송파를 나룻배로 연결하던 뚝섬나루터가 있던 곳이다.
ⓒ 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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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뚝섬에서 청담동 방향을 바라보면 무척 멀다. 멀기도 하려니와 강물은 깊고 흐름도 빨라 보인다. 그런데 헤엄쳐 건널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의견을 들을 수 있었다. 

뚝섬 나루터가 있었던 영동대교 북단 근처에서 만난 노인들에 따르면 한강 상류에 다목적댐 건설을 하기 전에는 강폭이 이렇게 넓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에는 장마 때가 되어야 강물이 불어났다고.

특히 갈수기에는 강폭이 더욱 줄어드는 데다 깊지도 않았다고 한다. 거기에 뚝섬에서 강 중앙까지 모래사장이 펼쳐져 있어서 수영에 익숙하면 헤엄쳐 건너갈 수 있었을 것이라고. 

1970년대 강남은 개발이 진행되면서도 한켠에서는 농촌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경향신문> 1972년 6월 21일의 '사재로 탁아소 마련' 기사는 강남에서 발생한 미담을 전한다.

대치동에 사는 임모씨가 "주부들의 일손을 덜어주기 위해" 자기 집에 탁아소를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임씨는 "농사터가 많은 서울의 변두리" 주부들을 위해 탁아소를 운영하게 되었고, "4H 클럽 회원들의 협조"를 받아 아기들을 무료로 돌보고 있다고 전한다. 

4H 클럽은 '낙후된 농촌의 생활 향상과 기술 개량을 도모하고 청소년들을 고무하기 위해 조직한 국제적 운동 단체'다. 농촌 계몽 운동을 목적으로 하는 4H 클럽이 1972년 당시 대치동에 있었던 것. 기사에 나온 주소를 지금의 지번으로 확인하니 대치동 은마아파트 근처였다.

사라질 은마아파트
 
가운데 농지에 은마아파트가 들어서게 된다. 상단의 마을이 기사에서 언급한 마을로 보인다.
▲ 대치동 일대를 1976년에 촬영한 항공사진 가운데 농지에 은마아파트가 들어서게 된다. 상단의 마을이 기사에서 언급한 마을로 보인다.
ⓒ 서울역사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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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는 1980년대에 은마아파트 인근의 고등학교에 다녔고, 은마아파트에는 친구들이 여럿 살았다. 그리고 학교와 은마아파트 사이에는 '민속촌'으로 불렸던 옛 농촌 마을이 있었다.

그 동네를 주변의 아파트단지와 비교하면 예스럽게 보여서 사람들이 민속촌으로 불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도 그곳 어딘가에 탁아소가 있지 않았을까. 이후 민속촌은 '대치동 구마을'로 불렸고, 지금은 재개발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공사장 입구에는 철조망 안에 갇힌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다. 1968년에 서울시에서 보호수로 지정해 강남구에서 관리하는 수령 500년이 넘은 은행나무다. '대치동 은행나무'는 구마을이 사라지고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어 가는 이 동네에서 유일하게 예전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서울시에서 보호수로 지정한 수령 500년이 넘은 은행나무다. 바로 옆에서 아파트 공사가 진행 중이다.
▲ 대치동 은행나무 서울시에서 보호수로 지정한 수령 500년이 넘은 은행나무다. 바로 옆에서 아파트 공사가 진행 중이다.
ⓒ 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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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재건축 심의 통과했다는 플래카드가 단지 곳곳에 붙어 있다.
▲ 대치동 은마아파트 서울시 재건축 심의 통과했다는 플래카드가 단지 곳곳에 붙어 있다.
ⓒ 강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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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마아파트에는 서울시의 재건축 심의를 통과했다는 플래카드가 단지 곳곳에 붙어 있다. 한때 대치동, 혹은 강남의 아파트를 상징하던 은마아파트는 사라질 확률이 높아졌다. 재건축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새로운 아파트가 들어서면 사람들은 은마아파트를 어떤 모습으로 기억할까.

'강북 보통시'. 1988년 2월 17일 <동아일보>에 실린 어느 칼럼의 제목이다. 학군은 물론 모든 생활 환경에서 강남이 강북보다 앞서가는 모습을 지적하며 강북이 특별시가 아니라 보통시가 되어간다는 취지의 글이다.

이미 그로부터 십여 년 전에 나온 신문 기사에서는 강남을 두고 '서울보통시'라고 한 것을 보면 아이러니한 일들이 서울에서 벌어진 것 같다. 어쩌면 그 이후 지금까지 그럴지도 모르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브런치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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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중반을 지나며 고향에 대해 다시 생각해봅니다. 내가 나고 자란 서울을 답사하며 얻은 성찰과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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