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0.27 14:34최종 업데이트 22.10.27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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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동(왼쪽) 외교부 1차관과 모리 다케오(오른쪽 일본 외무성 사무차관이 26일 도쿄에 있는 외무성 이쿠라공관에서 한미일 3국 외교차관 협의회 공동 기자회견이 끝난 뒤 악수하고 있다. 2022.10.26 ⓒ 연합뉴스

 
강제징용(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지급할 배상금을 한국 기업들이 대신 갹출하고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같은 법적 제3자가 이를 피해자에게 전달하는 방안이 힘을 얻어가고 있다. 한·일 양국 외교부는 이 방안을 유력한 카드로 놓고 협의를 진행하고 있다.

25일 도쿄 외무차관 협의에서 양국은 강제징용 문제에 관한 협의를 가속화 하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 조현동 외교부 1차관과 모리 다케오 외무성 사무차관의 논의와 관련해 일본 외무성은 홈페이지 발표문을 통해 "두 차관은 양국 간의 현안이나 과제를 포함해 일한 관계 전반에 관해 솔직한 의견교환을 했습니다"라고 만족감을 표한 뒤 "협의를 가속화함과 함께 외교당국 간의 긴밀한 의사소통을 계속해 가기로 하는 것에 일치를 봤습니다"라고 말했다.


2개 항으로 된 발표문의 제2항은 북한 핵 및 미사일 문제와 일본인 납치문제에 관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1항에서 말한 위의 내용은 한·일 간의 최대 현안인 강제징용에 관한 것이다. 강제징용 노동자의 일본 측 표현인 '징용공'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 방법으로 이 문제에 관한 협의 결과를 발표했던 것이다.

회담 과정이 "솔직"했다며 만족감을 표하면서도 일본 외무성이 제1항의 의제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다. 그동안 일본 정부가 이 문제와 관련해 한국에 관한 부정적 이미지를 조성해왔기 때문에, 아직 확실하게 결론이 나지 않은 상황에서 자국민들에게 '낭보'를 알릴 수 없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앞으로 한국 상황에 변화가 생길 수 있다는 점도 감안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징용공 문제란 표현을 사용하지 못하고 '양국 간의 현안과 과제'라는 두루뭉술한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이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의 협상 과정에 대한 일본 정부의 만족감이 제1항에 묻어 있다는 점이다.

그간 한국에 고압적인 태도를 보여왔던 일본이 "솔직한 의견교환"을 했다며 협상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거기다가 '협의를 가속화한다', '긴밀한 의사소통을 계속한다' 같은 표현으로 향후 상황에 대한 기대감을 조성했다. 지금 진행 중인 협의가 불만족스럽지 않음을 표시한 셈이다. 

한국 기업의 갹출하도록 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는 보도들을 한국 정부가 부정하지 않는 가운데 한·일 두 정부가 이처럼 우호적 분위기 속에서 협의를 진행하고 있으므로, 지금으로서는 이 방향으로 결론이 굳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은 쏙 빠진 채 한국기업이 배상?

그런데 이 방안은 피해자들이 전범기업으로부터 사과·배상을 받을 가능성을 봉쇄할 뿐 아니라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식민지배 문제 전체에 악영향을 줄 가능성이 농후하다. 1965년 한일협정 및 청구권협정으로 역사 문제가 종결됐다는 일본측 주장에 힘을 실어줄 가능성도 매우 짙다.

이 문제를 빨리 해결하고 싶어 하는 윤석열 정부의 입장에서는 정부 자금이라도 동원해 배상금 명목으로 피해자들에게 지급하는 방안을 고려해볼 수도 있지만, 이렇게 되면 훨씬 더한 국민적 저항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전범기업을 대신해 금전 지출을 하는 일에 정부 세금이 사용된다면 국민의 분노를 잠재울 길이 요원하게 될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도 윤석열 정부는 한국 기업들의 갹출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한국 기업 자금으로 배상금 재원을 마련할 경우, 자금 갹출 압력을 가장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 곳은 포스코처럼 청구권 자금을 사용한 기업들이다. 1965년 청구권협정에 따라 일본 자금을 사용한 포항제철의 후신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위해 자금을 써야 한다는 이야기는 윤석열 정권에서도 나오고 있다.

특히 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포스코의 의무를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기자 시절부터 이런 주장을 폈던 그는 지난 5월 2일 인사청문회에서도 "65년에 청구권 자금을 받아서 포항제철 짓고 여러 발전을 이뤘으니까 일본인한테 받은 돈으로 발전한 기업들은 우선적으로 먼저 피해자에게 지원을 해달라"는 의미라고 자기 입장을 밝혔다.

청구권협정에 따라 일본이 지급한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민간차관 3억 달러는 식민지배와 무관한 것이었다. 기시다 후미오 내각은 이 협정에 따라 식민지배 문제가 해결됐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지만, 이 협정에서 다룬 청구권은 해방 당시의 일반 재산청구권에 불과했다. 2012년 대법원 판례 역시 '청구권 협정으로 식민지배 피해자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이 소멸된 것은 아니다'라는 입장을 취했다.

박정희 정권은 식민지배 문제 해결을 일본에 요구하지 않았다. 박 정권이 요구한 것은 경제협력이었다. 위의 합계 8억 달러도 그렇게 해서 지급된 것이다.

이 돈을 받은 한국 기업은 매우 많다. 가장 많이 사용한 기업은 포항제철이지만, 이 외에도 한둘이 아니었다. 정부출연기관인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이 펴낸 <대일 청구권자금의 활용 사례 연구>는 "238개 중소기업체의 시설 확장과 개선에"도 사용됐다고 보고한다.

청구권 자금을 사용한 포스코 등이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지원금이나 성금을 지급하는 것은 얼마든지 권장될 만한 일이다. 하지만 이런 기업들이 미쓰비시나 일본제철 같은 전범기업을 대신해 자금을 갹출하고 그 돈이 배상금 명목으로 피해자들에게 전달되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포스코 등이 청구권자금을 사용했다는 이유로 징용 피해자들에게 돈을 지급하게 되면, 이는 결과적으로 1965년 청구권협정이 식민지배 불법행위를 처리하는 협정이었다는 말이 된다. 피해자들에게 갈 돈이 1965년 협정으로 일본에서 한국으로 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1965년 협정으로 모든 것이 끝났다'는 기시다 내각의 논리가 힘을 받게 되는 것이다.

포스코 등이 자금을 내면 일본의 논리에 힘이 실리게 된다는 점은 일본 언론에서도 보도되고 있다. 다니엘 스나이더 스탠드대학 쇼렌스타인 아시아태평양연구센터 부주간이 지난 14일 자 일본 경제지 <도요게이자이>에 기고한 '일·한 급(急)접근에도 징용공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진짜 원인(日韓"急接近"でも「徴用工問題」が解決しない真因)'에도 그런 시각이 드러나 있다.

이 글은 한국 정부가 300명 정도의 피해자에게 지급할 배상금을 기업들로부터 거두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고 설명하는 대목에서 "한국의 철강 메이커 대기업인 포스코로부터 다액의 기부가 전달된다"라고 한 뒤 "이 기금을 이용할 경우, 배상문제는 1965년 협정으로 다 해결됐다는 일본측의 주장이 간접적으로 인정되게 된다"라고 평했다.

일본 극우 손들어주는 격

포스코 등이 배상금 자금을 부담하는 방향으로 문제가 봉합되면, 일본 정부와 극우세력은 '청구권협정으로 식민지배 문제가 해결됐다'는 기존 주장을 더욱 강화할 게 뻔하다. 이렇게 되면 일본 국민들은 이미 배상금을 수령한 한국인들이 그동안 엉뚱한 주장을 해오다가 뒤늦게 잘못을 시인했다는 인상을 가질 수 있다. 이는 일본의 사과와 반성을 촉구하는 일본 내 평화세력의 입지를 위축시켜 문제 해결을 더 요원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그리고 위안부 문제에도 부정적 영향을 끼치게 된다. 청구권협정으로 강제징용 문제가 해결된 듯한 이미지를 조장하게 되면 위안부 문제 역시 그렇게 된 것 같은 인상을 조성할 위험이 있다.

청구권협정 조문 어디에도 강제징용 문제가 언급돼 있지 않다. 그런데도 이 협정으로 징용 문제가 해결된 듯한 분위기를 만들게 되면, 이 협정으로 인해 나머지 문제도 다 해결된 듯한 느낌을 조장할 수 있다. 윤석열 정부와 기시다 내각 입장에서는 포스코 등의 자금 갹출을 통해 강제징용뿐 아니라 위안부 문제까지 봉합시킬 수 있는 일석이조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런 위험성을 볼 때도 포스코 등의 기업들이 미쓰비시나 일본제철을 대신해 기금을 갹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포스코 등이 피해자나 유족들을 개인적으로 돕는 것은 몰라도 전범기업을 대신하는 것은 문제 해결을 더욱 꼬이게 만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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